3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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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기억이 끊어졌고, 살짝 고개를 돌리니 바깥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푹 잤다는 생각과 함께 침상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바라보니 먹구름과 빗줄기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얼추 정오 무렵은 된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여기 있노라고, 괜찮으니 자라고 했던 게 밤이었으니 얼마나 오래 잤을까.
그걸 모를 정도로 푹 잠들었다.
“오랜만이네.”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를 붙잡고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떠올라 지금 당장에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 부끄러움 이전에 자기 자신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떠들 정도로 힘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소연은 손을 뻗어 지붕 바깥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톡톡 손바닥에 떨어지는 차가운 감촉과 이어 손바닥에 고이는 빗물을 바라본다.
차가웠으나 시원했다.
그것이 흐렸던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았으니, 그녀는 이런 날씨를 좋아했다. 비가 온다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이런 자연의 변화를 통해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었고, 만약 불가능하면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랬던 것이 사람들을, 호세라는 사람을 만나고 점점 얽히고 변하면서 이제는 이 세계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졌다.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미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세계에 가장 소중한 것이 생겨버렸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
그것은 그녀를 점점 좀먹어가는 질병으로 변했다. 벌레가 제 몸을 기어 다니는 기분이 마치 이러할까. 이 세계에서 언제 다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강박관념과도 비슷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것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여서.
소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최근 그녀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대전쟁을 막고 안정적인 세계로 만들고 싶다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저 자신이 있었다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만일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호세, 그리고 남겨질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싶었다.
“웃기네, 정말.”
그녀는 손을 뻗었다.
빗줄기는 주적주적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차갑게 흐르는 물줄기가 대지를 적시는 광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런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그와 함께한 저녁과 밤. 그 사이에 속에 쌓인 것들을 전부 토해내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호세는 마지막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이 그리 쉬이 도망칠 사람으로 보이냐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손을 꽉 붙잡아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이 세계에 떨어진 과정도 갑작스러웠으니 돌아가는 과정도 갑작스러울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그의 손길은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그것만 있으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을 때.
“……아가씨.”
순간 저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이 장대비가 거세게 퍼붓는 날에 우산 하나 없이 비에 쫄딱 젖어 선 여인.
“……운이니? 거기서 왜, 아니 비 오잖아.”
소연은 우선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정말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는데, 표정 또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의문보다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있는 수건이란 수건은 전부 모아다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바쁜 일이니? 그렇다고 해도 왜 우산도 없이. 일단 좀 머리 좀 닦자.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죄송해요.”
그녀는 소연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의 머리를 닦으려던 그 팔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소연의 호의는 오히려 독과도 같았다. 더 자신을 좀먹고 아프게 하는, 가슴 한편에 박힌 바늘과도 같은 부분이 있었다.
“저, 아가씨한테 사죄해야 할 게 있어요.”
“아니 일단은…….”
소연은 그런 그녀를 애써 만류하며 머리를 닦으려 했다. 중요한 말이더라도 사람이 홀딱 젖은 상황에서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의 머리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한데 목욕 물 좀 받아줄래?”
“예, 어르신.”
저택에는 항상 시종이 있었고, 소연은 그런 그녀에게 물을 받아달라 하면서도 양손으로는 조운의 머리를 털었다. 정말 비에 젖어도 흠뻑 젖었는데, 몸까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어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얘도 참. 진짜 어디서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뭘 그리 잘못했기에 그래? 얼마나 잘못했어도 내가 널 모질게 대하겠니? 일단 좀 씻고, 따듯하게 한 다음에 해도 늦는 얘기는 아니잖아.”
조운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뺏었어요.”
힘없이 소연의 팔을 밀어낸 그녀는 애써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머리를 적신 빗물인지 제 눈물인지 알 겨를도 없었다. 단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소연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한때는 소연을 어려워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은 호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소연은 그런 그녀에게 거리를 주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하기 힘들지만, 그렇게 점차 말을 섞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진소연이라는 사람은 여린 사람이었다.
“저, 아가씨한테 오라버니를 뺏었다고요.”
그러니 잘해주지 말라고.
“아가씨한테 거절당했다고 슬퍼하는 오라버니를 달래다가, 그러다가 술이 들어가서. 그러다가 맺은 관계에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뿐이에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니.”
“아뇨, 저 알고 있었어요. 오라버니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누구를 바라보는지. 그리고 아가씨도 오라버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어요.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은 죄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졌다는 행복함과 아가씨를 배신했다는 죄악감. 그것이 그녀에게는 뿌리처럼 깊게 내리 앉았고, 그렇기에 그녀는 호세와 일정 이상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연인은 될 수 없었고, 평소 이상으로 깊어질 수도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
소연은 작게 답하고는 수건을 움직였다.
멈췄던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닦는다. 그녀가 그런 소연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살짝 벗어나려 할 때, 소연은 오히려 손에 힘을 줬다.
“그럼 난 널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 될까?”
“아니, 아가씨. 그게…….”
“내가 말했잖니. 난 거기서 한 번 거절했어. 그러면 그 뒤의 일을 내가 뭐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않겠니? 그게 내가 했던 선택이니까.”
설령 그 이유가 무엇이더라도.
그녀는 아직도 이 세계와 현실의 괴리. 그리고 언제 다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그 탓에 이 삼국지의 세계에서 겉돌던 감도 있었다.
이유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네가 미안해할 문제야? 그건 내 선택이었고, 내 혼란이었어. 그때 호세의 손을 밀어낸 것도 내 감정이었는데, 왜 그걸 네가 책임으로 잡는 거야?”
“……저는, 그. 아가씨를….”
“걱정하지 마. 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희 둘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족하지 않더라도 참을 수는 있으니까.”
소연은 빙긋 웃고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살짝 피부에 손이 닿았는데 차가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빨리 온탕에 들여보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을 즘, 조운은 그런 그녀를 향해 살짝 손을 뻗었다.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손길.
“그게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자신이 그리 머뭇거리는 사이에 몇 명인가 되는 여자와 그가 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그게 전부 확실히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할 자신이 그와 어중간한 관계로 남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진소연과 호세가 맺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아마 그 누가 뭐라고 한들 다가오는 여인들을 거절했지 않을까. 자신과 어중간한 관계로 남았기에 조조의 압력에 응했고, 여포의 간절함에 답했으며, 진궁의 애절함에 끄덕인 게 아닐까.
그 모든 게 가슴에 남아버렸다.
조운은 소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 그리고 호세가 그간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은 일. 그걸 자신에게 설명한 일도.
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 얘기를 듣고 있을 뿐. 조운은 그저 하염없이 속에 쌓인 무언가를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결국, 그 둘의 상사상애에 자신이 끼어들어 모든 걸 망쳤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이 자리가 참회의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일단 물 데워졌겠네. 들어가자.”
“아가씨…?”
소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분명 이건 좀 화가 나긴 해. 난 너희가 사귄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잘 되길 바랐거든. 너니까 겨우 참았던 거야. 내 마음을 겨우 억눌렀던 거고.”
그런데 정작 조운은 자신을 향한 죄책감 탓에 우물쭈물하며 그 관계에 제대로 된 방점조차 찍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호세는 다양한 이유로 여러 여자와 관계하게 되었다.
슬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조조 또한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 과정에서 여포를 살리고자 했던 호세와 충돌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나머지 둘 경우에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
그녀가 아는 호세, 전호라는 남자는 사람을 쉽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매력이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였으니까.
그러니까 화가 났다고 한다면.
“왜 나한테 신경을 써.”
“아가씨.”
“너도 그를 좋아했고 그도 널 받아줬잖아. 그러면 그걸로 된 거 아냐? 나는 기껏 포기했는데, 네가 그러면 나도 화낼 수밖에 없잖아.”
소연은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노의 방향이 틀렸다. 이 또한 결국 헛된 분풀이에 불과했으니,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가슴 한편에서 느껴지는 짜증과 분노, 그리고 그것과 상반된 감정의 이름.
“그런데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아니?”
그녀는 조운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정작 그런 얘기를 듣고, 그러면 나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나 자신. 그걸 돌아보면 얼마나 비참하고 자기 자신에게 혐오가 느껴지는지 아니?”
소연은 조운과 호세의 관계를 응원하고자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맺어졌다면 그걸로 됐다고, 여럿이서 만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너무 현실성이 없다 여겼다.
그런데 막상 일이 벌어지니 기대하는 자신이 있었다.
조운의 얘기를 전부 듣고 그녀의 가슴 한편에 자란 감정의 이름은 기대. 짜증과 분노, 슬픔과 어우러져 그 조그마한 희망의 감정이 싹 틔운 것 자체가 분했다.
“아가씨라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운이 외쳤다.
“오라버니가 가장 사랑하는 건 아가씨예요. 전 알 수 있어요! 그동안 오라버니를 얼마나 오래 보았는데, 그 시선이 누굴 따라다니는지 얼마나 잘 아는데요.”
순간 말문이 멎었다.
소연은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니면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살짝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그런 마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 경우에는 먼저 할 말이 있었다.
“그러면 네가 그를 포기할 거야?”
그 질문에 조운의 말문이 막혔다.
포기한다고 해야 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소연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씻자. 너 이러다가 진짜 감기 걸려. 다행히도 탕이 넓으니까 같이 들어갈까? 예전에는 이런 곳도 없어서 우리끼리 깊은 계곡에서 씻고 그랬잖니.”
“……아가씨.”
“우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그녀는 조운의 손을 붙잡고 살짝 이끌었다.
“난 널 싫어하지 않아. 그걸 기억해줘.”
“……네.”
그렇게 소연은 조운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했고, 그사이 조운은 그런 그녀에게 힘없이 끌려갔다. 아직 할 말이 많았고, 주고받아야 할 감정 또한 있었다.
하지만 가는 발걸음만은 가볍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대지를 두드렸다. 아직 걷힐 줄 모르는 먹구름은 하염없이 대지를 적실 비를 내렸지만, 그 또한 언젠가는 걷힐 게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맑게 개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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