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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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소녀는 옥좌에 앉아 줄곧 고민했다. 지금까지 조조의 행동에 불만은 없었다. 썩 만족하지는 않더라도 불만이 치밀 정도는 아니었으나, 당장 원소의 행보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몇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부정했던 남자가 천하를 쥔다면 원소부터가 과거의 행적을 빌미로 소녀를 신용하지 못할 터.
“상시. 짐은 조조의 손을 드는 게 맞겠지?”
“원소보다는 조조가 낫긴 하옵니다만.”
문제는 조조라고 딱히 지고의 충신이 아니었다. 물론 원소보다는 나았지만, 그건 최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차라리 차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흡사할 터.
조조 또한 황제가 어리다는 빌미로 황제의 권위를 사유화했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어찌 현 황제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 한 원소에 비할까.
“그러면 어찌 하는 게 좋겠는가.”
“지금 당장은 상서령의 움직임에 호응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녀라면 적어도 이 사태를 악화시키지는 않겠지요.”
실제로 지금까지 있던 혼란은 진소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래로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황실과의 갈등과 유협의 입지, 거기에 원소까지 생각하면 허도의 현 정세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었다. 그것을 조조 공백과 맞물린 이 상황에서 여기까지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외부의 혼란까지 통제하며 내부를 장악하기 시작한 진소연의 능력은 유협도 인정하는 바였다. 과연 조조가 무리해서 상서령에 앉힌 값은 하는 인재였노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없지도 않았으니.
“짐도 그녀가 제법 뛰어난 인재임은 안다. 하지만 아예 그녀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거북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도 알지 않느냐.”
“그녀는 황족과도 갈등을 빚고 있으니까요.”
상시도 그 말에 첨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목하는 정적을 제거하는 건 정치인으로서 당연한 일일 수 있겠으나, 그 대상이 황족인 이상에야 그만큼 황실에 대한 경의가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 실력이라면 의심의 여지도 없지만, 그게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원소와 황실을 손잡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진소연의 손을 들어야겠지만….
“언제까지 조조를 믿을 수 있겠느냐.”
“하옵시면.”
“실수했느니. 상시가 보기에 짐이 조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언젠가의 미래. 짐이 소녀에서 벗어나 어엿한 성인이 된다면 황제로서 군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게 순리이옵니다.”
유협은 그 대답에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상상해도 조조를 밑에 부리는 자신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만큼 조조라는 여인이 강렬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그녀가 자진하여 권력을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걸로도 상관없었다.
소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황제로서의 절대적 권력을 바랄 정도로 몰염치하지 않았다. 지금 이 허도를 비롯하여 황궁 전체를 꾸민 것은 조조였고, 그녀의 힘이 있었기에 한의 이름을 여기까지 수복할 수 있었으며 역적 원술의 목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니 절대권력이라면 쥐여줄 수 있었다.
한 황실만 유지할 수 있다면 권력이 대수일까. 하지만 으레 그렇듯 절대권력자는 언젠가 황제의 자리까지 넘보기 마련. 그렇기에 유협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순리라. 그러하겠지.”
그러나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쟁취하는 것 또한 순리였다. 유협이라는 자그마한 소녀에게 쥐어진 것은 황제라는 감투뿐.
“우선 진소연에게 필요한 것을 물어 보아라. 이곳은 깊은 역사를 지니지는 못하였으나 황제가 기거하는 한의 수도가 되었고, 그 수도를 어지럽히는 자를 용납할 수는 없다.”
“예, 폐하.”
이 정도의 지원으로 충분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애당초 어린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밖에 없었다. 입안에 모래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바싹 말라가는 감각을 느꼈지만, 그것이 진실인 이상에야 눈을 돌려서는 안 됐다.
하여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짐을 알현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돌려보내라. 단, 상서령을 포함한 상서부의 인원만은 예외로 두지. 짐을 흔들려 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니 그 부분은 상시가 감독하도록.”
이 소란에 넘어가 원소에게 가담하려는 어리석은 이들도 분명 있을 터.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들은 조조에게 거부감을 느낄 이들인데, 그런 작자들이라도 포섭하면 조조의 독재에 저항할 수단으로서 활용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그 시도 자체를 원천에 차단한다.
“그런 얼간이들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지. 짐을 찾아오는 순간부터 그들의 목숨을 장담해줄 수 없느니. 무슨 뜻인지 상시라면 잘 이해하리라 믿고 있다.”
소녀는 이 일로 허도가 어지럽혀지는 것보다, 이번 소란을 빌미로 또 몇이나 되는 조조 반대파가 처형될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소연이라면 정말 해낼 것 같았으니까.
* * *
모든 일을 마친 조운이 허도로 복귀했다.
그녀가 군을 이끌고 부순 산채만 여섯 곳이 넘었고, 그 과정에서 총 오천에 가까운 적 병력을 베어 넘겼다. 이로써 외부에서의 준동은 사전에 차단한 것과 마찬가지.
“수고했어.”
“아뇨, 이 정도라면야.”
소연의 말에 조운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 군사적인 행동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문제는 현 허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군을 몰고 입성하는 와중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진소연의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모인 백성들이 이쪽을 염탐하듯 살피는 느낌. 그 불안한 시선을 지켜보자면 현 허도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허도 분위기가 영 아니네요.”
“정말, 하필 이때 이런 일이 터지네.”
조조 복귀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곳곳에서 움직이는 밀정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열한 명의 원소 측 인사를 포획했지만, 그나마도 빙산의 일각.
듣기로는 벌써 수십이 넘는 밀정이 허도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 꼬리를 잡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각자가 조를 이루어 각각 다른 곳에 거점을 두고 그 총괄로 원소의 심복 중 하나인 심배가 직접 잠입했다고.
“우선 오늘은 푹 쉬렴.”
“괜찮으시겠어요?”
조운의 질문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막 복귀한 군인을 부려 먹기에는 내 양심이 그렇게 모나지 않았거든.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바로 군사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아니면 넌 나를 믿지 못하니?”
“그럴 리가요!”
그동안 소연이 자신들을 이끌며 해온 일을 알고 있었다. 전호가 중랑장이 되고 소연이 상서령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가 있었던가.
조직을 직접 이끌며 하나로 모은 것이 전호라면 진소연은 그 길잡이가 되어 병주의 작은 도적단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었다. 가끔 그녀가 정말 미래를 읽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그녀를 의심할 리도 없었다.
“저는 아가씨를 믿어요.”
“고마워. 나도 널 믿고 있어.”
소연은 작게 답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허도에서 파악한 움직임은 총 셋. 그중 하나는 동승을 향한 작업이었고, 나머지 두 지점은 서쪽 주거단지와 동쪽 상업지구에 자리 잡아 유언비어를 전담하는 이들이었다.
앞으로 남은 이들은 몇이나 될까.
“고민하시는 게 있나 봐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지켜본 조운이 살짝 다가왔다.
“먼저 선수를 칠까, 아니면 후수로 지킬까.”
소연은 작게 대답하고는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서를 살폈다. 경비병에게 시켜 인구 유동을 살피게 한 것인데, 몇몇 구역에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동일인물이 자주 왕래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런 구역이 총 두 곳.
습격해볼까. 하지만 만약 그게 정답이 아니라면 꼬리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꼬락서니로 전락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포획에 실패하면 쥐새끼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법.
그러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선수를 두면 어떻게 되는데요?”
“우선 모든 호족과 관료를 집합시켜.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등청하라는 언질을 주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황명 거역으로 잡아넣을 거야.”
“괜찮을까요?”
“불만이야 쌓이겠지. 그러니 고민하는 거고.”
이미 동승에게 자주 접근하는 이들을 포착하긴 했다. 역사에서도 동승은 언젠가 황제를 꼬드겨 조조 암살을 획책하는 인물. 언젠가는 쳐낼 생각이었으나 시기상조라 여겨 목을 붙여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는 아마 포섭당했을 터.
하지만 그들이 동승 하나에만 손을 뻗었을까?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동승을 건드리기도 모호한 감이 있었다. 당연히 현 황실 정치 구도에서 동승이 실각했다는 것을 심배가 모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니 효과적으로 아군을 공략하려면 고작 동승 하나로 만족해선 안 됐다.
소연은 본인이라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생각했다.
군사력은 대장군인 조조와 그녀의 부하들이 꽉 쥐고 있었다. 그러니 움직인다면 분명 문관과 예주 출신의 호족, 그도 아니라면 황족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는 상황.
원소가 공손찬에게 승기를 잡았으니, 그가 이대로 하북을 점거한다면 제아무리 조조라 하여도 하북 전체와 맞상대할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한 지금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헤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순리적으로는 그게 옳겠지만, 후수로 밀리니까.”
판도를 지배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큰 차이를 보였다. 조조가 복귀하더라도 바로 안정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되려 대군이 입성하며 발생할 혼란함을 틈타 뒤에서 움직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조조가 도착하기 전에 실마리라도 잡고 싶었다. 더 나아가 심배까지 이 자리에서 포로로 잡을 수 있다면 최적일 텐데.
“쉽지 않네.”
“언제든 제가 필요하면 말해주세요.”
조운의 말에 소연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언제든? 당장 내일부터 너도 개처럼 뛰어줘야 하는데?”
오랜만에 짓는 짓궂은 표정. 근래 들어서 복잡한 사안이 많아 심적 부담이 컸던 소연은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웃으며 조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아하하….”
“나만 고생하면 억울하잖니. 우리는 동료잖아?”
“그, 그렇죠.”
어색하게 웃는 조운을 바라보며 살살 골린다. 예전에는 이런 문답도 자주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단둘이서 만날 일조차 드물게 되었다. 어쩌면 최근 상태가 나빠졌던 게 이런 심적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닐까.
이번 일만 끝내면 조금 여유를 가질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네? 저는 개처럼 굴러야 하는데요?”
“너의 전 상사도 이렇게 구르고 있잖니. 조금만 참아. 이 일이 끝나면 앞으로 외정을 나갈 일도 없고, 그러면 모처럼 호세와 너, 나, 그리고 방삼까지 모아서 같이 휴가라도 떠나자.”
소연은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짓는 편한 미소였다. 곽가 또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였지만,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기본적으로 업무 내에서의 대화. 그러니 조운과 잠시 단둘이 만나 떠드는 대화에서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 수 있었다.
“그건 나쁘지 않네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이건 조운에게 한 말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일까. 그건 소연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라면 지금은 움직여야 한다는 것. 안타깝지만 아직 쉴 때는 아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해줘.”
소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각 황족 인근에 사람을 붙여두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은 황족들이었고, 만약 그들이 심배에게 동조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무튼, 오늘은 쉬어. 이건 상사 명령이야.”
“저는 괜찮은데…….”
“명령이래도?”
소연은 픽 웃으며 조운의 등을 밀었다.
어차피 당장 조운의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미리 곽가에게 시켜 사람들을 준비했고, 어떤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건 준비는 전부 마쳐두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실마리. 이미 허도 전체에 사람을 뿌려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심배가 꼬리를 드러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자자, 나는 괜찮으니까 가서 좀 쉬어. 피부도 푸석푸석해졌잖아. 이래서는 호세가 너보고 피부 안 좋다고 한소리 한다?”
“아뇨, 아씨. 그게, 잠깐, 밀지 마셔요!”
그녀는 마지막까지 장난스레 그녀를 밀어내어 쫓아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들쥐를 낚기 위한 미끼를 몇 군데에 뿌렸으니, 과연 심배는 그 미끼를 물 것인가 말 것인가.
홀로 남은 소연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좀 쉬고 싶다.”
그건 제법 오랜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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