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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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춘으로는 다른 관료를 파견한다는데 이름까진 잘 모르겠다. 듣긴 했는데 기억에 남는 이름도 아니라서. 애당초 원소가 공손찬의 중요 거점을 함락시켰다는 부분에서 아군은 양주에 투자할 여력이 없기도 했다.
하여 다들 회군에 분주한 순간.
“몸은 좀 어떠냐?”
“쯧.”
나는 손책의 막사에 방문하여 빙긋 웃었다.
어차피 오늘 풀어줄 생각이었다. 당일에는 회군하는 군을 통솔해야 하니 나도 여유가 없을 테고, 무엇보다 그때 풀어주자면 너무 북적거리지 않나.
조조는 손책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게 일임했다.
그러니 지금 풀어줘도 별 문제 안 되겠지.
“혀 차도 되냐? 오늘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자꾸 그러면 허도까지 확 납치해가는 수가 있으니 생각 잘해야 할걸?”
“……성격 진짜 나쁘네.”
아니 뭘. 고작 이 정도도 못 놀리나.
하긴 생각해보면 손책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좀 장난스럽게 다가간 부분도 있었다. 첫 만남에서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으니 그 느낌을 지우려던 게 다소 과했을까.
“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슬쩍 다가가 손책 침상 근처에 앉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이제는 생기도 도는 게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 그래도 누군가의 시중이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따로 보내도 바로 객사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슬슬 본론에 들어갈까.
“생각은 했나?”
“뭘.”
“양주자사의 건.”
내 개인적으로 그게 그녀에게 목줄이 될지라도 그녀가 양주자사를 맡아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손견을 죽였다는 죄책감? 살짝 고민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아군이야 그녀가 받아들여도 그만, 안 받아들여도 그만인 일.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양주 방면에서의 걱정을 덜어주면 저쪽도 좋고 이쪽도 좋은 일 아닌가.
“……거절할 수 없는 양자택일은 선택이라고 하지 않아. 이미 너희끼리는 전부 말해둔 거 아니야? 그러면서 나보고 선택하라고?”
“정치라는 게 원래 그런 거더라.”
어깨를 으쓱이고는 싸온 과일을 꺼냈다.
“상대를 죽이는 건 칼만이 아니더라고. 사람을 죽이는데 정치와 칼이 다르지 않으니, 그러면 정치와 칼이 다를 게 무엇이며, 사실 혀와 칼날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네.”
“입에 발린 소리만.”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손가의 처지로 양주자사라는 큰 떡고물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찌 됐건 받아들이는 게 맞다 싶은데 그녀는 어떠할까.
물론 이 자리에 주유라는 남자가 있었다면 좀 달랐겠지.
하지만 그는 없었고, 이 자리에 있는 건 손책뿐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뒤로 물리는 것은 불가능한 양자택일의 굴레에서 단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나한테 바라는 건 뭔데.”
“양주 지방의 잡음 제거일까.”
“날 뭘 믿고? 난 지금이라도 당신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고 싶은 여자야.”
“사람 가슴은 칼꽂이가 아니거든?”
본래 사람의 몸은 용도에 맞게 써야 옳았다. 가슴을 칼꽂이로 쓰다니, 그 무슨 흉흉한 농담인가.
가벼운 농담조로 말했지만, 손책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손책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널 믿는 것과는 관계없어.”
조조가 말하길 우리가 믿는 건 상황이라 하였다.
절대적 지배자를 잃은 양주는 재차 권력 다툼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손책은 양주자사라 하였으나 마땅한 땅도 없었고, 원술 휘하로 양주에 진입하여 외지인이나 다름없던 원술의 검이 되어 원한도 많이 산 상황.
그러니 당분간은 양주 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가 믿는 건 그런 상황이었다.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상황, 그리고 움직일 수밖에 없을 미래를 그리며 그것을 믿는다.
“넌 어차피 당분간 양주에서 고생 좀 해야 할 테니까. 우리도 어차피 양주에 손을 댈 수 없고, 너도 양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지. 그러면 널 믿지 않더라도 양주 문제는 네가 처리해주는 게 아닌지?”
“……진짜 성격 나빠.”
미안하지만 이 안건은 조조가 떠올린 거다.
대단하오, 조조 양반. 제대로 안면 트지 않은 상대에게 벌써 성격 나쁘다고 인증을 받아버렸잖아.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도 그녀가 성격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부분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네.
“나도 사실 이런 일 하고 싶지 않거든.”
누가 이런 일 하고 싶어서 하겠나. 난 정치적인 부분에 얽히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단지 상황도 상황이고, 무엇보다 손책의 안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배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아군 진영 내에서도 손책에 대해서는 죽이자와 살리자가 반반으로 갈리는 상황. 당장 조조와 진궁 선생만 해도 조조는 살려서 써먹자는 쪽이었고 진궁 선생은 죽여서 후환을 없애자는 쪽이었다.
물론 진궁 선생이야 손견의 일로 나와는 원수지간이라는 걸 알았으니 내게 가해질 불확실한 위험을 치우고 싶다고 했지만, 다른 이들도 제법 의견이 갈리긴 했다.
“그래서? 받을 거냐, 놓을 거냐.”
“……이런 거, 안 받을 수가 없잖아.”
그녀는 이미 물주인 원술의 사후 정박할 곳 잃은 배와도 마찬가지. 이 양주 땅에서 그녀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이라고는 과거부터 손가의 거점이었던 형주와 양주 경계 인근일 터인데, 고작 그 땅으로 1만에서 2만이 넘는 병력을 어찌 유지할까.
하여 그녀에게도 명분이 필요하긴 했다.
아군은 손책이라는 계집에게 목줄을 채워 그녀가 결국 패해 스러진다고 해도 좋았고, 반대로 양주의 지배자가 된다면 양주자사라는 명분을 억제기로 삼아 그녀에게 간섭할 수 있게 된다.
불공정한 거래였지만, 뭐 어쩌겠나.
“그러면 그렇게 알지.”
그런 게 정치라고 배웠는걸.
“그러면 이제 풀어주지. 태사자만으로 불안하다면 따로 사람을 붙여주겠는데, 그 부분은 어떻지? 아직 걸을 정도로 회복된 건 아닐 테니 마차도 수배해줄게.”
“……다음에는 이렇게 만나지 않을 거야.”
마지막까지 섬뜩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야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전쟁 자체가 원한과 원한이 꼬리를 무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원한을 사더라도 별수 없다는 느낌이니까.
“그러려면 우선 군주답게 되어야겠지?”
손책이 내게 간단히 붙잡힌 것은 그녀가 복수에 눈이 멀어 흥분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군주가 되어 직접 별동대의 대장이 된 탓이 컸다.
그러지 않아도 손가에는 강한 무장이 더러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그들을 믿지 못했는지 직접 나서서 사지로 들어왔다. 아니면 그저 저 자신의 무에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라도 군주로서는 옳지 못했다.
“내게 왜 패했는지 생각해라. 군주라면 몸이 달아올라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제 사람을 믿고 부릴 수 있어야 오래 연명하지 않겠냐.”
“당신에게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닌데.”
“그래도 들어라. 지금까지의 네가 어떤 군주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그저 선봉장, 혹은 돌격대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건 손견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과도 매우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손견을 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군주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용맹하고 무쌍하여 전선에서 아군을 이끄는 것은 장수의 업이지 군주의 업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책이 양주자사의 직을 승낙한다고 들었으니 볼일은 끝났다. 이제 나도 회군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언제까지 사마의나 방삼이에게 맡겨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고, 슬슬 방삼이가 성질 부릴 정도로 진득하게 부려 먹었으니까.
“……왜.”
“응?”
조그마한 목소리라 순간 놓칠 뻔했지만, 그래도 그 실낱같은 목소리를 겨우 들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손책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난 당신을 죽일 사람이야. 동정하는 거야? 아니면 죄책감? 어떤 쪽이라도 난 달갑지 않아. 그런 걸 받을 바에는 지금이라도 당신을 죽이고….”
“뭔 헛소리야.”
사죄 따위를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생길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동정이라는 싸구려 감정을 품은 적도 없었다.
“기왕 양주자사가 되었으면 네가 오래 살아서 그 지방을 꽉 잡고 있어야 우리도 편하니까 하는 소리지. 너 혹시 자의식과잉이니? 혹시 세상이 전부 널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우.”
말하는 도중 날아온 베개를 낚아챘다.
“나가!!”
“하여간.”
얼굴까지 새빨개져서 격한 반응을 보이기에 베개만을 얌전히 던져주고는 막사에서 나왔다. 느낌은 다르지만, 우리 운이 골려 먹는 맛이랑 비슷하다 보니 조금 과했나.
아, 생각하니까 운이 보고 싶다.
소연 아씨랑 같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 * *
“교위님. 이쪽은 전부 정리되었습니다.”
“수고했고. 이제 들어가서 쉬어.”
“예!!”
부관에게 말을 건네고 조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수차례의 연전이었고, 그녀의 체력이 아무리 인간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매일 같은 전투에는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원소의 역경루 함락 이후로 예주가 술렁이고 있었다.
특히 원소를 비롯하여 사세삼공 원가의 본가 또한 예주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원가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 고리 가문들이 상당히 많아 언제건 원가에게 돌아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소연은 조운을 보내어 허도 인근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움직임을 전부 통제하려 들었고, 그 과정에서 확실히 도적으로 둔갑한 정규병처럼 보이는 이들과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하아, 천하가 어떻게 되려고.”
그녀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보이는 무수한 시체 더미. 이번 전투에서만 오백 남짓의 적병을 전부 일소했다. 지금까지 죽였던 이들은 이천을 넘기는 상황.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조조가 양주로 떠나 공백이 된 지금 원소를 지지하던 이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허도 내 분위기도 조금씩 어수선해지고 있었고, 소연은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그 내부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조운에게는 바깥에서 목격된 모든 무장세력에 대한 토벌을. 하여 그녀는 진짜 산적을 처리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훈련받은 군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처리할 때도 있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전호를 부르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자신들은 많이도 왔다. 조조의 핵심인사가 되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상서령 진소연과 황제 폐하의 호위 이후 중랑장의 자리를 차지한 전호. 병주에서 시작한 조그맣던 도적 패거리라고 하기에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렇지만 조운은 병주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
전호. 그 당시는 호세라 자칭하던 제 오라비와 느긋하게 하루를 보낸다. 가끔 소연 아씨가 찾아와 잔소리하고, 방삼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비웃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소연은 그때와 비교해 확실히 변했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할 수 없었지만, 조운이 보기에 그녀는 확실히 어딘가 틀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올바른 방향인지 아닌지도 모를 두루뭉술한 느낌이었지만, 그건 그녀의 안에서 거의 확신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전호와는 자주 만나기도 힘들었다.
이럴 때면 전호의 부관처럼 행동하는 방삼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 전까지 사람이 죽고 죽어 피비린내만 진동하는 전장에서 등을 돌렸다.
잠시 쉬었으니 이걸로 됐다.
“아직 세 곳.”
처리해야 할 목숨이 아직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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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를 또 하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러스트가 여러분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개미인간님과 작업하고 있으니 부디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