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299화 (299/343)

2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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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지만, 이미 전황은 뒤집힌 지 오래. 성 하나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너져내리는 성채를 바라본다.

저것을 위해 몇 년을 허비했던가. 거의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것에 들어간 돈이며 인적 물자이며, 그 지나간 세월과 노력을 상기하며 이를 갈았다. 눈에서는 무언가가 흘러내렸는데 그는 그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겨를도 없었다.

“장군!! 퇴각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발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는다.

저것이 어떤 것인데. 그의 모든 노력이 담긴 것이자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천하를 관망하고자 과거부터 전해지던 난세를 피할 수 있는 지점이라던 곳에 필사적으로 쌓아 올린 거성.

10중의 참호와 수십의 망루.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 외부의 반란으로 인해 어이없이 빼앗겼고, 필사적인 저항 끝에 그 성은 철저하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불타는 역경루를 바라보자니 아무리 해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할까.

저 멀리서는 여전히 비명이 들렸다.

원소의 군은 역경 내부로 진입한 이후 철저하게 파괴행위를 자행했고, 그 과정에서 본래 아군과 밀접한 계약으로 묶여있던 흑산적의 군이 준동하여 아군은 교란했다.

원래 이렇게 쉽게 함락당할 요새가 아니었다.

흑산적의 두목 장연의 요청과 적 내부적인 빈틈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출정한 사이에 집중적으로 공략당한 역경루. 모든 걸 깨닫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었고, 그 과정에서 내부로 진입해 필사적으로 수성하고자 했으나 결국 패했다.

“도적놈들은 역시 믿는 게 아니었던가.”

“장군! 시간이 없습니다!!”

휘하 부관의 말에도 공손찬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게, 그리하여 웅장하게. 천하의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쌓았던 보루가 불길에 휩싸였다. 화마에 타들어 가는 소리와 그 매캐한 탄내. 이윽고 성이 무너져내리며 지면으로 충돌하며 들리는 소리까지.

“나 공손찬이 여기서 패하느냐.”

“장군, 고작 요새 하나입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파괴하였으니 원소가 이 거점을 쓸 수 있을 리도 없고, 장군께는 아직 십만의 강병이 남아있습니다.”

“그래. 이 공손찬은 아직 죽지 않았음이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 유주자사 유우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던 이민족들은 공손찬의 유우 처형 이후 원소의 손을 들었고, 유일하게 흑산적이 그의 편이었던 것. 그러나 이번 배신은 공손찬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으니 그들 또한 적이 되었다.

이 드넓은 하북에 공손찬의 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어찌함이냐.”

처음 원소가 하북에 당도했을 적 그는 바람만 불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기주목 한복에 의해 겨우 연명하던 삶. 하여 공손찬은 원소가 자신을 속여 기주를 점거했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공손찬의 인생 숙원이던 역경루가 함락당했다. 저 북방 이민족과 흑산적 등 자신이 깔보고 업신여기던 이들은 저마다 원소의 손을 들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니 이 하북에 공손찬의 편이 없었다.

고립무원.

그는 이 하북에 자리를 잡은 이래 언제나 이겨왔다.

몇 번인가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것은 공손찬 본인. 그렇기에 언제나 승리하였고, 하여 백마장군이라 불리며 북방과 하북에서는 공포의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

반면 원소는 무엇인가.

중앙의 관료를 지낸 이력과 원가의 이름뿐인 애송이. 그마저도 얼자였으니 사실상 가진 것이라고는 그 이름값뿐이던 이였다.

북방의 패자였던 공손찬과 비교조차 민망할 정도였던 이가 점점 고개를 들더니, 이제는 공손찬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 역경루의 참패.

이걸로 힘의 우선순위가 앞질러진 것과도 같으니.

“그래. 나는 아직 패하지 않았다. 죽지 않았기에 나는 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다. 아직 군사력으로는 놈을 앞지르니, 기회라면 언젠가 오겠지.”

“어서 가셔야 합니다!!”

관정이 재차 소리치니 그제야 공손찬이 고개를 들었다.

불타오르는 역경루.

그는 끊임없이 아직 패하지 않았노라고 다짐했지만, 반대로 이 광경은 앞으로 있을 미래는 그리는 것만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 * *

원소는 무너져가는 역경루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이걸로 공손찬의 최고의 요새이자 유주의 중심에서 관장하던 사령탑은 사라졌다. 이것만을 위해 흑산적과도 손을 잡았고, 그 사이에 내부적인 잡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여전히 머리가 아팠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저 불타오르는 역경루를 보아라.

“이걸로 됐다.”

곽도 또한 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흑산적 놈들이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해주었습니다. 이제 공손찬은 거성 하나를 잃어 마땅한 방어선이 없어졌으니, 이대로 몰아치시면 승기를 굳힐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하지만 전풍은 그 말을 대뜸 부정하고 나섰다.

“아직 공손찬의 정예는 멀쩡히 살아있고, 그 물량은 가히 십만을 웃돌고 있소. 이민족과 흑산적의 머릿수가 많다지만 공손찬은 고작 2만의 정병으로 30만에 달하던 황건적을 소탕하였는데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이보세요.”

곽도는 사사건건 말참견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승도 이런 대승이 없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원소 또한 처음 역경루를 보았을 때는 아연실색하여 저걸 어떻게 함락시켜야 하는지 내내 고심했을 정도. 그런 천하제일이라 칭해 부족함 없을 요새를 떨구었는데 이 부정적인 의견은 무엇인가.

“공손찬이 제 여력을 전부 깎아 먹으며 건설하던 요새를 떨궜어요. 이걸로 그를 지켜줄 방패가 없는데 지레 겁먹어 아군 사기를 떨구려 하시는 저의는 무엇인지요?”

“방패가 없다 하여 창이 녹스는 것은 아니오.”

오히려 이럴 때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전풍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구석에 몰렸어도 범은 범이었다. 경계심을 낮추고 잘못 접근하여 크게 물린다면 이 승리가 빛이 바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그러나 곽도가 보기에 이것은 겁쟁이의 논리에 불과했다.

“둘도 없는 대승입니다. 기세를 탔으니 이 기세가 흐려지기 전에 결판을 내는 게 당연한 논리 아닌가요? 전풍 선생께선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요?”

“전부요.”

곽도의 질문에 그는 눈을 감으며 작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이 두렵소.”

“하, 원공. 더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이런 겁쟁이의 의견에 휘둘리실 것 없습니다. 공손찬이 이 요새에서 퇴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빠르게 진격한다면 이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아군은 역경 이북의 상황을 모르오. 공손찬이 어떻게 군을 포진했는지, 그가 가진 전력은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니 그게 두려운 것이 무에 이상하오?”

그는 곽도의 모욕에도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기세라는 것은 좋으나 적의 상황도 모르고 나아간다면 그것은 단지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오만이라고 해도 좋을 것. 힘은 적재적소에 맞게 사용하며, 강자이면 강자일수록 선택에 두려움을 품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

한 번의 패배에서 잃을 게 더 많았으니까.

하여 전풍은 곽도와 말씨름하는 대신 원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그 둘의 설전을 감상하기만 할 뿐. 군주라면 응당 신하들이 과열되었을 때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아줘야 했지만, 그는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둘 모두의 의견도 썩 나쁘지 않군.”

“원공.”

전풍의 말에 원소는 어깨를 으쓱였다.

“더 해보아라. 그대들 의견 모두 들을 이치가 있으니, 그대들의 첨예한 의견 대립이 이 원소를 위한 것임을 어찌 모를까.”

분명 내부에서 어떤 잡음이 있더라도 감히 자신에게 도전할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의 발로겠지. 전풍 또한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끌렸지만, 반대로 이런 부분에서는 좋은 군주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곳까지 왔다.

가문의 모든 것을 원소의 성공에 걸었다. 각 기주의 호족과 명사들을 설득한 것도 본인. 그러니 이제 원소에게서 떠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이 승리를 갈무리하며 공손찬의 움직임을 살피며 움직이시길 권합니다. 공손찬의 병력은 여전히 강대하니 저희가 구태여 전면전으로 싸워줄 이유가 없습니다.”

“원공! 저는 달라요!”

전풍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도가 손을 들었다.

“남쪽에서는 조조가 원술을 잡기 위해 떠났어요. 그게 실패한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성공이라도 한다면 저 중원에 누가 조조를 막을 수 있을까요. 더 시간이 늦기 전에 공손찬을 정리하고 조조를 쳐야 해요.”

조조의 이름을 듣자마자 원소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현 원소에게 역린과도 같은 것. 곽도 또한 이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전풍의 말에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보다 더 싫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조조 그 화냥년을 치기 위해서는…!!”

“곽도.”

원소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고 씩 웃었다.

“화냥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밝은 웃음이었다.

찬란한 금발을 길게 기른 원소의 부드러운 미소. 뭇 여성이라면 그것에 가슴 두근거릴 법도 하지만, 그간 오랫동안 원소를 보필했던 곽도에게는 그 미소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 럴, 의도가 아니옵고.”

“되었다.”

역린을 건드린다면 응당 그 진노도 감내해야 할 일.

곽도는 무릎까지 꿇으며 필사적으로 조아렸고, 원소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욱하기는 했지만, 곽도의 말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원술 따위가 조조의 상대가 될 리 없다.

원소는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조가 중원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다면 여전히 공손찬과 상대해야 할 자신을 앞지르게 될 우려가 있음도 명백했다.

“전풍. 어찌 생각하나.”

“……하북과 중원 사이로는 황하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저희도 쉬이 중원을 공략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조조 또한 하북을 쉬이 넘볼 수 없겠지요.”

멍청한 년.

전풍은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 곽도를 슬쩍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조조의 이름은 왜 꺼내서. 이래서야 그녀의 의견이 채택된 것과 다름 없었지만, 전풍은 그래도 제 의견을 피력하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조조는 여전히 주변으로 적이 많으니, 우선 저희는 안정적으로 공손찬을 공략하는 게 우선이라 사료됩니다.”

“흠. 그대의 의견도 나쁘지는 않음이나.”

원소의 말에 전풍은 눈을 감았다.

“확실히 이 원소가 패잔병을 이끌 공손찬에게 주저라는 감정을 품는 것도 어울리지 않지. 여기서 공손찬의 목만 친다면 하북에서의 긴 전쟁은 끝난다.”

곽도가 조조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

“지금은 한 번 도전해도 나쁠 것 없겠지.”

“명하신다면.”

전풍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애써 억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역경의 승리로 도취한 아군이 너무 깊은 곳까지 진격하는 일만 없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정세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하북을 통일할 수만 있다면 남쪽의 조조에게 밀릴 리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있을 일을 생각하며 전풍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고개를 숙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원소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시작은 공손찬.

그다음은.

“기대되는구나.”

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다. 조조가 원술에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그는 흑산적과 손을 잡고 연합하여 공손찬의 가장 큰 규모의 거성인 역경루를 함락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손찬의 수급을 거두는 일뿐.

이미 승기를 잡았으니 이 뒤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북의 패자까지 앞으로 한 걸음.

그 뒤로 향할 길은 오로지 남쪽.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황제를 끼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전 소꿉친구이자 현재의 숙적뿐이었으니.

“정말로, 진정 기대되어 참을 수 없구나.”

필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전이겠지.

많은 이들의 시체를 딛고 우리는 서겠지.

그러나 그 또한 운명이었다.

“네가 내 운명이었듯, 이 또한 우리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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