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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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들려오는 뿔나팔의 소리. 몇 번씩 끊으며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나와 함께 중앙 지휘관을 담당하던 유비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측면에서 아군과 교전하고 있던 적 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점차 발을 빼려는 듯한 모습.
“중앙에서 성공한 모양인데.”
그러지 않고서야 아군을 떨쳐내지 못한 상황에서 뒤로 물러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하후돈과 조인, 조조의 중군이 성공리에 중앙을 격파한 것이 분명할 터.
“진군하지.”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아군은 최대한 원술군의 잔재를 꺾어야 했다. 전부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살해해야 뒷일이 편하다.
“서주목도 동의하나?”
“적 병력의 뒤를 치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죠.”
서주군이 이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다행이었다. 사사건건 의견이 맞붙는다면 제대로 군을 운용하기도 힘들었을 것인데.
“……지금에야 말하는데, 고마워.”
“예?”
그녀는 살짝 얼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의외였을까. 그런데 난 진심이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담아 그녀에게 바칠 수 있었다.
서주 입장에서 조조군은 원수와도 마찬가지. 유비 또한 서주 정벌전을 놓고 조조와 겨룬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전쟁에 차출되었다 하더라도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내게 협조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사령관께서는 뭐든 갑작스럽네요.”
그녀는 픽 웃으면서도 손에 쥔 쌍검을 놓지 않았다.
한때는 저 웃음을 의심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그녀의 진위를 파악한 게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유비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감사해. 당신의 헌신, 노력. 타지에서 아군을 위해 힘써준 모든 것에 감사해. 아마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도 헤어질 것이니 미리 말해두는 거야.”
“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능글맞게 웃기는.
어차피 대답을 요구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내 개인적인 감상과 존중을 그녀에게 표하고 싶었을 뿐. 제대로 전해진 것 같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이제 전군에 명하지.”
이럴 때 오른팔이 다친 게 아쉬웠다.
보통 선언하기 전에는 항상 허리춤에 찬 청강을 뽑아들고서 외쳤는데, 정작 팔은 아직 낫지 않아 부목을 대고 있었으니 그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시점에서 그런 아쉬움을 토로할 이유는 없겠지. 중앙의 전장까지 살필 수 없었지만, 마주한 적의 움직임만 보아도 얼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일목요연했다.
“전진이다. 전장에서 등을 보인 얼간이들이 어떻게 죽어 나가는지 알려줘라. 포로도 필요하지 않다. 마주한 적 전부를 사살하도록.”
현 아군은 포로를 잡을 여유 따위도 없었다.
그만한 물자도 없을뿐더러 포로를 잡고 협상할 상대도 없었다. 아군은 원술을 이번 전쟁에서 참살하고자 하였으니 포로 또한 남길 이유가 없는 것.
입맛이 썼다.
이번 전쟁으로 또 몇이나 되는 인명이 죽었을까.
“대열도 신경 쓰지 마라. 오로지 사살이다.”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전장에 선 이상 모두가 인간 백정에 불과했다. 멀쩡한 왼손에 쥔 지휘봉을 휘두르며 고개를 돌렸다. 유비 또한 서주군을 향해 명령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밀어내면 한 차례 전쟁은 끝난다.
이제 남은 건 잔당과 수춘인데.
이건 여포와 장료, 관우가 잘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을까. 만약 거기서 원술이라도 딱 잡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거까지 바라는 건 지나치게 양심이 결여된 거겠지.
“적을 소탕하라!!”
우선 이 자리에서의 일을 정리할까.
퇴각하는 군을 최대한 밀어내도록 군을 지휘한다. 이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했다고 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큰 피해를 줘놔야 나중에 편하겠지.
* * *
원술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수춘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패한 전장이었고, 그 뒷수습은 장훈과 기령 등에게 맡긴다고 해도, 당장 원술이 적 기병 진로 정면에 노출되었기에 내린 결정.
“이럴 순 없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그 천한 환관 딸년에게 내가. 이 원가의 적통자인 내가 패한다고. 이게 말이 되느냐. 아니다. 이건 분명 그 계집년이 무언가 사특한 수를 썼음이 분명하다.”
“그렇습니다. 그 역적이 무슨 악독한 손을 쓴 것입니다.”
양홍은 그 말에 호응하면서도 눈을 감았다.
이미 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수춘으로 돌아가 잔병을 취합하고 문을 걸어 잠근다면 버틸 수는 있겠지만,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원술 또한 양주의 절대자로 군림할 수 없게 된 셈.
이러면 그 누가 원술을 황제라 인정할까.
중나라의 명분과 힘을 쌓으려면 그간 소모했던 시간에 배는 필요로 할 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주 인근에 원술과 비견될 군사세력이 없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일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어찌 됐건 군주인 원술은 살아야 한다.
양홍은 혼란에 빠져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원술의 곁을 지키며 앞으로의 일을 고려했다. 조조군은 수춘성을 함락시킬 저력이 없으니 이 국면은 넘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폐, 폐하!!”
마차를 몰던 마부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이미 대답할 정신도 없는 원술을 대신하여 양홍이 답했는데, 마부는 그 대답에 벌벌 떨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저, 전방에 적입니다.”
“뭐라?”
믿을 수 없어 양홍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저 앞에 있는 것은 검은색 깃발을 단 기병 무리. 검은색의 군기는 조조의 상징이었고, 저 군의 대장을 뜻하는 한자는…….
여(呂)의 한자.
그는 잠시 그 한자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윽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붉은 말을 확인하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여포……!!”
원술의 친위병력은 고작 오백.
급하게 몸을 빼며 적을 막아 세우고자 병력을 데려오지 않았는데, 설마 퇴로에도 병력을 배치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저게 누구인가. 천하무쌍이며 대륙 제일. 그 누구도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그 인중여포.
“여, 여포라고?”
마차 안에 있던 원술도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여포에게 박살 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았던 천하무쌍의 모습을 어찌 잊겠는가.
반면 여포와 장료, 관우는 기병을 몰아치며 원술의 친위대 주변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내건 깃발이 황금색으로 수놓은 황제의 상징이니 아마 이것이 원술의 호위이리라.
하여 여포는 씩 웃으며 방천화극을 들었다.
“진짜 이게 웬 횡재냐??”
퇴각하는 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전호의 곁에서 싸울 수 없다는 것에 시무룩하면서도 명령이니 이 후방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수가 많다면 무조건 퇴각하라는 말도 들었지만, 설마 적 우두머리가 직접 걸어들어올 줄이야.
“저거 모가지 따서 들고 가면 주인이가 좋아하겠지?”
“좋아만 하겠수?”
아예 신바람 나서 춤도 추겠지.
장료는 장난스레 답했지만, 적 수장을 직접 사로잡은 전공은 보통 것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이 공적 전부를 여포가 거머쥘 수 있었지만, 그녀는 현재 관직도 없는 일개 객장만도 못한 처지.
그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제 누이가 기뻐한다면 그 또한 아무렴 어떨까. 장료는 씁쓸히 웃으면서도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며 여포의 뒤를 따랐고, 관우 또한 그런 움직임에 맞춰 말을 몰고 천천히 나아갔다.
“원술아! 너니? 너 거기 있는 거 맞지?”
이에 원술이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오백 여의 호위대. 하지만 이미 병력에서도 밀리는 데다가 적장이 그 천하무쌍 여포인 이상 이 정도 병력으로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여 장군이 아니오.”
“장군? 아닌데. 뭐 아무튼, 반갑다!! 진짜 반가워! 안 그래도 내가 너 진짜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딱 알고 바로 찾아와주냐?”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여포.
여기서 끝일런가.
원술은 애써 당당하게 서서는 여포를 마주했다. 이미 주변은 기병 무리에 포위당했기에 벗어나는 것은 무리. 이미 모든 게 끝났구나 싶었지만, 이 시점에서 원술은 한 가지 떠올린 바가 있었다.
여포가 누구인가.
정원을 배신했으면서도 동탁의 손을 턴 배신자.
병주 소속이었던 여포가 동탁에게 합류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금은보화와 적토마가 여포의 소유가 되었던 걸 알고 있었다.
“여 장군! 짐의, 아니,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응? 뭔데.”
심드렁하게 답하는 여포였지만, 원술은 그나마도 좋다고 얼굴에 화색을 돋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면 되겠소?”
“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포.
그렇지만 원술에게는 그것이 고심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쳤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게다가 잘만 구슬린다면 그 괴물과 같은 여포가 자신의 수하가 되는 것이었다. 저 여자에게 기병을 맡긴다면 천하에 적수가 어디 있겠는가.
원술은 이것이 천명이라 생각했다.
하늘이 내린 기회. 점괘에서도 자신은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단을 하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 분명할 터.
“애초에 당신과 같은 저명한 무장이 어찌 환관 계집을 따르고 계시오?? 근본도 없는 천것은 당신의 무를 썩힐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뭐래.”
“내게 오시오!! 막대한 금은보화, 원한다면 미색의 동자도 전부 드리겠소. 내 자식과 결혼하시는 것은 어떻겠소? 나는 이 중나라의 황제요!!”
그 말에 여포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일었다.
하지만 원술에게는 그 표정변화를 살필 여유도 없었고, 이런 조건이라면 여포가 제 곁에 오지 않을 리 없다면서 쾌재를 부르며 연신 말을 이었다.
“그대가 함께한다면 이 쇠퇴한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이루어질 제국 역사의 초석이 될 수 있소! 어찌 그리 망설이시는가? 내게는 썩어 넘칠 정도의 재화가 있고, 당신의 무를 살릴 수 있는 조건도 있소!!”
여기서 관우는 슬쩍 고개를 들어 여포를 바라봤다.
그녀가 알기로 여포라는 이의 평판이 썩 좋지 못했고, 자칫 여기서 여포가 넘어가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관우와 서주 기병은 궁지에 몰리는 셈.
그러니 여차하면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여포의 말이 더 빨랐으니.
“뭐래. 너 돈 많냐?”
“도, 돈이라면 썩어 넘치게 있지. 내게 온다면 조조 그 환관 딸년이 뭘 해주었건 그 배로 해드리겠소. 배가 무엇이요? 그 이상도 가능하지!!”
그 말에 여포는 픽 웃었다.
“그래, 배란 말이지.”
장료는 이 부근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이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장료가 아는 그녀는 평소 거친 태도를 고수했지만, 진짜 화났을 때는 오히려 입을 다물고 잔잔하게 분노를 불태우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러면 거기에 전호라는 남자도 있냐?”
“……그게 누구요?”
“배로 준다며. 그러면 거기에는 우리 주인이가 두 명 있다는 소리 아냐? 그거라면 좀 끌리겠는데. 장료, 넌 어떻게 생각하냐?”
장료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은 인간이 어찌 둘이 있고 셋이 있겠나.”
“그치?”
이 시점에서 여포는 되레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 깔린 분노를 어찌 모를까. 그 표정을 살피며 여차할 때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려던 관우 역시 손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여, 여 장군.”
“내가 그렇게 엉덩이 가벼운 년으로 보이냐?”
무언가 일을 그르쳤다.
그 생각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원술의 몸이 뒤로 쓰러졌으니, 손에 든 방천화극을 냅다 던져 원술의 배를 꿰뚫어버린 여포가 손을 탁탁 털며 침을 뱉었다.
“다 죽이고, 저거 모가지 따와.”
여포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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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한 사죄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