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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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당장에라도 사령부 병력을 버리고 후퇴하는 게 제일이라며 사마의가 내 퇴각을 종용했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당연히 그리 말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사마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냅다 꽁지를 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까.
갑자기 뒤를 잡혀 고립되었노라고 해도 사령부에는 아직 삼천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병이라 해도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는다면 해봄 직한 부분이 있는데 어찌 쉬이 꽁지 말고 도망칠까.
“준비한다.”
“예, 예. 제가 아저씨 고집을 어떻게 꺾을까요.”
사마의는 한숨을 쉬면서도 이전을 불렀다.
저 선두에 선 것이 분명 손책이겠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마 이 전장을 준비하기 전부터 산을 돌아 아군의 뒤를 잡고자 움직였을 것 같았다.
오직 나를 노리고.
그게 적장을 잡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지, 아니면 단지 아비의 복수를 위해 원수에게 과도히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쉬이 당해줄 생각도 없었다.
“아직은 괜찮아. 정 급박하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야.”
아군 기병이 회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 게다가 이렇게까지 준비했으니 분명 아군 기병대의 움직임을 물고 늘어지려 할 것이 분명했다.
허리춤에 찬 청강을 검집에서 뽑았다.
서슬 퍼렇게 빛을 발하는 보검. 조조에게 하사받고 지금까지 애용하였던 것을 최근 들어 피를 묻힐 일도 드물었었지. 하면 오늘이 바로 다시 피를 묻힐 날인가.
“후우…….”
적 기마병의 돌격은 확실히 기세가 좋았다.
기세가 좋은 만큼 갑자기 아군 진영이 양 갈래로 벌어졌을 때 쉬이 제동하기 어렵겠지. 물론 그대로 빠져나간다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들의 노림수가 내 목인 이상 어떻게든 제동을 걸고 전투에 임할 터.
점점 적 기병이 다가옴에 따라 주변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제 육안으로도 적 선봉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는데, 손책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기세를 끌어올려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내 목을 원하느냐.
“전군.”
하지만 쉽게 내줄 수 없는 물건이 아닌가.
“산개하라.”
* * *
갑작스럽게 군을 둘로 나누어 갈라지는 전호의 군을 바라보며 손책은 이를 꽉 깨물었다. 불과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갑자기 반으로 쪼개지는 보병.
기마는 추진력이 붙어 그 안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책을 선두로 하여 겨우 기병이 멈췄을 무렵.
“전군 포위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쯧.”
사령관 휘하가 정예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손책은 적이 대비하지 못한 경로를 통해 기습적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니 사전에 준비한 것도 아닐 텐데, 그들은 기병의 돌격에 주눅 들지 않으며 빠르게 산개하고는 기병 주변을 포위했다.
갑작스럽게 대열을 바꾸면 흐트러짐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서 조금만 실수했더라면 기병의 말발굽에 그대로 쓸려나갈 수도 있었다.
“확실히 정예는 정예네.”
“장군!”
“알고 있어!!”
손책은 그대로 한 손에는 검, 다른 손에는 창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한 병력을 하나씩 베어 넘기며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이 기습의 목표는 전호.
중랑장의 수급을 거둘 수 있다면 이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손견의 위령패에 올려 복수를 완수할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찾아 헤맸다.
“중랑장!! 비겁하게 숨지 말고 덤벼!”
손을 빠르게 교차하며 적을 베고 찌른다.
기병의 핵심인 기동력을 잃었지만, 사령부의 병력 또한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거리를 벌린 만큼 준비할 수 있는 시간 또한 넉넉했다. 하여 기병들은 말 위에 올라 다가오는 적을 밀어내며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손책.
그녀는 보병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나아가며 걸리는 족족 검으로 베어내고 창을 내질러 쓰러뜨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손책의 목적은 오직 하나.
“중랑자아아앙!!”
야수의 울부짖음이 그러할까. 그녀는 진 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목소리 높여 그를 부르짖으며 계속 전진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내며 전진하는 모습은 전장을 떠도는 한 마리의 짐승.
“안 돼요.”
사마의는 전호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면 아군의 피해가 커진다.”
“기병이 올 때까지는 기다리세요. 병력의 피해? 그게 어때서요. 저들의 죽음은 분명 쓰라린 손실이지만, 아저씨가 죽으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패배하는 거예요.”
그는 그 말에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는 와중에도 손책은 정말 일당백의 기세로 진영을 헤집고 있었다. 그렇게 공간이 한 번 나기 시작하니 기병도 조금씩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러니 포위에도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병을 포위하려면 아예 말을 움직일 수도 없게 빽빽하게 거리를 좁혀야 했다. 기마는 당연하며 기수 또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을 좁혀 섬멸하는 게 기병 포위의 핵심.
“이대로면 포위가 깨진다.”
손책의 무용이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아니까 못 보내는 거에요.”
사마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아무리 호랑이의 딸이어도 경험 없는 새끼 호랑이.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에서 전투하는 것을 보고 나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 무력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에 위압감을 흩뿌리며 선두에 선다. 하여 아군을 직접 이끌고 나아가는 전형적인 용장.
적의 전략이 무모한 전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간 손책의 행보를 보면 그녀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승리를 거둬왔다고. 사마의는 그런 전술을 무시했었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고 생각을 조금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손책의 움직임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힘에 자신이 있다면 저만한 정공법도 드물다는 걸까. 저런 막무가내의 조잡한 방식으로도 연전연승을 거둔 상장이라면 더더욱 그를 내보낼 수 없었다.
“절대 안 돼요.”
“포위가 흐트러지면 끝이야.”
“그럼 도망가면 돼요. 전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어차피 본대가 승리한 이상 이 전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전호는 살며시 사마의의 어깨를 붙잡고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 얄미웠다.
이런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흥미를 품었고, 그 이상으로 관심이 쏠렸다. 저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마의는 그를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지켜보고자 했지만, 정작 그랬던 모습이 지금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손책이 강해 보이냐.”
“네.”
“그럼 기억해.”
나도 못지않게 강하니까.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살짝 손을 뻗었지만, 이윽고 그것을 거두었다.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설사 말린다고 하여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지휘는 제가 맡을게요.”
“부탁한다.”
전호는 그렇게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러는 사이에도 보병은 계속 적에게 밀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분명 한 번 제동을 건 기병이니만큼 가까이에 붙은 보병에게 유리할 전장이었지만, 손책의 존재 하나로 그 숨통이 트이고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찾나?”
“……도망가지는 않았네. 무장이라면 그래야지!!”
감정적이다.
전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그녀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이기에야말로 아군을 앞에서 이끌고 사기를 북돋울 수 있었을까. 무장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감탄하여 용장이라 치켜세우겠으나 군주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손견과는 비슷한 듯 다른 성격.
“도망? 내가 널 상대로 도망가리라 생각했나?”
“그래, 그래야지. 영웅 손견을 잡은 인간이라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그래야 아버지의 위령 패에 올려 부끄럼 없을 테니까.”
손책도 말에서 내려 그를 마주했다.
나부끼는 하늘색 머리카락은 죽은 손견을 쏙 빼닮았다. 그 머리에 두른 붉은 두건과 그 호탕한 성미도 전부. 그렇지만 손견은 전장에서 저렇게까지 흥분하지 않았었다.
전호는 그걸 떠올리고는 픽 웃으며 검을 겨누었다.
“와라. 원하는 건 내 목이겠지?”
“당신뿐만이 아니야. 여포 그년의 목도 내 손으로 베어낼 거야. 당신은 시작. 여포까지 죽이면 아버지께 바칠 공물로는 충분하겠지?”
“나는 모르겠지만, 여포는 감당하기 벅찰 텐데.”
그들은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
손책의 뒤를 따르던 기병들도 그 주변으로는 다가가지 않았다. 조조군의 병사 또한 마찬가지. 하여 둘은 그저 서로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전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직 이 세계에 단둘만이 남은 것 같았다. 전장의 소음마저 전부 사라져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집중했다.
“기대해. 쉽게는 안 죽일 거니까.”
전호는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검을 꺼낼 자격이 있었다. 복수를 부르짖을 권리도 있었고, 이 전장을 통해 그 모든 걸 쟁취할 실력 또한 증명했다. 다소 곤란하게도 손견이 딸 하나는 정말 강하게 키워낸 것 같았다.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손책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렇지만 이내 그 속도를 끌어올렸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전력으로 질주하듯 앞으로 달려나간다.
내리치는 검격.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단순히 검끼리 부딪쳐 날 수 있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서 음파가 주변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제법, 하네.”
“네 아비도 막았는데 그 딸을 못 막으려고.”
아비와도 검을 맞대고 그 딸과도 검을 맞댄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만난 이상 자비를 베풀 생각도, 그렇다고 패배해줄 생각도 없었기에 전호는 검을 치켜들어 그녀의 검을 쳐내고는 자세를 잡았다.
방금 일격으로 방심할 상대가 아님은 깨달았다.
그렇지만 못 이길 상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는 청강을 겨누고는 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다.
“덤벼라, 천치.”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그 천치라는 말, 굉장히 듣기 짜증 나네.”
손책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재차 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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