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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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몸종이니까 당연한 거고.”
여포는 퉁명스레 유비에게 대꾸했다.
사실 몸종이라고 하기에는 군에서 장을 맡긴 적이 너무 허다한데. 솔직히 이제 누가 여포보고 시종이라고 부르나. 사실상 그냥 관직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아군 내에서 최강의 상장임을 부정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무슨 일이지?”
“아, 이번에 군 재편에 관해서 잠시 얘기를. 그리고 주둔하게 될 곳에 대해서도 아군 내에서 말이 있어 그 부분에서 상의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면 마침 잘됐네. 이쪽도 슬슬 얘기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러면 자리에 앉지. 앉은 김에 마실 것이 필요한가?”
“아, 주시면 감사하죠.”
그 대답에 먼저 손을 뻗어 옆에 놓인 화롯불에 물을 올렸다.
“주인아. 그거라면 내가….”
“쉿.”
넌 안 돼.
나니까 이제 익숙해져서 그냥 마신다지, 아무리 그래도 타 군의 군주에게 그런 걸 어찌 대접할까.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데! 왜 나만!”
“너보다는 내가 우린 게 낫다.”
미안하지만 이게 진실이었다. 잔혹할 수도 있겠으나, 뭐 다들 적성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아직도 방심했다 하면 기물 하나씩 부수는 여포보다야 내가 집안일이라는 것에 적합한 것이 아닌지?
“나도 많이 나아졌거든?”
“그건 맞는데….”
많이 나아졌다는 것의 기준으로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단지 출발선이 너무 멀어, 많이 나아져도 일반인의 시점에서 보면 아직 멀었다는 게 문제일까.
“어…, 저는 다 괜찮은데요. 맛을 가리지는 않으니….”
유비가 이런 분위기에 못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지금은 그냥 내가 내어주는 것이 낫지. 어디서 총사령관이 직접 우려주는 차 마실 일이 있다고. 게다가 여포의 실력은 좀 끔찍하다.
“흙탕물도 잘 마실 수 있다면야.”
“주인아? 흙탕물은 뭔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나 진짜 운다? 여기서 애새끼처럼 울어버리는 수가 있거든?”
“됐고. 슬슬 할 말도 끝났으니 너도 가서 장료 일 좀 도와. 그 양반이 형씨, 형씨 하면서 얼마나 힘들다고 푸념하는지 알아?”
그 부분에서 여포가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세게 갈았다.
아, 이거 잘못 말했나.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장료가 정말 그랬냐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더니 이내 벽에 걸린 방천화극을 챙기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어, 괜찮은 건가요…?”
“됐고, 잠시 기다리쇼.”
단둘이 남았기에 말을 편하게 하며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여포가 있어 봐야 내부적으로 진지한 말을 하기에 부담이 될 뿐이니까. 특히 유비라면 여포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겠지.
“어디 가서 총사령관 겸 중랑장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영광으로나 알고 잠시 기다려봐. 나도 사실 배운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우린 차도 여전히 쓰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포가 내린 차보다야 나은 면이 있었기에 그 부분에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럼 호강 좀 해볼게요.”
그녀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침묵을 지켰고, 이내 다 끓은 차에 적당히 마른 잔가지 같은 무언가를 넣어 우리고는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에 따랐다.
“그래, 편재 문제라고 했던가?”
그리하고 맞은편에 앉으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보병의 편재에 특히 곤란한 부분이 있어서요. 제식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조조군은 최근 창을 주류로 하여 편재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에서는 같은 편재로 두기 모호하지 않나요?”
서주군의 보병 편재는 기본적으로 극이던가.
아군도 주류로 사용하는 병기이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일반적인 장창으로 바꾸는 추세였다. 특히 내가 끌고 온 병력이 주로 그러했고, 극과 창은 얼핏 보아 비슷한 병기지만 활용법과 전술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는바.
“어차피 아예 하나로 뭉칠 생각은 없었어. 편재하되 기본 부대의 통솔권까지 장악할 생각은 없으니, 그 부분은 조홍 부사령관에게 잘 얘기하면 알아줄 거요.”
“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밝게 웃는다.
여전히 그녀는 웃는 얼굴을 제외하고 내게 무언가 다른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놀라거나 당황한 적은 있어도, 그것은 언제나 그 웃는 얼굴 내에서 살짝 변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이쪽 문제를 얘기하지.”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기에 잠시 미뤄둔다. 그것보다 문제는 최근 기병대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불협화음.
“그쪽 관우 장군이랑 우리 쪽 여포랑 자꾸 충돌하는 모양이야. 여포는 이쪽에서 잘 달랬으나, 관우 장군의 태도에 대해서는 한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운장의 일인가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의 태도가 날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까지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걸 고려하더라도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관우의 태도는 너무 비협조적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그냥 나와 대면했을 때는 제법 상식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접해줬으니, 그게 관우의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기병대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은 결코 간과하기는 어려운 것.
“전부 포용하라고는 않겠으나, 적어도 같은 군으로 편재되었다면 소통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서 이의는?”
“…그 부분에서는 제가 운장에게 말해둘게요.”
“부탁하지.”
아군 최강의 전력이 다름 아닌 기병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기존 여포와 장료가 이끄는 병력은 물론이요, 서주군의 기병도 관우라는 상장을 중심으로 한 강병.
그런 이들이 서로 반목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곧 수춘을 사정권에 놓을 거리까지 다가간다. 곧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인데, 그 전에 미리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처리하는 게 옳겠지.
“불만이 있다면 내게 직접 보고하라고 전하쇼. 그거라면 나도 사리에 맞게 판단할 테니까. 아예 불통으로 접해서는 얘기가 안 돼.”
“예. 이건 꼭 잘 말해둘게요.”
일단 유비에게 말을 전하였으니, 그 뒤로도 문제가 불거진다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부분일까. 기병의 문제는 특히 아군에게 중대사. 아예 손을 놓기에는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그러면 다음은 주둔지 문제인가?”
“그 부분이라면 저희는 수춘과 다소 거리를 두는 것을 고려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수춘 인근으로 전진한다면 회수를 통한 보급도 너무 늘어지게 되고요.”
유비는 품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어 탁자에 펼쳤다.
“수춘과 교류하고 있는 선박도 제법 규모가 있다 들었어요. 그렇다면 수춘에서 선박을 통해 회수로 내려와 아군의 위를 점할 수도 있고, 보급선도 너무 늘어지는 데다가 그 인근은 기병을 운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아군으로서는 무리하더라도 수춘을 가시권에 두고 움직이고 싶다는 게 본론이요. 평지를 찾아 그 부근으로 진을 꾸린다면 전장도 그 인근으로 제한될 것이고.”
이 부분은 정말 각 진영의 의견 모두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정하는 것은 내 몫인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상대와 잘 타협할 수 있느냐. 요컨대 서주 이들에게 얼마나 이걸 이해시키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
“사령관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나요?”
“일단은. 어찌 되었건 여남에서 움직인 본대와 합을 맞추려면 수춘 인근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보급선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부분에서 사마의는 어차피 아군에게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여분은 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붙기 시작한 이상 못해도 한 달 내로 결판을 못 낸다면 사실상의 패배라고 언급했는데, 그건 나도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조조군은 너무 많은 전쟁을 치렀다.
사실상 지금 준비한 군량을 비롯한 치중 모두가 빚으로 남은 것인데, 그것마저도 숫자가 넉넉한 편이 아니니까. 즉 한 달 사이로 수춘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군량이 바닥날 아군의 패배인 전쟁.
시간은 아군의 편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군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적의 움직임을 끌어낼 필요가 있으니, 그 부분에서는 서주에서 이해해주길 바라는데.”
“그것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되네요. 서두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고, 그것이 실수로 연결된다면 패배로 직결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전쟁이니까요.”
적의 병력과 아군의 병력을 합산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는 병력의 숫자만 하여도 10만을 훌쩍 넘겼다. 이런 대전에서 한 번의 실수는 바로 대패로 이어질 수 있다.
그녀의 말도 응당 일리는 있었다.
“일단 이 부분은 아군의 의견을 지지하는 바이나, 서주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생각도 없어. 군을 움직인다고 하면 아군은 이쪽. 비교적 평야가 고르고 수춘을 가로막는 하천과도 다소 거리가 있으니….”
“저희는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음릉 부근에 주둔하는 걸 추천하고 있어요.”
의견이 하나로 모이질 않는다.
물론 강제로 집행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서주의 반발도 고려해야 하겠지. 유비는 광릉 부근의 전투에서 내 믿음에 훌륭히 답해주었고, 비록 적을 포위하기에는 실패했어도 내 기대 이상으로 움직여주었다.
그런 이들을 강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직 거리는 있으니, 그 부분은 진군하면서 각 군의 수뇌부가 다시 모여 상의하기로 하지. 강압적으로 지시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 배려해주신다면 저희도 감사하죠.”
그러면 우선 보병의 편재와 기병의 문제도 일단락되었다. 주둔지는 아직 급하게 선정할 문제도 아니었기에 우선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말을 나누느라 처음으로 들이켠 차.
“어윽, 씹. 떫네.”
잘 우린다고 우렸는데, 또 실패했나.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잘만 삼키던데. 그래서 그냥 잘 됐거니 하고 있었더니만, 이건 뭐 떫다 수준을 넘어 거의 쓰다 싶을 정도잖아.
“이걸 어떻게 잠자코 마셨나? 어으 써.”
“사령관께서 직접 우려주신 거잖아요? 게다가 이런 씀씀한 맛도 가끔은 입안을 돋굴 좋은 향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게? 뭘 돋궈? 나라면 이런 걸 마시라고 우려준 시점에서 화만 도드라질 것 같은데. 하여간 속도 좋아. 이런 걸 마시면서 어떻게 그리 싱글싱글 웃고만 있나?
나였으면 대번에 표정부터 구겨졌겠다.
“쯧, 다음에는 좀 더 잘 우려보지.”
“기대할게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논의할 부분은 전부 정리하였다. 그 뒤로도 보급로의 배분과 각 군의 배급에 관하여 얘기를 하였지만, 이 부분은 어차피 서주를 통해 들어오는 것들이 전부인지라 이쪽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주가 아예 말도 안 되는 것을 제의하지도 않았고, 비교적 협조적으로 잘 진행해주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여 얘기가 얼추 정리되었을 무렵.
“그러면 사령관님, 저는 먼저 실례할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것을 보며 잠시 고심했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잠시 머뭇거리게 된 것.
“그, 서주목.”
“예?”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이쪽을 돌아보는 유비의 시선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니, 딱히 할 말도 없었는데 구태여 붙잡았다. 그간 떠들면서 입을 축이지 않았던 탓인지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그녀는 여전히 싱긋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 번 웃어보겠나?”
“……예?”
그 말에는 그녀도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미 나온 말을 도로 담을 수도 없었기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이었다.
“서주목이 웃는 걸 보고 싶어서 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항상 웃는 낯을 고수하는 여인에게 할 말은 아닌가.
언젠가 나는 소연 아씨에게 말했었다. 항상 웃고 다니는 사람이 왜 웃는지 아느냐고. 아마 그것은 그럴듯한 이유가 아닐 거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으면서도 정작 입가에서는 그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다소 기괴하게도 느껴졌지만, 반대로 조금 딱하기도 하였다.
분명 저리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그건 분명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이유일 터.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듯해서.”
“……사령관님.”
“실언이었네. 미안하고, 이제 물러나도 좋아.”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떠나갔다. 마지막에 어렴풋이 보였던 표정은 딱딱히 굳은 것 같았고, 그것을 상기하며 자리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구태여 그녀에게 깊게 관계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어차피 이 전쟁 이후에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사마의는 아마 잠재적인 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내막에 깊게 다가갈 필요는 없을 터.
그냥 조금 신경이 쓰였다.
“쓸데없는 말을.”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남기고 간 지도를 손에 쥐었다.
그녀가 품에 넣었던 것이라 그런지 부드러운 향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달콤한 향기. 평소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와 함께 이런 것 하나하나가 그녀의 매력을 돋구는 것이겠지.
병사들 사이에서도 유비는 인기가 많았다.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하다. 그러면서도 몸의 굴곡은 완벽하니 아름다웠고, 또한 항상 웃으면서 다니니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겠지.
나로 말하자면 글쎄.
그 지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유비가 어떻고 간에 내가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단지, 조금 거슬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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