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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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에서 가도를 타고 붉은 군기를 내건 병사가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확인했다. 규모는 아군이 추산했던 병력의 전부. 그렇다면 적도 우리를 공략하는데 총력전을 펼친다고 보아 무방했다.
“네 생각이 맞았네.”
“그렇겠죠.”
사마의는 감흥 없이 답하며 적을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단번에 적의 목표를 특정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 꼬맹이에게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을까. 하여간 머리 좋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여포는요?”
“이미 후방 측면으로 돌렸다. 장료도 그쪽으로 나가 있으니 언제든 신호만 준다면 돌격할 수 있게 배치해뒀지.”
조홍은 전열에서 군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나와 사마의가 군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고, 방삼이가 중군과 전열의 군을 잇는 교두보의 역할. 서황은 조홍의 보좌로 붙여주었으니 모든 준비는 끝났다.
과거 손견이 이끌던 군의 강력함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손견 본인의 역량에 초점이 맞춰진 전투력. 그가 직접 이끌기에 그 병사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사지로 달려들 수 있었고, 그렇기에 손견의 군은 언제나 강했던 것.
지금 상대하는 적은 손견이 아니었다.
손책이라고 했던가.
“음? 아저씨.”
“왜?”
사마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떨어진 방향을 가리키는 소녀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이와 수기의 기마 무리가 이쪽을 향해 있는 게 보였다.
붉은 두건은 손견의 상징.
“대장기를 내걸고 있는데요?”
“허.”
적진과 다소 떨어져 오히려 아군 진영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점. 이쪽에서 활을 쏜다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 손책을 상징하는 대장기가 걸려있었다.
“정찰인가.”
그래도 대장이 직접 이렇게 가까이 나선다고?
손견도 그랬지만, 손책도 어지간히 대담하다고 불러야 할까. 정작 손견은 그런 대담함으로 인해 전장에 발이 묶여 여포에게 죽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저건 만용이라 불러야 옳음인가.
그때 저 멀리서 뿔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손책의 깃발이 걸린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적 본대가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아마 아군을 향해 시위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싸구려 같은 도발이네요. 답례는 화살이 좋겠고요.”
“아니, 기다려.”
저리 당당하게 나선 이가 활에 대비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구태여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군이 궁수를 준비하는 모습을 확인하면 뒤로 물리지 않을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한 번 나가볼게.”
“아저씨. 침착하게 생각한 거 맞아요?”
“후방에서 여포를 불러들여.”
호위로 여포 정도라면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능히 대처할 수 있겠지. 전쟁 직전에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군과의 대화를 원한다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머지는 전시 태세를 유지. 사마의, 넌 만약 적진에서 군이 몰려든다 싶으면 바로 후방 장료의 기병대를 앞세워.”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구태여 이럴 필요가 있나요?”
방치하면 아군 사기에 영향이 간다.
물론 크게 영향 갈 것도 아니기에 무시해도 그만인 일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받아들인다고 하여 아군에 해가 될 일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손견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리는 탓에 그 망령을 손책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덧씌우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 어찌 되었건 받아들인다고 하여 손해 볼 것도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정이 있을 곳도 아니잖냐. 걱정이 너무 많다.”
“전 모든 경우를 고려하고 있어요. 만약 손책이 여포도 이길 무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잘못 나서는 것만으로도 아저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 여포를?”
어이가 없어 웃으려는 찰나, 사마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일은 아무도 몰라요. 무슨 일이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 모든 경우의 수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게 대안을 고려할 거에요.”
그건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사마의와 내 성향이 다른 것이고, 하여 사마의가 내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거겠지.
그렇지만 이 건에 대해서라면 문제는 없었다.
여포보다 강한 무장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화제가 되어 마땅했고, 설령 진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조잡스러운 방식으로 아군 사령관을 끌어낼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 건 괜찮으니까 잘 지켜보고 있어.”
대장기를 직접 뽑아 손아귀에 거머쥔다. 하니 사령관 직속 친위기병이 움직였고, 별도로 부른 여포와 전열에 대기하고 있던 서황 등을 대동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저 멀리에 내걸린 손가의 상징인 붉은 깃발.
저쪽이 대장 직접 행차하셨다면 이쪽도 그만한 면면을 대동하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손책이 무슨 의도로 저기에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손견의 딸이 직접 행차했느냐.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겠다.
설령 사과를 바란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런 싸구려 같은 말로 그 용장의 죽음을 대변할 수 있다면 입에 발린 말이야 얼마든지 뱉어줄 수 있었다.
그 여식이 납득할 수 있다면 말이야.
* * *
“진짜 오나.”
주유는 어이가 없어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나서는 것도 반대했던 주유였다. 손책은 괜찮다면서 아군 상장과 주유를 이끌고 이곳에 왔는데, 정말 그녀의 말처럼 적 사령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수기의 기마와 여포로 보이는 이를 이끌고 이곳에 나타났다.
“네가 손책인가?”
한의 중랑장.
주유는 그 모습에 보고 대번 표정을 와락 구겼다.
주변에 대동하고 있는 것은 여포와 또 한 명의 여인. 여포야 당연하다지만 저 분홍 머리의 여인은 손에 큰 도끼를 쥐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제법 한 실력을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중랑장 전호는 또 어떠한가.
세간의 평가는 신출내기의 중랑장. 그저 기회를 잘 잡아 고속으로 승진했을 뿐인 벼락치기 인사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신이 전호, 그리고 여포까지.”
반면 손책은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아비의 원수가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여포와 전호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렇기에 싸우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더냐.”
“당신들을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 소기의 목적은 이뤄졌다.
손책은 등 언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영웅 손견을 죽인 이들이 어디 무명의 소졸이어서야 면도 서질 않는다.
그들은 그녀의 기대만큼 강해 보였다.
여포는 물론, 딱히 기대하지 않았던 중랑장마저.
짙은 무게감이 내리깔린 느낌이었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에 그녀는 달아오른 몸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그 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감정을 겨우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죽일 이의 얼굴은 미리 확인해두는 주의라서.”
“하, 건방진 년이. 누가 누굴 죽여?”
여포가 방천화극을 들어 그녀를 향해 겨누며 미소를 짓는다. 그녀 특유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고, 이내 말 그대로 여포가 씹어먹을 기세로 흉흉하게 말하니.
“내 주인을, 이 군의 사령관을 네깟 년이 감히? 그 전에 이 여포는 꺾을 수 있겠냐?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는 거지.”
“할 수 있어.”
“네 아비도 날 이겨내지 못했는데?”
여포는 그런 손책을 도발하며 픽 웃었다.
손견의 이름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행동에 손책의 미간에 와락 주름이 일었다. 만약 주유가 그녀의 팔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을 터.
“……그걸 포함하여, 당신들은 이 전장에서 죽어.”
여포가 그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전호가 먼저 앞에 나서서 여포의 말을 끊고는 손책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은 좋다. 물론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지. 권리도 있다. 아비의 죽음을 대변하는 여식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아비가 손견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너는 내 목을 가져갈 권리를 가졌다.”
손견은 과거 전호의 목을 치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죽은 것은 당사자. 그것도 여포의 난입과 개입이 아니었다면 무난하게 전호가 죽는 것으로 끝났을 전장이었다.
“그런데 말로만 나불거릴 건가?”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손견은 실력으로 증명했다. 자신의 강함을 내게 보였고, 나와 필사적으로 검을 맞대었다. 내 목을 치기 직전까지도 갔지. 그런데 너는 무엇이지? 말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전호는 구태여 손책을 자극했다.
손책이 흥분하여 과도하게 자신들을 공략하면 공략할수록 그에게는 이득. 우회하고 있는 유비가 제 역할을 해준다는 전제하에, 저들을 이 전장에 묶어두기만 하여도 일망타진할 기회가 열렸다.
“증명하라는 거지?”
“자격도 있다. 권리도 있지. 그러면 나머지는 그것을 쟁취할 수 있는 실력을 증명하는 게 수순 아닌가. 만약 네가 내 목을 칠 실력까지 증명한다면, 이 호세.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겠다.”
“아니아니, 주인아. 그건 도망가야지.”
여포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전호는 그런 여포에게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시 손책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색 머리카락을 붉은 두건으로 감싼 모습은 마치 손견을 상기시키는 것만 같았다.
이미 죽고 없는 과거의 명장.
“네가 손견의 딸임을 내게 증명해라.”
내 목을 원한다면 덤벼라.
죽을 기세로, 거듭하여 검을 들어라.
그렇게 이 전장에 발을 묻고, 계속 싸워나갈 뿐인 시체로 남아라.
전호는 이 전장에서 손책의 군을 일소할 생각이었다. 적을 퇴각시킨다? 그런 시답잖은 방식으로 이 국면을 타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을 벌고, 또 번다.
유비가 도착하여 그 뒤를 점할 때까지.
“……내 검이 당신의 목을 가를 때까지 그렇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네.”
손책은 이를 뿌득 갈며 다짐했다.
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엉망으로 박살 내리라고. 울며 빌며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하리라 다짐했고,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썩 괜찮은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럼 수다는 여기까지인가?”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나온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의 말에 손책은 살짝 고개를 들면서도 다소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손견의 최후는 용감했어?”
전호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소기의 목적은 적의 도발.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천하고 추하게 죽어 나갔다며 적을 도발, 그리하여 이 전장에 더욱 집착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차마 그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용맹한 무장이었노라고 기억한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패배한 자기 자신에게도, 더 나아가 그 강맹했던 무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손책은 그 대답에 만족했다.
어차피 죽일 상대였지만, 적이 생각하는 아비의 모습을 듣고 싶었다. 쓰잘머리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구태여 이렇게까지 나서서 들을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단지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
등을 돌려 먼저 진으로 복귀하던 전호의 말이 멈췄다.
“손책.”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손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옆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그의 말에 시선을 돌렸는데, 전호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고했다.
“사죄는 필요치 않은가?”
순간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죄?
조금 고민하고, 그제야 겨우 그 말을 언어로써 이해할 수 있었다. 손견을 죽인 사죄.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사죄한다고 죽은 이가 돌아올 것도 아니었고, 전장에서 적을 죽인 것에 대한 사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뿐인 사죄도 필요치 않은 것.
“손가의 복수는 오직 피로만 이뤄져.”
“그런가.”
그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갔다.
적토마에 올라 이쪽을 잔뜩 경계하던 여포와 대부를 든 여인, 그리고 그의 호위병도 함께 물러나는 것을 지켜본 이후에야 손책의 사람들도 한숨을 돌렸다.
“……이런 짓, 다신 하지 마라.”
특히 주유는 손에 잔뜩 배어난 땀을 닦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그들을 목전에 두고 보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포의 흉흉한 기운으로만 벌써 등 언저리에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식은땀이 잔뜩 흘렀는데, 그 당시에는 그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긴장하여 언제든 무기를 뽑을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래? 난 제법 만족했는데.”
“하, 하하!! 역시 장군의 따님이라 그런지 간도 대범하군. 그런데 그거 아나? 혹여 저들과 여기서 싸웠더라면 좋은 꼴은 못 보았을 거야.”
정보는 숨을 고르며 겨우 웃었다.
여포도 물론이거니와, 중랑장 전호도 당시 전장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인간이 되어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혹은 그새 그 남자가 거기까지 성장했는지는 정보 본인도 알 수 없는 것.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당시에는 그저 풋내기. 손견과 단독으로 대치한 그 배짱만은 인정했고, 손견이 여포의 손에 죽기 직전 전호를 가리켜 가능성이 있는 애송이었노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했지만, 그때는 저런 느낌이 아니었다.
“완전 딴판이 되었더군.”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전력은 호각. 그렇다면 군을 얼마나 잘 따르게 하고, 얼마나 더 잘 싸우는지로 승부가 날 테니까.”
손책은 담담하게 말하며 저 멀리 떠나는 전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여포도 물론이거니와 기대하지 않았던 중랑장 또한 그녀의 기대에 충족하는 인물들이었다.
알아야 할 것은 알았다.
원수의 이름, 그 얼굴. 그 목소리.
기억해야 할 것은 전부 기억했다.
“서주군으로 보낸 사람들은?”
“지금쯤 접촉했겠지.”
주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손책이 먼저 말에 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전쟁뿐. 적이 죽거나 자신이 죽거나. 오로지 이 전장에서는 두 가지의 결말밖에 없을 것을 다짐하며 손책도 진영으로 돌아섰다.=============================※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