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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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무거울 수밖에. 그 대단하신 황제 폐하와 독대하는 자리가 어렵지 않으면 뭐가 어려울까. 특히 요즘 조조와 황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 탓에 더욱 가기 싫었다.
싫은데도 가야만 했다.
이게 관료의 생애인가. 염병.
“귀하여, 여기다.”
저 앞 연못가 정자에서 소녀가 손짓하고 있었다. 소녀는 소녀인데, 그 뒤에 황제라는 직함이 붙는 게 슬픈 부분일까. 주변을 둘러보아도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항상 따라다니는 상시라는 양반밖에 없는 자리.
“폐하의 존안을 뵙사옵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예는 되었노라. 어차피 이 자리는 귀하와 소녀, 둘밖에 없는 자리가 아니한가.”
그 뒤에 상시라는 분은?
지금도 눈 부릅뜨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게다가 사실 이런 자리도 말이 안 되는 게, 어떻게 황제라는 사람이 호위도 없이 신하를 막 독대하고 그러시나.
그러다 언제 큰일이라도 날까 무섭네.
“상시는 신경 쓰지 마라. 음, 아니면 상시. 잠시 물러나 있거라. 대화가 끝나면 다시 부를 터이니.”
“폐하.”
“괜찮으니라.”
소녀는 씩 웃으며 상시를 물렸고, 그는 고개를 숙여 물러나는 마지막까지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저건 노려봤노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까.
속 쓰리니까 그렇게 빤히 보지 마라.
“그럼 여기에 앉으라.”
“예, 폐하.”
왜 하필 바로 옆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이거 예법에도 안 맞는 거 아닌가 싶지만, 정작 또 예법을 따지기도 모호한 자리.
“귀하여. 저번에는 그래도 나름 편히 대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한층 더 소녀를 어렵게 대하는구나. 짐이 자신을 소녀라고 칭하는 연유를 모르겠느냐?”
“그게 아니옵고, 그래도 폐하신데.”
하니 폐하께서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 따지면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가 태형 감이었느니. 귀하에게 누누이 일렀을 것인데? 군신의 예도 좋다마는, 정작 황제의 의중도 헤아리지 못하면 신하 실격이 아닌가.”
“하, 하옵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정치판이라는 게 다 그렇더라. 하라고 해서 진짜로 하면 욕을 먹는 세상. 욕만 먹으면 다행이지, 나중에 그게 어떻게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귀하는 소녀의 은인이요, 영웅이었느니. 하여 소녀 앞에서는 좀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려운가?”
“…노력하겠습니다.”
“황제의 명이다.”
황명이 이리 가볍게 남발되어도 되는지?
사실 이 어린 소녀에게 뭘 해줬다고. 호감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정작 폐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그래, 중랑장의 일은 할만한가?”
“예, 폐하.”
“그 뒤로 대장군이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귀하도 들었어야 했다. 전장에서 승리한 장군의 계급을 낮추는 법도는 없다느니, 어쨌다느니. 소녀의 귀에 딱지가 앉을 뻔했으니 말이야.”
그 조조가?
말을 했어도 유순하게 돌려 말했을 것 같은데.
물론 편장군도 장군 말석이어도 장군. 비상설이고 언제 폐지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장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권에 있어서 중랑장보다 우위를 점하긴 했다.
상설직이고 황제 폐하와 엮인 중랑장을 더 높게 쳐주는 것도 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조조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겠지.
“하여 소녀도 조금 고심했다. 그래도 귀하가 괜찮다고 말해주니 다소 안심이야. 불만이라고 하면 어떡할까, 내심 걱정했으니.”
관직을 내린 황제 앞에서?
그런 말 했다가는 목이 달아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나? 솔직히 말해 중랑장이 되고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사실인데.
“분에 넘치는 배려이옵니다.”
“또 그러네. 소녀 앞에서 편히 있으라는 말을 벌써 있었느냐? 아니면 혹여, 황명이 우습기라도 하다는 말인지.”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는 또 어깨를 으쓱였다.
“되었다. 아무튼, 이번 서주목에게 몹쓸 일이 있었다고 들었노라. 그것을 중랑장이 잘 처리한 것도 들었고.”
“…예.”
황족과의 불화였다.
어제 동승이 찾아왔던 것도 그렇고, 황제 폐하도 자칫 그 일을 언급하려는 걸까. 이대로라면 황족 예우를 삭감하지 않을 명분도 없었는데, 반대로 그건 곧 황실의 권위 추락과도 이어지는 것.
가령 폐하가 그 일을 덮으라고 하면 어떡할까.
이미 그 일은 내 손을 떠났다. 조조가 직접 나서 조사하고 있는 일을 이제야 뭐라고 한단 말인가. 게다가 유비 역시 그런 조조에게 순종적으로 나서는 상황인데.
“고생이 많았겠네.”
하지만 소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황족들이 너무 고개가 높다 느끼었다. 권위는 있으나 그들이 관료인 것도 아닌데, 최근에는 실무에도 손을 뻗으려 한다던가.”
“예?”
“응? 왜 그리 의외라는 표정인가?”
아니 그치만.
지금 상황은 명백하게 조조와 황족의 대립. 그러하면 당연히 황제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어쩌면 이것을 계기로 점차 권력의 축이 조조에게 확 기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설마 소녀가 같은 유씨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호해야 한다, 그런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동승도 계속 멍청하게 같은 말만 반복하였는데.”
“아니, 그것은 아니옵고.”
“제 권위에만 심취하여 소녀를 버린 이들. 그런 이들이 내 뒤를 잇겠다는데, 소녀가 그들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있나? 잘 모르겠는걸.”
낙양에서 장안으로 이어지기까지 황족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무얼 했던가. 기껏해야 지방으로 흩어졌다가, 이제 좀 상황이 나아진 듯싶으니 홀라당 허도로 돌아왔다.
폐하는 그걸 꼬집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대장군이 소녀의 권위를 짓밟을 것이라고 하던데, 웃기지 않느냐? 당장 황제의 권위를 짓밟는 가장 큰 요인은 전부 다른 곳에 있는데.”
“폐하.”
“귀하는 어찌 생각하지?”
당장 크게 보면 원소가 있었다.
위천자라고 현 황실을 대놓고 무시했던 남자. 그 남자의 논리는 힘 있는 강자에겐 제법 구미 당길 소리였고, 하여 지방관 중 독립적인 파벌을 꾸린 제후는 실질적으로 황실과 독립된 구조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내면으로 보면 어떠한가?
최근까지 조조를 비롯한 정부 관료에게, 심지어 나한테까지 황족의 사람들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최근 도는 유비를 황제로 올린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현 황제에게는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전국옥새도 분실한 상황에서 이 소녀의 근본은 본래 황제를 폐위하고 옹립시킨 것. 말마따나 현 중원에서 최악이라고 불리던 동탁이 손수 세운 황제였다.
“소녀는 잘 모르겠다. 주변 모든 이가 대장군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만, 본래 소녀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에 있었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다고 하여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 개인은 조조가 한을 무너뜨리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한에 충성한다던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귀하여.”
“예, 폐하.”
“소녀는 그저 한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장식이다. 인형이지. 권력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못 했던 소녀가 장차 황제로 우뚝 설 수 있겠느냐?”
황제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짓궂은 질문이었네. 미안해.”
소녀는 가끔 황제로서의 어투와 일반적인 어투가 번갈아 오가고는 했다.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중랑장으로서의 일을 보고하러 왔다고 했던가. 귀하가 하는 일은 전부 긍정하고 맡기지. 주변의 잡설에 놀아나지 말고 귀하의 업무에 충실하라.”
“명, 받들겠나이다.”
“원래는 조금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소녀의 욕심이겠지. 중랑장도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을 터이니, 오늘은 우선 물러나도록.”
황제와의 대면은 고민만 늘고 끝났다.
그 어린 소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황족과의 관계와 유비라는 존재. 조조의 움직임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아직 잠잠한 황족의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사고만 나지 않으면 좋겠는데.
* * *
“후우.”
소녀는 다리를 뻗고 등을 쭉 펼쳤다.
황제로서의 자신은 너무 무거웠다. 답답한 옷을 억지로 입혀진 느낌이었는데, 특히 이 곤룡포랍시고 매번 입어야 하는 의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하, 중랑장은 갔습니다.”
“그러면 그 주변을 잘 알아보거라. 조조의 대응까지는 예상했지만, 황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사고를 너무 치는구나.”
중랑장은 유비와 함께 현 소란의 핵심이었다.
현재 허도에서는 유비가 황위를 찬탈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돌았다. 정확히는 황제 본인이 주도하여 뿌린 것인데, 그걸 통해 조조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거기에 중랑장까지 엮이고, 더욱이 황족들이 먼저 손을 써 유비를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그것이 유협에게는 뼈아픈 실책으로 다가왔다.
이래서 얌전히 있으라고 했던 것인데.
황족은 기본적으로 나이 어리고 정통성 떨어지는 유협을 무시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가 자중하고 있으라고 하였는데도 이리 행동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상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직 정해진 것이 없사옵니다. 조조의 반응은 예상대로. 아니, 오히려 폐하를 소문에서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으니, 지금으로써 폐하의 발목을 잡는 것은….”
“황족들이겠지.”
자꾸 빌미를 제공한다.
저들이 저리 기고만장하게 굴면 조조가 그걸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돈도 없고 병력도 없는 황제로서 조조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정작 황족이란 것들이 황제보다 더 콧대가 높았다.
“중랑장의 주변은 특히 잘 살피거라. 그의 행동은 이미 중랑장에 올랐을 때부터 그랬지만, 조조와는 어딘가 틀어지는 면이 있다.”
잘 꼬드긴다면 자신의 수족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중랑장 전호.
그는 조조를 따른 기간 자체는 짧으나, 동군에서부터 조조와 함께 해왔다 일컬어졌다. 조조 측근의 친족을 제외하고는 군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제법 큰 인물
그러니 그를 보고 판단하려 들었다.
유협은 그가 자신의 신뢰에 합당한 인물이라면 포섭하고 싶었다. 휘하도 쟁쟁한 데다가 공적 역시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 문제라면 조조가 그를 필요 이상으로 과보호하는 느낌이 있다는 것인데.
“폐하, 그러면 황족분들에게는 어찌….”
“놔둬. 장안에서 짐이 쫓겨 다닐 때 그들이 어찌 행동했지? 그래놓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떡고물이나 얻어먹으려는 짐승마냥 쫓아온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폐하의 지지층이옵니다.”
“알고는 있다마는.”
조조와 힘겨루기를 하려면 그들의 존재는 필수. 그렇지만 그들이 계속 저리 허점을 보인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함인가.
“지금의 조조는 짐의 권위에 과한 도전을 삼가고 있다. 동탁과 이각, 곽사에 비하면 양반이지. 그러니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고 누누이 일렀거늘.”
권력의 정점은 하나.
유협도 알고는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조와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일. 그렇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소녀에게는 힘도, 권력도, 돈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를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따르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 버렸다. 각지에서는 여전히 권신들이 날뛰고, 제 세력을 불리는 상황.
조조에게 우선은 협력하는 게 맞았다.
“일단 상시는 짐이 말한 대로 움직이거라.”
“예, 폐하.”
상시의 뒷모습을 보며 유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조조와는 맞서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조조를 이길 수 있을까. 가령 이길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허점이 없구나, 허점이.”
현 조조는 굉장히 탄탄하게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잦은 전쟁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충족하기 위해 각 호족과 지방관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군사적으로는 서주와 형주를 짓밟았다.
그런 여자를 자신이 이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그려지질 않았다.
아직 어린 소녀가 상대하기에 조조라는 상대는 경력도, 경험도. 하여 가진 재능도 너무 규격 외로만 보였다. 시간을 들여 기다리며, 천천히 제 세력을 갖춘다면 상대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물음표였다.
꼭두각시로 남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그 뒤로 나아갈 그림이 보이지 않아 그것만이 소녀를 괴롭히는 잔재처럼 남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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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정에 hon님이 보내주신 현 시점 세력도 팬아트가 있습니다!! 확인해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현재 캐릭터 설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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