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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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갑자기 비가 이래 쏟아지나.”
머리까지 흠뻑 젖은 것을 적당히 털어내고 지붕 처마에 몸을 피했다. 빗방울 소리가 땅을 두드리며 스며든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을 차갑게 식히는 빗줄기를 닦아내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좀 하네.”
“그치?”
비가 내리기 전까지 장비와 대련하고 있었다.
식후의 가벼운 운동 겸, 실력 좀 봐 달라고 신청한 건데. 뭐라고 할까. 확실히 장비라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재차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할까.
무지막지한 폭력.
아무래도 대련이니까 서로 목제로 된 검이나 봉을 들고 임했는데, 진짜 손도 못 쓰고 상대의 공격을 막기 급급했다. 가끔은 하단부에서 치고 들어오는 일격에, 기본적으로 사방으로 적을 두드리는 전투법.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 마라. 너 정도의 실력자, 확실히 천하에 드물기는 해도 없는 건 아니니까. 더 강한 이도 더러 있을 거고.”
장비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혀를 찼다.
“쯧, 내가 조가 놈 사람이 뭐 좋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대련 직후로의 반응이 꽤 변한 느낌이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인정한다는 걸까. 겉으로는 툴툴거리지만, 그래도 아예 까칠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관우가 수건을 건네며 빙긋 웃었다.
“반동탁 연합에서 싸우던 것에 비교해도 많이. 이 짧은 기간 만에 거기까지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장비도 그 부분에서는 깜짝 놀랐을걸요?”
“뭘 놀라. 아직 애송이구만.”
윽, 애송이 심장 아프다.
하지만 장비 입장에서 보면 분명 애송이라고 칭할 정도겠지. 솔직히 수 싸움은 물론이요, 단순히 힘, 속도, 기교. 어느 부분에서도 감히 그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장비가 겉보기에는 소년처럼 보여도 실제로 내가 태어날 즘부터 전장을 누볐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 초기부터 활약했다고 했으니, 그 경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많이 배웠수다.”
“말 더럽게 짧네.”
“편하게 하라면서?”
“내가 하라고 한 적 없다. 다 저 누이가 그런 거지. 하여간, 이런 놈 뭐가 좋다고. 앞으로 나한테는 말 짧게 하지 마라.”
장비가 고개를 홱 돌리기에 코웃음을 쳐줬다.
“중랑장에게 말을 높이라? 장공, 관직이?”
“…쯧, 편하게 해라.”
계급으로만 나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가 감히 내게 말을 높이라고 할 수 있겠냐, 이거야. 서주목이라고 하여도 나와 동급이거나 그 밑일 것인데. 물론 현 천하에서 주의 주인을 관직의 우위로 비교하는 멍청이도 없겠지마는.
“오라버니, 이제 어떡하실 거에요?”
“일이 많기는 한데. 일단 비 그치면 가자.”
“네, 부디 그러세요. 비가 이렇게 내리는 와중에 중랑장을 홀로 보냈다고 하면 남 듣기에도 안 좋으니까요.”
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툇마루에 앉았다.
관우와 장비.
다시 보아도 굉장한 맹장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을 휘하로, 또 남매로 들인 유비는 어떤 사람인가.
호걸이라 불리는 이들은 어중간한 자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 관우는 아직 모르겠으나, 적어도 장비 같은 사람은 더더욱. 이번에 한 번 대련으로나마 검을 맞대었다고 나름 인정해주지 않는가.
그는 전형적으로 사람의 능력을 보는 이였다.
그렇다면 유비는?
무력은 잘 모르겠다. 애당초 군주라면 무력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니, 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확실히 행동거지나 겉모습은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낄 법하다.
특히 가슴은…, 어우.
아무튼, 이 안건은 꽤 궁금한데.
“댁들에게 유공은 어떤 사람이요?”
그러면 물어봐야지.
“오라버니.”
옆에서 운이가 내 팔을 잡고 살짝 당황했으나, 그것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예민한 질문이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 모르겠다면 상대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른 바 아닌가?
“언니에 대해서요?”
관우는 살짝 눈을 감고 고심했다.
“흥, 누이에 관해 물어서 어디다 쓰려고. ……아니면 뭐냐, 혹시 너. 누이에게 저속한 흑심이라던가….”
“그건 아니고.”
이미 여인이라면 주변에 많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도 있어, 그 부분에서의 정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서주목? 잠재적으로 적이 될 여인에게 흑심을 비추는 종마 새끼가 애당초 어디에 있겠냐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관우가 픽 웃었다.
“그러네요. 언니는 빛무리 같은 사람이죠. 태양처럼 환하고 밝게 뜨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곧 천하에 그 빛을 드리울 사람. 따듯한 사람. 남을 위해 자신의 살을 깎을 수 있을 사람이에요.”
“…누이. 그거 큰 누이를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나 이전에 벌써 장비부터가 질색한 표정이었다.
아니, 세상천지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다 이득 있고서야 일도 하는 거지. 자고로 내가 살만하고 나서야 남을 돌볼 시선도 생기는 법.
살짝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좀 비현실적인데.”
너무 올려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관우의 눈빛을 보니 꽤 진심으로 말한 것 같았다. 장비는 그런 관우를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데.
“큰 누이가 대단하기는 해도 그런 사람은 아니지. 사람을 다스릴 줄 알고 포용할 줄도 아는. 그러면서 대의를 가지고 있는. 딱 그 정도잖아?”
“익덕. 넌 너무 언니를 무시하는구나.”
“무시는 개뿔. 천하에 이것도 못하는 무지렁이들이 얼마나 쌔고 쌨는데. 제 밑도 못 돌보는 머저리가 한 수레인데, 이 정도면 최고의 대장 아닌가.”
물은 건 난데 남매 둘이서 말다툼을 시작했다.
운이도 그 남매의 문답에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이건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정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같은 의형제끼리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
한 인물을 평가하기에 있어 의견이 갈린다는 건, 그만큼 그 인물이 팔색조와 같은 변모를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그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뜻.
“아니, 큰 누이가 확실히 좀 멍청한 구석도 있지만, 그래도 천지 분간은 할 줄 알지. 누이 말대로면 큰 누이는 아예 머저리라는 소리 아니요?”
“언니께서는 대의를 가지고 계신다. 그거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참는 것도 있다는 걸 익덕 너도 알지 않니?”
“아니지. 그건 상황이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거, 좀 길어지냐?
난 그냥 가볍게 떠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저들끼리 그렇게 말다툼하는 거, 개인적으로 좀 아니다 싶은데.
비가 조금씩 멎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남매의 대화도 어느 정도 잠잠해지는 와중. 저 멀리에서 우산을 쓴 여인이 정문을 거쳐 장원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어머? 중랑장께서 왜….”
“또 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실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예복으로 잔뜩 꾸미고 치장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허리에 끈을 묶어 가슴을 도드라지는 복장에서 그 파괴적인 젖가슴의 크게는 어떠한가.
“…오라버니.”
“안 봤어.”
서로 속삭이는 와중에도 운이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솔직히 살짝 시선이 돌아가긴 했는데, 그건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저런 무지막지한 크기의 가슴을 보고 어떻게 진정해? 말이 돼?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실까요.”
“그냥 주변 살펴볼 겸, 인사나 드릴 겸. 뭐든 겸사겸사 아니겠습니까. 서주목께서 거주하실 곳은 특히 경비할 필요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 살피는 것도 겸했죠.”
허도에서 몇 경계해야 할 요인 중에서도 유비는 특히 중요한 요소였다. 일단 이 위치라면 순회하는 경비를 배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기본적으로 부호들이 자리 잡은 곳이니까.
“아…, 아직 모르셨나요?”
그런데 유비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떨떠름하게 이쪽을 바라본다. 모르다니? 어차피 장원을 비롯하여 서주 인사들이 이 장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그러니 이곳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번에 황족분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머물게 되었어요. 그러니 운장이랑 익덕도 미안하지만,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겠니?”
“…왜?”
그 말에 순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관우와 장비도 마찬가지. 구태여 이 장원을 버리고 황궁과 밀접한 그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던가. 게다가 그곳은 기본적으로 황족과 관련된 이들만이 거주하는 공간.
“언니, 그러면 저희는….”
“짐만 옮겨주면 돼.”
그 말에 장비가 이쪽을 쏘아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중랑장?”
“…거 그렇게 보지 마쇼. 나도 몰랐으니까.”
알았더라면 구태여 이곳의 시찰과 경비 구조를 파악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안 그래도 조조와 반목할 지금의 황족 사이에 유비를 던져넣겠다고?
대체 누구냐.
어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신선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태여 폭풍의 핵을 옮기겠다는 건데, 이걸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대체 뭐냐.
“…네놈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
“아니, 진짜 몰랐으니까 그러지. 알았으면 구태여 여기 와서 이 헛수고를 했을까? 난 진지하게 경비 노선도 짜고 있었는데, 염병.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진짜 오해였다.
억울하기도 이렇게 억울할 일이 없었다. 적어도 무슨 사안이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유비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자 했던 건 진심이었다.
“익덕. 진정하렴.”
유비는 그런 장비를 말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를 진짜 황족으로 받아들여 준 걸 수도 있잖니? 폐하를 통하여 내려온 명이라고 하니 이게 어찌 대장군이나 중랑장께서 예상하셨겠니.”
생각해보자.
여기서 유비를 황족과 그 계열 아가리에 들이밀어 좋을 이득이 뭐가 있을까. 분명 이건 황제 폐하만의 의향은 아닐 터. 이런 대담한 결정을 내리려면 적어도 조조, 아니면 소연 아씨의 긍정이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그들은 분명 유비를 회유하려 들 터.
“……아.”
그런가.
이 순간 깨달았다.
유비는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한 발의 효시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 허도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악의가 조조를 정조준하고 있는 상황.
그 불만을 터뜨릴 셈인가.
유비를 시발점으로 삼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살 이쪽을 적대하던 이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낼 생각이라면 이것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으리라.
“…언니가 그리 말씀하시잖니.”
관우가 장비의 팔을 붙잡았지만, 정작 만류하는 그녀의 표정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 적진. 게다가 황실 인근으로 이동한다면 그들의 손에서 제 대장이 떠나는 셈인데.
“걱정하지 마쇼. 내가 눈 부릅뜨고 경비할 테니.”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적어도 유비 본인이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이 허도에서 유비가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런 치졸하고 더러운 방식까지 써야 할 정도로 아군은 궁핍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죽인다고 하여 서주가 몰락할 것도 아니다.
아무 이득이 없는 일.
“서주목께서 불미스러운 사안에만 엮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주목에게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응? 그렇잖아. 유공을 죽이면 서주가 무너지나?”
“너무 단도직입적인 거 아니세요?”
유비가 앞에 나서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진정하렴. 이걸로 너희의 언니가 진짜 공인받은 황족이 된 것인데, 왜 그리 죽상이니? 중랑장께서 몸소 지켜주신다고 하는데, 무얼 그리 걱정해.”
내 손목을 붙잡는 손.
“천하의 여포와도 겨룬 맹장이 나를 지켜준다는데, 너희가 그러면 중랑장께서 뭐라고 생각하겠니?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응?”
“…쯧, 알겠어.”
장비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관우 또한. 하여 유비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혓바닥까지 살짝 내밀며 귀여운 척을 하는데,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라 순간 당황했을 즘.
“짐 나르는 거. 도와주실 거죠?”
“…아, 예. 뭐, 어렵지는 않지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뭐 이렇게 활기차.
알고는 있나? 아니, 그걸 모를 리 없겠지. 당장 내가 면전에 대고 말한 내용. 그건 쓸데없는 일에 엮이지 않으면 지키겠으나, 반대로 무언가 수상하다 여겨지는 움직임을 보일 즉시 죽일 수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진짜 알고 있는 거 맞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안 그래도 날이 선 분위기의 허도에서, 그것도 황궁 인근 황족이 모인 구역으로 등 떠밀리는 상황인데 이리 웃을 수 있나?
“자자, 서두르죠!”
“오라버니.”
“……그래, 돕자.”
한숨을 내쉬고 팔을 걷었다.
앞으로 어찌 될까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운이 또한 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지로 내몰린 것과 마찬가지.
그런데도 유비는 웃고 있었다.
항상 웃는 사람이 왜 웃을까. 그 이유는 생각보다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미소는 제법 생기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여 이상했다.
이게 웃을 수 있는 상황이던가.
수족 모두 잘려나가, 이제는 본 적도 없는 황족 소굴에 내던져진 꼬락서니. 그런데도 웃을 수 있다면 이 여자의 담력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 줄이 질긴 것인지.
“난 모릅니다.”
“예?”
그냥 미리 말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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