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감정의 무게 여포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큰 버드나무에 어깨를 기대고 축 늘어진 그녀의 뒷모습이 보여,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딘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왔어.”
“도망가니까.”
적어도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물론 생각해보면 그 꼬맹이가 있는 곳에서 할 얘기는 아닐 거 같으니까, 그냥 자리를 옮겼다고 생각해도 될까.
“주인아.”
“왜.”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나 그때. 그, 주인이가 조조 저택에서 하룻밤 자고 왔을 때 있잖아. …보면 안 되는 거 알았는데. 그래도 조조가 영 못 미더워서, 그래서….”
“그랬구나.”
여기까지 와서 아닐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조조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때부터 그랬겠거니 싶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들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부분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마지막까지도.
내가 그녀를 포박했을 당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방천화극을 떨궜었다. 그게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직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녀가 왜 나를 그리 마음에 두었는지. 어쩌다가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천하무쌍의 무인이 아이처럼 울 정도로 무너지게 되었는지, 지금의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아. 나, …여기가.”
여포는 제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떨리는 손과 창백해진 안색. 저런 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한 번 짓밟았던 상대였기에. 내게 진심을 보내주는 사람이 나 때문에 슬퍼하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아파. 왜일까. 알고 있었는데. 어차피 내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 다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조금이나마 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한심하다.
“이런 거야? 나, 싸우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난 그냥 혼자서 좋아해도 괜찮지 않을까 했었는데. 조조랑 주인이가… 하는 거 보면서.”
말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떨면서도 제 가슴팍을 꾹 누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단지 날 따라준다고 하여 그걸 좋다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운이에게도.
호의를 보내는 상대들이 그저 그걸로 만족한다고 하니까. 그 문제에 더 깊게 파고들면 감정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복잡해질 것이 뻔하다고 느껴 거기에서 살짝 눈을 돌렸었다.
“아프다고…. 주인아, 여기가…, 좀 아프네.”
“조금이겠냐.”
소연 아가씨가 처음 날 거절했을 때.
그때는 어떤 기분이었더라. 지금 돌이키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러다가 운이와 같이 잠자리에 들고, 그렇게 타인의 온기로 조금씩 기억에 묻었던 것 같았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누가 있지?
“그냥 따라가는 거로, 곁에 있으면서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 주인이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보답 받듯이, 나도 그냥 그렇게 서로 웃을 수 있으면 좋다고.”
여포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나는 뭐야?”
여포 봉선.
천하무쌍. 내 몸종. 한때의 적, 현재의 아군.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애당초 내 곁에 둥지를 틀었을 때부터 천하무쌍의 여포 봉선이 아니라 한 명의 여인,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똑같은 사람으로 봐줘야 했다. 그게 옳았다. 그러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의 마음에 답해주지 못했다.
“나는 그냥 무기야? 여전히 화극의 날이고, 똑같은 인간 병기야? 싸우는 것밖에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여자야?”
“아냐.”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끔은 머리 아픈 일도 있었고, 여전히 감정이 복잡하기는 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게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내 주변의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을 바라는 거겠지.
“난 널 무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러면…, 날 좋아하게 됐어?”
그녀는 매일 꽃 한 송이를 따왔다. 내가 자고 있을 때는 문턱에 두기도 하고, 가끔은 까먹었다며 웃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루가 지나기 전에는 꽃 한 송이를 따왔었다.
천하무쌍이 이렇게 약해졌다.
지금의 그녀는 다리를 떨며 겁을 먹고 있었다. 그 누가 천하무쌍이라 이름 높은 무인을 겁먹게 할 수 있던가.
감정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저주인가. 사람을 속박하여 굴복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것인가. 그렇기에 여포라는 여인은 저리 약해진 것인가.
“…아니.”
이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속이는 건 복양성에서의 일로도 충분했다. 그 이상으로 그녀를 속여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여포는 내 곁에 두면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 무력은 분명 장차 조조군에서 중추로 서기까지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고, 그렇기에 사마의도 내게 여포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했던 것.
감언이설을 뱉을 수 있었다.
눈 꼭 감고 사랑하노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그 힘을 얻는다. 그렇게 감정을 사슬로 이어 그녀를 내 곁에 묶어두면 그만이었다.
할 수 있겠냐, 그런 더러운 짓.
“……그렇겠지?”
그녀는 웃었다.
웃는 얼굴이었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화창한 오후 날씨에 땅을 적시는 비가 그녀의 뺨을 적신다.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은 분명 빗줄기다.
그녀를 검게 드리우는 먹구름에서 내리는 비.
“나, 노력했어.”
“알아.”
익숙하지도 않은 집안일을 하겠답시고 몇 번이나 고생했던 것을 기억했다. 바느질을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손가락을 붉게 수놓았던 것도, 반찬도 짜거나 쓰고 가끔은 떫었던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보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기억도 아파.”
아프다고.
그녀는 계속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그녀를 속여 기만하는 건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앞으로 같이 걸어가고자 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 애정이 여포를 아프게 한다면. 보답 받지 못하는 애정이 언제까지나 그녀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괴롭힐 따름이라면, 내가 그것에 답하는 게 맞았다.
“여포.”
“…미안해. 지금은 혼자 놔둬. 그러면 다 잊을 테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주인이 몸종이 되어서, …그래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어느새 손만 뻗으면 서로를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서 있었다. 이 좁혀진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좁혀졌으면 좋으련만. 거칠게 살았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에 둔한 여자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이 헌신에.
물씬 우러나오는 감정에 보답해줄 수 있을까.
“혼자 놔둬? 미쳤냐.”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음의 거리는 아직 멀었다. 우리의 감정은 여전히 제각각 따로 놀고 있었다. 여전히 내게 여포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먼저 떠올랐다.
아직은 그녀에게 보답할 수 없었다.
“주인아, 이거 놔.”
“싫어.”
지금 놓치면 영영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뒤에 그녀가 다시 이렇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여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그런 확신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를 붙잡는다.
내가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면, 그 감정이 보답 받지 못해 곪아가고 있다면 그것을 내가 채워주겠다. 거짓으로 그녀를 달랠 수 없겠지만, 그녀가 진심이라면 이제 나도 진심으로 마주할 때가 되었다.
어쩌면 그간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것이리라.
여포에게나 운이에게마저도.
“아직 널 좋아한다는 확신은 없어.”
“…알아, 아니까…!!”
“잠자코 들어.”
분명 힘은 나보다 더 강할 여자의 몸부림을 쉽게 억눌렀다. 원래라면 당연히 뿌리치면 내가 휘청거려야 정상인데, 지금 그녀의 몸짓은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물론 당장 호감이 생긴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그런 기만으로 속일 생각도 없고, 속이고 싶지도 않아.”
붙잡은 팔을 살짝 당겼다.
여포는 힘없이 딸려와 내 품에 안겼고, 그런 그녀를 반대편 손으로 살짝 감싸며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렇지만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약속이자 맹세였다.
나로 인해 약해졌다면, 그녀가 나로 인해 괴로워한다면 그것을 채워주겠다. 그렇지만 이건 반드시 이뤄질 미래라고 다짐했다.
그야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데.
“노력한다는 말도 안 할게.”
그런 마음에 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사실 이런 말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해야 하지만. 그래도 약속할 수 있어. 난 분명 널 좋아하게 될 거야.”
“……멍청이.”
“그러니까 그런 표정 그만 지어.”
복양성에서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여서 가슴 한편이 쓰렸다. 내가 모든 걸 빼앗았던 순간. 마지막에 좌절하여 오열하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싫었다.
“……그게 뭐야. 내가 아무리 모르긴 해도, 주인이가 방금 한 말은 절대로 고백 아냐. 그딴 고백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야 없겠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할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내 안에 남은 말. 그녀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자 진실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저리가 나 떠나겠다고 하면 놓아줄 생각이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이런 말 들으면 상대가 누구건 간에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뺨을 올려붙일 자신도 있었다.
“싫다고 할 거면 지금이야.”
픽 웃으며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만약 여기서 수긍하면 그걸로 끝이야.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게 되면, 그때는 네가 싫다고 울고불고 빌어도 절대 안 놔줄 거니까.”
이것 또한 진실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간 너무 참았던 게 많았다. 자리가 자리라고, 상황이 상황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감정을 죽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어떻게든 복잡해지는 걸 피하려고 했던 경향이 컸다.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조금 더 직설적이고, 조금 더 감정에 솔직했는데. 점점 높은 자리에 올라가며 다소 진중하고 신중함이 필요하겠다며 원래 성향을 깎아내렸다.
깎고, 깎고, 또 깎아내리면서.
그러면서 같이 깎여나갈 수밖에 없었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했다. 여포의 일도 그 과정에서 생긴 감정의 소모와 공허함이겠지.
“……어떻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빨갛게 눈매를 붉히고 올려다보는 시선을 올곧게 마주한다.
“어떻게, 붙잡을 거야?”
“……어….”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곤란한데. 그냥 속에서 나온 말을 내뱉었을 뿐이지, 그걸 어떻게 형태로 표출해낼까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
“주인이는 날 어떻게 하고 싶어?”
“……아마 나 없이는 못살 게 만들겠지.”
“…어떻게?”
울다가 웃으면 어떡하냐.
빌어먹을. 왜 눈매가 새빨갛게 부어올라서 웃는데, 그 얼굴도 예뻐 보이냐. 눈물만이 아니라 콧물도 살짝 흘리면서, 여전히 색색 울먹이고 있는데 유독 그 표정이 매력적으로 비쳤다.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그랬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픽 웃더니, 이내 양손을 천천히 뻗어 내 멱살을 꽉 부여잡았다.
틀어 쥐인 멱살에 끌어안은 팔이 풀릴 즘, 그녀는 그 특유의 뾰족한 햐얀 이를 훤히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내 멱살을 당겼다.
“못 기다려.”
입술이 맞닿았다.
기세와는 다르게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뿐인 입맞춤. 부드럽게 내 입술을 덮는 그녀의 감촉에 살짝 몸에서 힘을 빼고 그 허리에 손을 둘렀다.
잠시.
어쩌면 길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그렇게 입술이 떨어졌을 즘.
“내 성깔은 이런 게 아니었어. 계집애처럼 울면서 매달리는 거? 하도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려니까 나답지도 않은 짓을 해버렸네.”
여전히 눈가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할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분명 여포 본연의 모습이었다.
“주인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잖아?”
그도 그렇지.
나였으면 진작에 뺨을 올려붙였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내 식으로 해야겠어.”
그녀는 말했다.
자신에게 반하게 해주겠다고.
정말 당연하게,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며 지금 당장에라도 자기 자신에게 반하게 해주겠다며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닥치고 그, 자지나 까라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조금….”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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