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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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군의 중간 거점. 그곳에 자리를 만들고 이튿날 마주하기로 했고, 솔직히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벌써 당일이 되었다.
“…그냥 내가 혼자 할게.”
아가씨는 마지막까지 내 손목을 잡았다.
전풍.
그 남자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애당초 전부터 이 일은 내가 주도하여 나서는 게 옳다고 합의한 상황이었다.
아가씨는 조조군 내에서도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원소군에서도 얼추 파악하고 있을 일. 차후 문제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내가 독단적으로 거절하는 모양새로 나가는 게 맞았다.
“문제없어. 아씨는 보고만 계쇼.”
그가 준 호패가 아직 내 품 안에 있었다.
전호.
잊으려 했던 이름. 그러나 조조를 따라 군을 움직이며 언제까지나 호세라 지칭하고 다닐 수만도 없는 노릇이어서 받아들였던 이름이었다.
전풍은 나를 아들이라 불렀다.
내게 그 남자는 어떤 의미일까.
몇 번을 생각해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억지로 잊으려 했던 적도 있었고, 사실상 아씨를 따라 병주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잊고 지냈던 이름이었다.
“이런 일로 실수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물론 아가씨가 내 실수를 걱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을 포함하여 그녀가 걱정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네가 실수할 걸 생각하는 게 아니야.”
내 손목을 붙잡은 아가씨의 손아귀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감정이라는 건 언뜻 안 그래 보여도 총량이 있어. 조금씩, 조금씩. 부딪치고 흔들릴수록 마모되고 소모되는 게 감정이야.”
그런 걸 생각했던 적은 없었는데.
소연 아씨는 굉장히 진지한 태도였다.
“너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오히려 너무 태연함을 연기하는 것처럼도 보여. 되려 괜찮노라고. 오히려 의식해서 긴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니?”
“…그건, 뭐. 음. 부정하긴 힘드네.”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기 전.
아직 유소년기의 추억은 전부 전풍을 비롯해 그 가문에서의 기억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잊고자 했지만, 여전히 그 추억의 잔재는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
최근에야 무뚝뚝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당장 어릴 적 기억의 단편 중에는 그 남자가 웃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는 모습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남자가 남으라고 했을 때.
그때도 필요 이상으로 격하게 반응하기도 했지. 솔직히 말하면 관직을 권유했을 따름이고, 어투에 문제가 있을지언정 그렇게 격하게 대응할 필요도 없었다.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해야만 하는 거니까.”
아버지라고.
예전에는 그렇게 불렀었던 적도 있었다.
돌아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과거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전호라는 이름을 버렸을 적부터.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을 다시 줍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는 보고만 있어.”
“호세, 정말 괜찮겠어?”
아직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두근거리며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빠른 고동으로 몸에 퍼지는 울림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내가 실수하면, 그때는 아씨가 말려주고.”
감정적으로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물론 어차피 이 자리를 기점으로 원소와는 척을 지게 될 상황. 최대한 무마하기는 하겠지만, 황제 폐하를 넘겨줄 의향이 없는 조조군의 행보를 원소가 어떻게 볼까.
당장 양군이 전투로 번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적대할 날도 오겠지. 이제부터는 명목상 동맹이었던 관계에서도 넘어서 정말 잠재적인 적으로 변하게 될 자리였다.
그러면 언젠가는 전풍과도 적으로 만날런가.
벌써 저 앞으로는 간이로 설치해둔 막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물러설 곳도 없었고, 솔직히 말해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과거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갑시다.”
다른 이들에게는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군을 준비하고 언제든 출격할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원소의 병사가 열을 맞춰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동한 아군을 그 인근에 대기하게 해두고 천천히 걸어가 중앙 막사로 들어갔다.
“왔는가.”
전풍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살짝 주름진 얼굴. 허옇게 센 머리가 군데군데 보여 전체적으로 회색빛 느낌을 주었다. 노화라는 건 참 신기한 것이 누군가는 유소년기의 나이에 멈추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백발의 장정까지 계속 늙어가기도 했다.
지금 보기에 그는 단연 후자였다.
어릴 적 본 듬직한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도 지금은 세월에 못 이겨 다소 왜소하게 굽어 사뭇 괴리감으로 다가왔다. 기주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는 감정이 복잡해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비친다.
아가씨가 내 오른팔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제야 막사 입구에 멍하니 서 있던 것을 깨닫고 천천히 전풍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나갔다.
아가씨도 옆에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 시선을 살짝 돌렸다. 전풍과 그 옆에 앉은 남자는 안량인가. 과연 원소군의 상장이라 불리는 남자인 만큼 가만히만 있어도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소연 별가, …전호 군승. 오랜만이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소연 아씨는 전풍의 첫마디에 살짝 고개를 숙여 대응했다. 나도 적당히 따라 고개를 숙였고, 그러면서 살짝 상대의 낯빛을 살폈다.
전풍은 생각보다 평안한 얼굴이었지만, 반대로 안량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안이라.”
전풍은 그 말에 픽 웃었다.
“지금 아군이 평안치 않을 것은 소연 별가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인데? 타지에서 이리 장기간 대기하는 병사의 노고를 모르시진 않을 것이고.”
“그거라면 통솔권은 제게 있습니다만.”
그 말을 살짝 끊고 들어갔다.
모든 건 내 주도하에 움직였다고 해두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편했다. 지금 원소군을 가로막은 행위가 조조군의 총의라고 만천하에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별가께서는 단지 아군의 지원을 위해 방문해주신 것이고, 그 외의 군사적인 판단과 행동은 제가 역임하고 있으니 이 자리의 책임자도 접니다.”
“…별가가 있는데 구태여 군승이?”
“하내 태수 장공의 군사와 주변에서 합류한 민병과의 합의점은 제가 맺었습니다. 그러니 군의 통솔권을 제가 잡는 것이 뭐 이상할 게 있습니까?”
구태여 백파적이라고 공언할 필요는 없기에 민병이라고 둘러댔다. 솔직히 백파적 무리는 여전히 이 근방에서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구태여 책 잡힐 거리는 내어주지 않는 게 맞았다.
그 말에 전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궤변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행동 자체가 억지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아무것도 안 해놓고 이제야 황제 폐하를 날름 집어삼킬 생각으로 온 원소군이라고 퍽 잘났을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물론이요, 저들도 모두. 저마다 이권을 놓고 싸우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전풍과의 일은 여전히 내 안에서 미처 소화하지 못한 여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면 듣지요. 원소군은 황제 폐하의 고난에 힘을 보태고자 이리 먼 길을 왔는데, 그걸 가로막는 것은 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저는 군령에 따를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낙양으로 향하셨으나 여전히 천하 정세는 혼란. 그렇기에 그 뒤를 지키기 위한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
모르겠고. 나는 그저 군령에 따를 뿐이다.
애당초 원소가 현 황제를 만천하에 부정한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 군을 몰고 온다면 그 누가 순수한 의도라고 믿겠나.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혼란하기에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요. 여전히 사예주 인근의 치안은 안정치 않으니 호위할 병력을 강화할 필요도 있지 않겠소?”
“혼란하니까 그렇습니다.”
슬쩍 말을 흘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누가 역적인지 헤아릴 길이 없지요.”
그 순간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탁자였는데도 전체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세게 내리친 안량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원공의 군을 역적이라 모는 것이요?”
“상황이 파악되기 전까진 누구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원공이 아니라 황가의 인물이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니.”
“이 애새끼가!!!”
칼집에서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렇다 할 대응을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런 회담 자리는 무장하지 않고 오는 것이 관례가 아니던가?
어쩌면 그만큼 조조군을 얕봤을지도 모르지.
“안량 장군. 진정하시지요.”
“선생, 저 무례한 자식이 원공을 모욕했소이다! 역적? 그러면 황제 폐하를 감추고 있는 네놈들이야말로 역적이 아니냐!!”
그 말에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소장은 지금껏 황제 폐하를 위해 장안의 역적과 다투었습니다. 그 사안이 해결되고 드디어 황제 폐하께서 낙양으로 향하신 지금, 되려 군을 몰고 이리 겁박하시니 자칫 원공의 본의가 흐려질까 두렵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놓고 원소를 비난할 수 없기에 살짝 말을 돌렸다. 안량의 얼굴이 시뻘게진 것과는 별개로 전풍은 제법 차분한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었소. 하지만 현 사태가 국난이라고 보아 무방한 것인데, 한 황실의 신하가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어떨까 싶소만.”
“그러면 사태가 얼추 진정되고 가라앉은 뒤에 공식적으로 청하십시오. 전 단지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어차피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회담을 연 것도 이 발언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설령 이것이 문제가 되었기로서니 원소가 대놓고 조조와 척을 질 수도 없었다.
공손찬은 여전히 건재했다.
소연 아씨의 말에 따르면 최근 재정이 악화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군의 모병만큼은 꾸준히 행한다고 들었다.
군의 강력함이라면 천하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이 공손찬인데, 최근 좀 부침이 있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왕성한 세력을 자랑한다고.
그런 이들과 대치하면서 후방의 조조와 척을 진다?
원소가 미치기라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거라며 소연 아씨가 확신했고,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원공의 군을 통과시킬 수 없다. 이것을 연주목의 의사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동맹인 아군과 척을 지겠다는 뜻이 될 수 있는 사인이요.”
“소장은 그저 명받았을 뿐입니다.”
원소의 움직임은 사전에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소연 아씨도 모르고 있었노라고 한다면 그게 사전에 연락한 움직임은 아닐 터.
“긴급한 사안이기에 원공께서 서둘러 군을 움직이신 것이요. 알다시피 북방의 역적과 다투는 와중에도 폐하를 위해 급히 움직인 것인데, 그걸 연주 동군의 군승이 가로막는다면 어떤 의미가 되겠소.”
급하게?
전풍의 말도 모순이었다.
이 사태가 벌어지고 황제 폐하의 곁에서 한 달 가까이 동행했었다. 정말 군을 급하게 움직였다면, 이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사전에 움직임이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러시면 우선 황제 폐하께서 낙양에 입성하시어 주변이 안정된 다음에 정식으로 알현을 신청하시면 그만입니다.”
뭐하러 장안의 추격대를 다 물리친 지금, 구태여 군까지 이끌고 낙양으로 향하려 하느냐. 정말 충심으로만 행동한 거라면 사태가 안정된 상황에서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전풍 선생! 더 말할 필요도 없겠소. 이놈들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오! 더 말할 필요도 없겠소이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시뻘게질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아오른 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풍을 돌아보고 있었다.
전풍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이쪽을, 정확히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역정을 내는 안량을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군. 제가 조금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우선 호위군을 준비하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선생, 혼자 괜찮으시겠소?”
전풍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못내 불편한 기색으로 이쪽을 노려보고는 콧바람을 크게 뿜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쪽도 혹시 모르니 군을 준비하여야 하지 않으시겠소? 소연 별가. 미안하지만 이번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좋겠는데.”
아씨는 답하지 않았다.
전풍이 왜 갑자기 나와 독대를 청하는가. 거절해야 할까? 이 자리에서 융통성 없는 장수로 밀고 나가야 했으니 구태여 허락할 이유는 없었다.
“…아씨, 잠시만.”
하지만 응하기로 했다.
아씨는 살짝 나와 전풍을 번갈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에서 떠났다. 그리하여 자리에 남은 건 전풍과 나.
단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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