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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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대로 돌아가기 전에 병사를 보내 장양 태수도 불러줄래? 아무래도 퇴각하면 그 부대와 발을 맞춰야 할 테니까 미리 상의는 해둬야지.”
“그럴 테니까, 잠깐 앉아서 눈 좀 붙여요.”
운이는 천천히 다가와 내 어깨를 살짝 눌렀다. 그리 강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내 무릎은 자연스럽게 굽혀져 상자 위에 걸터앉게 되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에 손바닥 안에 갇혀 얼굴까지 전해졌다.
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밤에 퇴각하는 건 불안요소가 많아 신경 쓸 것도 많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다.
조금만 눈을 감고 있자.
눈을 감기만 해도 조금 전 소연 아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짝 홍조가 서린 볼. 빤히 이쪽을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와 가녀린 얼굴의 선. 그 선홍빛 입술도 전부.
전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오, 썅.”
결국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계속 앉아있다가는 뒤숭숭하니 복잡한 심경이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어 근처에 떨어진 병장을 줍고 다녔다.
“…장군, 뭐하시오?”
그 행동을 장양이 도착할 때까지 반복했다.
“이게 다 돈입니다.”
할 말이 궁색하여 뻘쭘한 말이나 내뱉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 다 돈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걸? 물론 사령관이 할 짓은 아니겠지만.
“장군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이게 전부 아씨 때문이었다.
사람을 자꾸 뒤흔드니까. 감정도 없다면서 그렇게 남자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골라서 하니까 자꾸 착각할 뻔하잖아. 하여간 예쁜 값을 한다고 해야 할까?
“퇴각한다고 들었소만.”
손에 쥔 것을 주변에 모아두고 고개를 들었다.
“반대하십니까?”
“그럴 이유도 없지 않소? 딱 좋은 기회기는 하오. 단지 이각이 이 야간을 틈타 움직이고 있다면 되려 외통수가 되지 않겠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서 죽치고 있어도 전력에서 이각에게 밀릴 뿐. 이번에 승리한 것도 소연 아씨가 시기적절하게 도착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움직여야죠.”
앞으로 큰 언덕 하나 넘으면 그 뒤로는 일직선의 가도. 폐하를 모신 것도 아니니 부상병을 호송한다고 해도 이각에게 붙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이 밤이 문제였다.
“일단 소식을 듣고 군에게 준비하라 일러두긴 하였소. 그런데 동승은 정말 괜찮겠소? 혹여나 함곡관에서….”
“거기까지만 하시죠.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동승이 함곡관을 걸어 잠그고 아군을 이각의 군과 옥쇄하도록 유도하는 것. 동승에게는 황제의 시선을 분산시킬 방해물도 사라지면서 이각의 추격도 막을 수 있었다. 더러운 방식이었지만 최선의 수단이긴 했다.
반대로 아군은 그대로 땅에 묻히겠지.
장양은 실제로 동승을 황제와 먼저 보낼 당시에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당장 그때는 다른 수단도 없었다.
소연 아씨의 합류는 전혀 예상외의 사건.
그 당시에는 계속 군이 밀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황제 폐하까지 말려들면 그 안전을 담보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는 그게 맞았다.
“우선은 최대한 빨리 함곡관에….”
“아니요.”
순간 장양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끌고 온 기병대를 준비시키러 갔다던 소연 아씨가 장양의 뒤편에서 다가오며 살짝 손을 내젓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다른 수단을 생각하죠.”
소연 아씨는 빠른 걸음으로 이쪽에 다가와 내 옆에 서서는 장양을 마주 보았다. 장양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말을 머뭇거릴 때, 소연 아씨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야간에 퇴각하는 건 영 불안하지 않니?”
“그야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이대로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듣자 하니 동승이 황제 폐하를 모시고 선행했다며? 장양 태수님도 그 건에 대해 고심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그건 그렇소만.”
“그러면 답은 간단하지요.”
소연 아씨는 손에 쥔 지휘봉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평소의 그 자신만만한 표정에서는 아까까지의 묘한 분위기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당당하게 웃는다.
“이 기회에 이각군의 추격 의지를 꺾어버리죠.”
말처럼 쉬이 꺾였으면 이 고생도 안 했다. 이각과 곽사, 둘 모두에게 황제는 분명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수단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대규모 추격대를 편성해서 끈질기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밤이 불안하다? 어둠은 평등해요. 저희가 어두우면 상대도 어두울 것이고, 상대의 추격이 걱정된다면 아예 매복하고 물리치죠.”
“아씨, 그건 진작에 생각해봤지.”
하지만 이 근방에는 이렇다 할 매복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기껏 매복하였는데 이각이 그 밤을 조용히 보낸다면 아군은 절호의 기회를 그저 공칠 수밖에 없었다.
기회비용보다 부담이 너무 컸다.
“뭐가 문제니?”
“우선 군을 숨길 곳도 마땅찮아. 게다가 매복하고 있는 건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 전장에 발이 묶일 수도 있잖아.”
그 말에 그녀는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없니? 이 앞에 구릉이 있잖니? 그 위에서 불을 끄고 준비한다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에게 들킬 이유는 없잖아.”
언덕 위에 매복한다?
하지만 아군에게 활을 다룰 수 있는 병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기존에 내가 이끌던 부대는 전부 기병이었고, 기껏해야 조홍 장군이 이끌고 온 부대와 장양의 부대, 그리고 백파적 중에서 몇이 될까.
고지대를 잡는다 하여도 이점이….
아니, 잠깐만.
생각을 반대로 전환하자.
아군에게는 궁수가 부족했다. 하지만 반대로 기병 전력만은 충실하다 못해 소연 아씨까지 합류하였기에 과도할 정도로 포진되어 있었다.
기병으로 언덕의 사선에서 대기하다가 적 추격대가 야간을 틈타 고지를 오르려 할 때, 그때 돌격한다면.
만약 오지 않아도 문제는 없었다.
“혹시 기병이요?”
“바로 그거야.”
미리 보병은 함곡관으로 계속 진군시킨다. 만약 추격대가 오지 않는다 하여도 기병의 기동력이라면 그 정도의 시간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장양은 소연 아씨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되오. 야간이라면 밤눈 어두운 말들이 어찌 제대로 움직이겠소?? 그건 하책 중 하책이요.”
“불을 지르죠. 미리 언덕 주변을 빙 둘러 군마용 건초를 잔뜩 쌓고 불을 지른다면? 물론 그런다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이것보다 깔끔한 방식이 있는지요?”
그 준비에도 분명 시간은 걸린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한다면 빠듯하게 어떻게든 가능할 것도 같았다. 게다가 사방에 불이 번지는 와중에 언덕 위에서 기병이 내리꽂는다?
직접적인 전투를 몇 번 치르지 않더라도 적을 꽁지 빠지라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지간한 불이 아니라면 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가 존재했다.
훈련된 군마이니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시도해 나쁠 건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기병 전력 전부를 내다 버릴 수도 있소. 전호 장군, 이건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할 문제요.”
“호세.”
그녀는 부드럽게 날 불렀다.
“…합시다.”
이 이상의 좋은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 * *
다 불타 이제는 잔재와 부랑자뿐인 도시.
그 이름 낙양.
조조는 그 잔재를 바라보며 다소 생각에 잠겼다. 반동탁 연합군 당시 불타 무너져내리던 황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었던가.
그리고 지금은?
그때 느꼈던 감정이 느껴지는가?
저 자신에게 건넨 질문에 조조는 픽 웃었다. 같을 리가 없었다. 그때와는 상황도 달랐고 가진 것도 달랐다. 가지고 있는 감정도, 지향하는 목표도 전부 달랐다.
제국의 몰락인가 하여 감상에 젖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그 잿더미뿐이 남지 않은 낙양을 바라보아도 그저 폐허라는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제국에 대한 감정도 식어버렸다.
“본인이 다시 이 땅을 밟는 건 먼 훗날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이리 빨리도 낙양에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전혀 수습도 안 됐네.”
하후돈은 그 광경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거 보았던 황궁이 얼마나 장엄하고 화려했던가. 그 웅장함은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하게 발전한 수도의 영광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조조는 무감각한 눈으로 그 폐허를 훑었다.
이 풍경은 제국 몰락의 상징이었다.
화려했던 수도는 이미 불타 사그라졌고 남은 건 오직 잿빛으로 물든 폐허. 이게 이 한 제국의 현주소였다.
“하후돈, 이렇게 제국은 멸망할 것 같은가?”
“설마. 그래도 한인데.”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보고 조조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제국은 무너졌다.
이미 기간과 근본 자체가 박살이 난 것인데,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한이라는 기둥 작가가 흔들리기 시작한 이상 한 자체를 되살리는 것은 부수는 것보다 훨씬 지난할 따름이었다.
정작 조조도 한을 되살릴 생각이 없었다.
무너져버린 한은 어떤 의미로 딱 입맛에 맞았다. 이제부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천하를 다시 색칠하기 딱 좋지 않은가.
“이미 다 망가져 가는 옛것을 고침에 의미는 있는가. 원양. 차라리 무너진 것은 새로 만드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근데 이미 하던 게 있는데 그게 쉽게 바뀔까. 맹덕, 너도 그렇게 낙양에서 고생하고 그 고지식한 늙은이들을 까먹었어? 황제 폐하를 모셔도 한은 쉽게 못 바꿀 거라 보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말한 요점은 전혀 달랐다.
왜 구태여 한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 한 자체가 낡고 병들어 망가져 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하후돈은 그녀가 한을 재건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정작 그녀는 한이라는 과거를 통째로 부정할 생각이었다.
“뭐,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다.”
조조는 반론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일이었고, 장차 그녀가 더 나아가 천하 누구보다 크고 강한 권력을 얻지 못하면 시작조차 불가능한 대업이었다.
황제의 감투.
그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 제국을 구성하는 전부를 집어삼킨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는 대업이 아닌가.
아랫배가 살살 떨릴 정도로 희열을 느꼈다.
이 대륙 전토에 조조의 이름을 새긴다. 이 드넓은 땅 전체에 검은 깃발을 꽂고 만천하를 꿇리는 건 천하의 욕심쟁이 아만에게는 군침이 도는 일이었다.
“우선 이 부근에 주둔하지.”
벌써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진군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하후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그가 임시로 주둔할 진을 구축할 동안 조조는 멍하니 낙양의 잔재를 바라보았다.
한은 여기서 끝났다.
만약 황제를 손에 넣는다면 무엇부터 할까.
이용할 방법은 많았다. 전호를 비롯하여 그 휘하의 무장, 그리고 진소연까지 향했으니 적어도 황제가 죽을 일은 없을 터.
“파리는 좀 꼬였을지도 모르겠군.”
여기서 황제를 옹립하면 타 제후의 공공의 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것을 웃돌 명분과 정당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습군.”
한 황실에 충성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이제는 제 욕심과 권력을 위해 검을 쥐고 피를 흩뿌린다. 그러니 어찌 된 노릇인지, 과거 황실을 위해 그렇게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것이 하나둘씩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한때 황제를 구하고자 필사적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 황실에 어떠한 감정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황제가 그녀의 손아귀에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장난이라면 나쁘지 않다.”
이런 장난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조조군은 낙양 인근에 야영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어디쯤 왔을런가. 예전에 보았을 때는 정말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 어린 황제에게 동정도 했다.
지금은?
어리면 어릴수록 이용하기 딱 좋았다.
이래서야 권신이 따로 없고, 간웅이 따로 없었다. 그런 우스운 상상을 하면서도 조조는 잿더미가 된 낙양에서 당분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회한은 여기에 두고 간다.
과거 제국을 위해 살았던 조조의 마음도, 그 후회도. 이루고자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했던 그 좌절감과 분함도 전부 두고 가겠다.
이젠 필요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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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200편은 자화자축, 그렇지만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독자님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