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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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세가 전처럼 날카롭다고는 해도 여전히 아군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고, 저 멀리에서 원정을 나온 입장이기에 미리 선수만 잡으면 백파적까지 흡수하여 몸집을 불린 아군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본대는 여전히 건재하겠지. 방심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함곡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버티면 관문을 끼고 더 수월하게 추격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황제를 낙양으로 보낼 수 있을 일.
그러던 와중에 이번에는 황제가 직접 호출하였다. 사실 백파적의 건 이후로 공적인 자리에서 딱히 언질이 없어 언젠가는 부르리라 생각했었다.
소녀는 저 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는가.”
“예, 폐하.”
간이로 만들어둔 상석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통제 없이 유혈사태가 일어난 것이니 어떻게든 구설에 오를 건 예상했었다. 사실 지금까지 부르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인데, 그건 그 이후로 전투가 연이어 이어졌기 때문일까.
“그래, 이번에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노라.”
추격대의 얘기일까, 아니면 백파적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어느 쪽이건 이 소녀가 확정하지 않았으니 답하기 영 껄끄러웠다.
“분에 안 맞는 과찬이옵니다.”
우선 고개를 숙였다.
“이번 전투, 훌륭한 공적이었노라고 보고는 받았다. 백파적과 합심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은 있는가?”
“필요에 의한 일이었사옵니다.”
고개를 들지 않아 황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과거 이 어린 소녀를 겁박한 것도 백파적. 필요하여 무마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칫 반감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전부 알면서 했던 일이다.
내 일은 폐하를 무사히 낙양까지 호위하는 일. 그러하면 내가 구태여 황제 폐하의 호감을 살 필요는 없었다. 나머지는 조조의 역량과 임무.
그렇지만 조금 찔리는 건 어째서일까.
“…하아.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동승이 최근에 말이 많아졌느니. 귀하여, 소녀는 별말 않겠다마는 주변의 시선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별말 않겠다는 건 우선 백파적의 문제는 넘어가겠다는 소리인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황제는 아무래도 그 너머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소녀가 황궁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노라. 모난 돌은 언젠가 반드시 그 모난 부분이 깎여나갈 때까지 두드려 맞는다. 깨질 때까지 계속 짓밟히고 두들겨 그것이 몰락할 때까지 적대는 멈추지 않는 것이니.”
“연주목이 낙양으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군승인 제 임무는 황제 폐하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 그 소관만 다할 수 있다면 적이 몇이건 전부 물리칠 따름이옵니다.”
만약 동승이 그 길을 가로막아서면서까지 아군을 적대한다면 그 본인도. 물론 그때는 황제 폐하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으나, 필요하다면 행할 자신은 있었다.
“외골수로구나.”
소녀는 픽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여긴 아무도 없노라. 이리 오도록.”
황제는 종종 나를 그녀의 곁에 앉히고는 했다. 그간 황궁에서 홀로 동탁과 이각, 곽사 등의 권신에게 농락당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행동은 사람의 따스함을 필요로 하는 작은 새처럼도 보였다. 불경한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그리 느껴버렸다.
“동승은 만만한 이가 아닐 것인데.”
“연주목 조조 또한 만만하지 않사옵니다.”
그 말에 소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소녀는 연주목이 아닌 귀하를 걱정하는 것이다. 귀하 또한 장차 황제인 짐을, 이 소녀를 보좌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좌라.
고작 군승인 내가 정계에 진출할 일도 없었다.
만약 황제 폐하가 낙양에 머문다고 가정한다면 다시 연주로 돌아갈 나와는 무관했고, 연주나 예주로 거처를 옮긴다 하여도 천생 무관인 내가 정계에 입문할 일은 없으리라.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폐하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서 일하겠사옵니다. 이것도 그 일환, 언젠가 폐하의 기반이 닦일 때까지는 무엇이든 다 해 보여야지요.”
“…그리 말한 이는 많았다.”
소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탁도 그리했고, 이각과 곽사. 하다못해 저 동승도 그리 말했지. 귀하는 그런 이들과 다르다고 진정 확실할 수 있겠느냐.”
사실 이 일이 끝나면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머지 일은 전부 조조와 소연 아씨에게 맡기면 끝날 일.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귀하는 소녀를 뒤흔드는구나.”
황제는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 연약한 황제의 호감을 사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소녀는 그저 감투다. 힘 있는 강자들이 제 위신을 높이기 위해 황제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폐하.”
“귀하가 그 도적놈들을 아래에 꿇렸다고. 그것이야 불문에 부칠 수 있다. 귀하는 그 도적들의 폐단 이상으로 짐을 위해, 이 소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노니.”
그저 평소처럼, 단지 조금의 예의를 차리고자 했던 게 이 소녀 황제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공무라고 생각했고, 또한 이 어린 소녀가 곤룡포를 두른 것에 다소 연민을 느꼈을 뿐.
“언젠가 귀하가 권신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소녀는 귀하에게 말하고 싶으니, 귀하는 처음 소녀를 만났을 때 말했었다.”
황제는 정확히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짐을 겁박하는 이, 모욕하는 이. …그리고 이용하려 드는 이. 그 모두를 벌하겠노라고. 그 마음가짐, 잊지 않을 자신이 있겠느냐.”
“……황명이라 하옵신다면.”
“소녀는 귀하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귀하가 권신이 된다면 다소 적적할 것 같아. 이 말의 뜻, 새길 수 있겠느냐.”
권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권력의 최상단에 올라 그것을 휘두르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부리며 만인의 위에 선다.
조조와 소연 아씨가 있다면 내가 그런 역할까지 맡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딱히 그런 자리에 욕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답하기 곤란했다.
아무리 소녀가 왜소하고 작다 하여도 황제는 황제였다. 그간 궁정에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고, 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소녀는 여전히 무감각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얽힌 의미를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가끔 만났을 때 주고받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을 따름.
장차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소장, 권신이 될 그릇은 못 되옵니다.”
“그러면 동탁, 그 천하의 무뢰한은 그럴 그릇이더냐. 이각과 곽사, 그 도적놈들이 그럴 그릇인가? 현시대에 권신이란 그저 황제보다 힘 있는 자. 자격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네.
사실 동탁을 비롯해 거론한 이들을 직접 만난 것도 아니라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단지 이 사달을 낸 것을 보아 그 그릇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한데.
“아니지, 소녀가 이리 말한다고 면전에 권신이 되겠다 하는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겠지. 이건 소녀가 귀하에게 실례를 저질렀구나.”
“실례라니요.”
고개를 가로저으니 소녀가 픽 웃었다.
“아무튼, 할 말은 끝났노라. 그대가 백파적을 포섭한 건에 대해 동승의 말이 많아졌으니, 그 부분에서는 그와 잘 조율할 수 있도록.”
“명, 받들겠나이다.”
솔직히 그 양반이랑은 뭔가 좀 맞질 않았다.
지금도 살살 아군을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행동이 보여 아니꼬웠는데, 그 양반이랑 조율? 차라리 겁박하여 꿇리는 게 더 쉽지 않을까.
하지만 황제의 명이라면 받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람은 저래도 황제를 장안에서 빼내어 모신 공이 있었다.
“물러가도록. 짐은 좀 쉬어야겠느니.”
그 손짓에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등을 돌리며 힐끗 보인 시야에 비친 황제는 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 정세는 황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어쩌면 급격하게 세를 불린 아군 역시 황제를 고민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황제도 슬슬 아군을 견제하려나.
그러면 조금 슬프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조조가 합류한다면 그때부터 황제를 상대하는 일은 그녀나 소연 아씨에게 넘어갈 터.
그때까지는 내 소관을 다할 뿐이었다.
* * *
“상시는 어떻게 보느냐?”
황제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앉은 상석 뒤 그림자에 숨어있던 내관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전호와 유협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줄곧 숨죽이며 그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앞에 나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으로는 뭐라고도 판단하기 힘들 듯 사료되옵니다. 어찌 되었건 저 남자가 폐하를 모시는 군단 중 가장 으뜸가는 전력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기도 하옵니다.”
“믿을만한 근거는?”
그 말에 상시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간 그는 폐하의 직접적인 부름이 없으면 알현하러 찾아뵙지 않았사옵니다. 적어도 폐하의 권위에 빌붙는 간신배는 아닐 것처럼도 보입니다마는, 아직 기간이 짧사옵니다.”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예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동승처럼 매일같이 황제를 찾아 제 공을 떠벌리거나 다른 이의 험담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그 인간의 전부를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유협도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할지라도 한 편의 기대를 품게 되는 건 어린 나이에 같은 편이 없었던 탓일까.
그 남자는 자신의 편이길 바랐다.
“그러한가.”
“하지만 그 군사력. 거기에 휘하에 여포를 비롯해 쟁쟁한 무장들을 거느리고 있는 강군이니, 적어도 폐하께 도움은 되는 인물이옵니다.”
그것이 낙양에 도착한 이후에는?
적어도 이각과 곽가가 보낸 추격대를 물리치기에는 합당한 사냥개였다. 하지만 그게 낙양에 도착하면 어찌 변할까. 사냥개가 주인을 무는 건 이 난세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상시는 그를 믿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용할 사냥개. 유협은 홀연히 등장한 그에게 적잖이 마음을 동했지만, 그걸 객관적으로 바라본 상시는 영 떨떠름하게만 느껴졌다.
더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도움, 도움이라.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적어도 소녀가 보기에 상시가 걱정하는 것만큼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유협 본인도 자신의 경험이 미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편이기를 바랐다.
그런 남자가 수족이라면 조금은 마음의 위안은 되지 않을까. 돌아가신 어미는 소녀에게 황제란 고독한 자리이노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런 외로운 자리에 위안 삼을 기둥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라면 그런 무장도 휘하에 거느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것이 본래 모습이 아니던가. 물론 현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니 그런 그림을 그리는 건 앞으로도 먼 훗날이 될 터.
지금은 살아남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우스웠다.
“세상 어느 황제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느냐. 어느 황제가 신하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느냐. 이런 제국은 이미 망조가 든 게 아닌가.”
“어찌 그들을 신하라 생각하시옵니까. 지금은 단지 천하가 혼란할 따름이옵니다. 마음을 굳게 드시고, 지금은 잠시 그 혼란을 피해간다고 생각하시옵소서.”
소녀는 그 혼란이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 혼란 속에서 태어나, 그 혼란 한가운데에서 황위에 올랐기 때문일까. 그간 황궁에 갇혀서만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적어도 유협이 보기에 이 혼란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낙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곳에 무엇이 있던가.
소녀는 보았다.
불타는 황궁, 무너져내리는 한 제국의 역사.
어쩌면 한이라는 제국은 그때 끝났을지도 몰랐다. 동탁이 불사른 황궁과 함께 그 역사도 점점 뒤안길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
“그랬으면 좋겠구나.”
황제라는 이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다. 이런 현실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인데 희망을 품을 방법은 있던가.
“상시는 종종 전호, 그 남자에게 찾아가도록.”
소녀는 그리 말하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나누거라.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짐이 진정 믿을만한 사람인지 상시 나름대로 헤아려보도록 하여라.”
“예, 폐하.”
곧 함곡관을 넘어 낙양에 도착한다.
그때가 되면 추격대의 손길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터.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다 무너져가는 황궁의 재건과 주변 제후를 어떻게 포섭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남아있었다.
유협이 가진 재산은 장안을 급히 떠나며 챙긴 몇 예물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옥새조차 잃은 황제가 낙양을 재건하기란 요원한 일.
앞으로도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이게 진정 황제인가.
“물러가라.”
소녀는 지금 혼자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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