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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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쁘지 않아.
이번에는 그래서 그 상시인지 뭔지 하는 환관 어르신에게 제대로 예법에 대해 들었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과한 데다가 너무 복잡해서 전부 외웠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응? 뭘 그리 딱딱히 있는가?”
그렇게 배웠는데.
“과한 예를 차리지 말도록. 그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 구태여 억지로 예를 차려 짐을 부끄럽게 만들 생각인가?”
“아니, 그….”
“독대하는 자리에서는 최소한의 예만 지키도록.”
아니, 그래도 기껏 배워왔는데.
자주 좀 얼굴을 비치라기에 모처럼 찾아왔는데 오자마자 가슴 아픔을 하나 적립해버렸다. 예를 갖춰도 뭐라고 하고, 안 갖추면 또 안 갖춘 대로 뭐라고 하는데 어쩌라는 거지.
집에 가고 싶다.
“그래도 이번엔 제법 일찍 왔네.”
“폐하의 존안을 뵈어 무궁….”
“그러니 그런 쓰잘머리 없는 미사여구는 치워.”
아니 좀.
그나저나 황제 폐하가 점점 말이 짧아지시는데. 아니 하대하는 건 전이랑 마찬가지긴 한데, 뭔가 그 거들먹거리는 느낌? 조금 근엄한 태도를 벗어던졌다고 해야 할까.
“오늘 짐은 그대의 얘기를 듣고 싶다.”
“제 얘기요?”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옆에 앉도록. 황제와 동석하는 특혜를 허락하지. 이 좁은 어가에서 쪼그리고 있으면 오래 떠들기 불편하겠지?”
오래 떠들게 할 생각이구나.
보내줄 생각은 없는 거구나, 그렇구나.
위가 쓰리다.
“감사, 합니다.”
황제의 옆자리라니, 솔직히 앉자마자 위가 뒤틀릴 것 같았다. 지금이야 황제의 권위에 비해 초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황제가 어떤 이인가.
말 한마디로 몇 가문을 멸족시킬 수 있었다.
그 권위는 으뜸.
나 같은 일반인에게 황제란 구름 위에 있는 별세계의 무언가와 굉장히 흡사했다.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보아 옳을까. 적어도 쉬이 접할 수 없는 느낌이잖아?
옆자리에 앉자마자 황제가 살짝 고개를 돌려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상시 어르신이 황제 폐하가 올려다보게 하는 건 굉장한 무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옆에 앉으라 이른 건 폐하니까.
이럴 땐 뭐가 맞는 예법이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사마의, 사마의는 어디냐. 미안했다. 다음에는 공부하라고 해도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 더 빠삭하게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했다.
“제법 키가 크구나.”
“아니 뭐, 그야….”
폐하는 아직 더 커야 할 나이니까. 노화가 어릴 적부터 멈춘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런 사례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였다.
“보자,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느냐?”
소녀는 그리 말하며 몸을 쓱 내게 가까이 붙이고는 손을 머리로 뻗었다. 대략 앉은키만 해도 머리 하나 정도는 차이가 날 정도로 작은 몸. 황제는 이리도 어린 데다가 가녀린 소녀였다,
이 나이에 만인의 주목을 받는다.
그건 조금, 상당히 불쌍하지 않은가?
“제법 크구나. 짐도 언젠가는 크겠지?”
“크실 겁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협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나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됐어. 그런 것보다는 그대의 얘기를 들려다오.”
“어떤 걸 얘기해드리면 좋을까요. 생각보다 재미있는 내용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 뭐냐. 조금 고생했던 내용이 많은지라.”
“영웅담과 같은 것이라도 좋아. 영웅이라면 응당 고생길에 올라 처절하게 싸우지만, 이내 그에 합당한 결실을 얻지 않느냐.”
현실은 구전되는 이야기와 달랐다.
고생길이라면 지금도 걷고 있었지만, 이 노력에 합당한 결실은 무엇일까. 노력한다고 결실이 따라오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당연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소년병일 시절일까.
중년의, 이름이 뭐였더라. 솔직히 까먹었다.
그 남자는 막 새 가정을 차린 숙련된 병사였다. 주변의 움직임을 읽고 아군을 독려할 줄 아는, 적어도 십인대의 대장으로는 그보다 더 나은 병사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남자는 싸우기도 잘 싸웠다.
당시에는 그가 지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이제야 생각하기에 그 남자는 나름대로 기댈 수 있는 대장, 편안하게 주변 병사를 독려하는 멋진 남자였던 것 같다.
그런 이가 어떻게 죽었는가.
별거 없었다.
정찰부대에 편재되어 우리를 이끌고 진군하던 와중에 발각당하여 눈먼 화살에 꿰여 꼬챙이가 되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랬다.
“결실이라…. 아직 그런 걸 맛본 적은 없네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린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처참하고 비참한 것이었으니까. 군마에 짓밟힌 시체를 수습했을 적에 절절히 깨달았다.
몸을 들어야 하는데 전신의 뼈가 부러져서 당최 고정되질 않았다. 눈알은 터져 나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방도도 없었고, 푹 꺼진 배와 사지가 뒤틀려 뼈 언저리까지 짓눌린 살점.
그런 사체는 수습할 방도도 없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다. 전신이 뒤틀린 데다가 뼈도 다 부러져 마땅히 들 방법도 없으니, 그저 전장에 남은 시체 중 하나로. 그렇게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그러면 언젠가는 그 결실이 탐스레 열릴 날도 오지 않겠느냐? 적어도 짐은 그리 믿고 있다. 그러지라도 않으면 이 세상은 너무 불합리하지 않으냐.”
“조금, 재미있는 얘기를 해드릴까요?”
결실이라는 건 별거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감사. 그것이 당연하게 되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사람은 대지에 발을 붙이고 진정한 가치관과 방향성에 대해 고뇌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나도 소연 아씨의 뒤를 따라, 이제는 어엿한 관리가 되었다. 그러니 여유가 생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지, 예전 병주에서 있을 때라면 여전히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벅차지 않았을까.
“그 기루라고 아십니까?”
“기루?”
아니 잠깐만. 이건 어린아이, 그것도 황제에게 꺼낼 말은 아니었나. 생각해보니까 음담패설이잖아. 그치만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술 마신 뒤에 벌어지는 깽판이 제일 재미있는 건데.
하는 수 없이 조금 이야기를 바꿨다.
“그 술을 마시고 여자와 남자, 각자가 이성과 함께 노는 공간입니다요. 거기서는 가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이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호오.”
“한 남자가 술값을 외상을 너무 많이 해서 끌려나갈 판국이 되었는데, 정작 그 남자가 기루의 사병을 다 때려눕혀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기루도 난감해지지만, 정작 그렇게 사달을 낸 남자도 난감해진다. 아예 척을 질 것이거나 그 지역을 떠날 것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야 원한 관계가 생겨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기루라면 꽤 쌓인 돈도 많으니까.
“남자도 제 잘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돈이 궁해서, 그런데 술기운에 취해 강압적으로 나오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죠.”
“외상값도 못 갚으면서 난동? 무뢰배가 아니냐.”
윽.
“하여 기루의 주인에게 찾아간 남자는 말했습니다. 내 실력은 이러하오. 외상값에 상응할 때까지 당신의 밑에서 일할 터이니, 이 실력을 살 생각은 있으신가? 하고요.”
“……혹시 당사자는 아니겠지.”
아니, 뭐…. 그때는 좀 어렸었다. 마침 방삼이도 그때는 다른 일을 구해보겠다고 지역을 떠났을 때고, 나도 술이랑 여자랑 놀기 바빠서 돈도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철이 없기도 했다.
“하, 어처구니가 없네. 영웅담과 같은 화려한 것을 기대했더니, 이건 그저 글러 먹은 망나니의 일대기가 아닌가.”
“……하하, 제가 좀 철이 없었습니다요.”
“그래서?”
소녀는 그리 반문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랬던 한량이 지금은 군승이 된 것 아니냐. 그만한 역사가 있겠지? 그만한 모험담이 있을 것이고, 역경과 고난을 헤쳤으니 지금의 그대가 있는 것인데, 짐은 그게 듣고 싶노라.”
기루에서 난동이나 부리던, 나중에는 도적이 되었던 철없는 남자의 계기라. 그걸 생각하면 솔직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소연.
그 여자와의 만남이 내 모든 걸 뒤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였다. 아니, 그때도 우스웠지.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 그 당시에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온 세상에 빈곤과 기아를 없애보자고?
허풍도 그런 허풍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우선 흐트러진 천하를 다시 하나로 뭉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그녀는 그리 말했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내 시작이 그녀인 것도 마찬가지.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
그 척박한 병주까지 도망쳐 도적질이나 하던, 하루하루 그냥 주변 이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허비할 뿐이던 망나니 양아치에 한량.
한량이 여기까지 온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로만 알았죠. 얼굴은 조그마한 것이 붉은 눈동자에, 몸매는 또 어떤지. 눈이 계속 따라간다는 게 그런 거였지요?”
“흐음.”
소녀는 눈을 감았다.
집중하려는 듯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산적에게 둘러싸여 고생하는 것 같기에 도왔죠. 미인을 저버리지 마라. 그러면 뭐 떡고물 하나라도 오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여자가 대뜸 이쪽을 두드려 패는 것이 아닙니까.”
“오? 그대를? 저번에 싸우는 모습을 보아 쉬이 맞을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여인은 그리 강했느냐?”
“그때는 아직 약했거든요.”
지금과 비교해 그 당시는 절반도 안 되지 않을까. 솔직히 그 당시에도 나름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만나고 깨지기도 많이 깨져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무엇인지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많이 강해지기도 했지.
그런데도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 여자는 저희를 전부 때려눕히고 그러 덥니다. 언제까지 도적으로 살겠느냐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천하에 배 곪는 이 없고 모두가 등 따신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오만하다. 제국의 황제도, 천자조차 그런 말을 쉬이 내뱉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여인은 꽤 오만하구나.”
그 말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당시 나도 어안이 벙벙했는데, 그런데도 무언가 끌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거절했다가는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수긍했던 면도 있었다.
그런 우연찮은 만남으로 시작했다.
“아무튼, 그 여자를 따랐습니다. 여러 전장을 전전했지요. 동탁과 대적하는 연합군에도 참전했고, 여포와도 겨뤄보았습니다. 죽는 줄 알았지만요.”
“…그대의 지금 휘하에 그 여자가 있던데.”
그러고 보니 여포와 폐하는 일면식이 있던가. 혹시 예전에도 무례를 범했더라면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혹시 여포가 실례라도….”
“아니. 그 여자는 그저 동탁의 호위, 짐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지. 그래도 그 여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런 여인이 그대 휘하에 있다는 것도 나름 놀라웠는데, 겨루기까지 하였느냐.”
“그런 과정을 겪어 조공과 함께하면서 연주로 몰려든 황건적을 물리치는 등, 꽤 많은 일이 있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략한 것은 많지만, 대체적으로는 이러했다.
중요한 건 내 인생의 전환점이 진소연이라는 것이었으니까. 최근 들어 그녀의 방침에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게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병주의 한량이 소연 아씨와 함께하며 이 위치까지 왔고, 이제는 황제 폐하를 구하고 호위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대라는 영웅이 완성되기까지 진소연이라는 여인이 많은 영향을 미쳤구나. 분명 짐이 모르는 유대가 있는 것이겠지?”
“영웅이라니요, 아직 멀었습니다.”
그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웅이 별거더냐. 게다가 그대는 이 한 제국의 황제를 구원했다. 보답조차 바라지 않고, 그저 단순히 행했을 따름이라고? 만약 그 말이 진심이라면, 소녀는 그대를 영웅이라 불러 마지않을 것이노라.”
소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애당초 그건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조조의 명을 받았고, 그 뒤에는 내 나름의 계산을 하고 구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이루어진 일.
그런 걸 영웅이라 부를 수 있던가.
나는 아니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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