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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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에 의한 공세의 여파는 여전히 서주를 괴롭혔다. 특히 각 지역의 농토를 전부 불사르고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가며 행정구역 전체를 마비시켰고, 각 관청을 비롯한 주의 통솔기관 전체를 부순 일.
덕분에 여전히 서주 내부는 혼란스러웠던데다가 수탈과 약탈, 거기에 전쟁비용에 의한 일로 당장 서주 백성 중 이번 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굶어 죽은 이가 몇이던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손찬의 휘하 제장이며 평원군의 태수에서 순식간에 서주의 주인이 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지만, 그 내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농지를 전부 부수어진 것도, 관청을 비롯해 각지의 행정시설이 마비된 것도 결국 시간을 들여 해결할 일이었다.
그렇게 길을 걷던 유비는 저 멀리 개천가에 쪼그려 앉은 한 소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정돈되지 않은 회색 머리칼에 체구가 작은 소녀.
“량아, 여기서 뭐 하니?”
“관찰.”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태도에 유비는 픽 웃으며 그 옆에 나란히 쪼그려 제갈량이 보고 있던 것을 바라보았다.
“응? 이 돌멩이는 다 뭐니?”
무언가 땅에 선을 긋고는 그 위로 조약돌이 놓여있었다. 제법 크기도 커, 무언가 그림을 그렸나 하기에는 모양이 영 이상했다.
소녀는 그 질문에 슬쩍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것, 조조. 이것은 원소.”
“…지도였니? 그럼 이건?”
연주의 아래에도 무언가 빼곡하게 놓인 조약돌을 가리키며 질문하는 유비에게 제갈량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조조.”
“…그러면 여기는?”
연주의 서쪽.
과거 황실이 있던 자리였으며 지금은 지배체계가 잡히지 않아 혼란의 연속인 사예주. 그 부근을 가리킨 유비의 질문에도 제갈량의 대답은 똑같았다.
“조조.”
예주와 사예주.
소녀는 그 모든 것을 조조의 영역이라 답했다. 그러면 그 위로 늘어놓은 다소 각진 돌멩이는 무얼 뜻하는 걸까.
“하북에도 여러 개 놓았네?”
“그것, 전부 원소.”
“…여긴 공손 장군이 아닐까?”
그녀는 그리 말하며 유주 일대를 가리켰다.
여전히 공손찬과 원소는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에 한 번 원소가 대승하였다고 해도, 전에는 공손찬의 승리였다.
승자를 감히 점칠 수 없는 것이 하북의 정세.
“언니, 말했음. 유주자사의 사망. 그럼 끝임.”
제갈량은 언니를 통해 천하의 정세를 묻고는 했다. 특히 유주자사와 공손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그녀의 대답을 듣다 보니 얼추 하북의 정세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제갈근은 소녀에게 말했었다.
유주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공손찬. 그렇지만 주인은 유우였으며, 실제로 인망도 유우가 훨씬 높았고 황실의 어르신이라는 것도 있었기에 누구나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노라고.
그런 이를 공손찬이 죽였다.
안 그래도 과격한 정치로 주변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공손찬이 유주의 정신적 지주를 참살했다. 반대로 원소는 계속 제 주변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양상.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건 사형이 너무하시긴 했지.”
유비도 그것만은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유우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지만, 황가의 인물이면서 주변으로 어진 정치를 펼쳤다고 인정받는 이를 제 손으로 참살하다니?
물론 10만의 대군을 이끈 유우를 고작 수천으로 무너뜨린 군사적 수완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유주는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공포로 다스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 번 떠난 민심을 붙잡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제갈량은 조약돌 몇 개를 더 잡았다.
“공손찬의 강함, 군사의 강함. 그런데도 졌음.”
“승패는 병가지상사지 않겠니?”
유비의 말에 제갈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치 싸움은 원소의 압승. 남은 것, 전쟁의 승리. 현상? 반반. 그러면 우위에 있는 요소가 많은 원소가 압도적으로 유리.”
생각해보면 간단한 논리였다.
원소는 정치적인 움직임에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공손찬은 그간의 전쟁과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전투에 강점이 있었다.
이번 한 번의 대승은 원소가 공손찬의 군사적 능력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뜻. 그렇다면 단순하게 생각해 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는 원소가 유리하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 아니지.”
조금 더 반박하려던 유비는 제 눈앞에 있는 소녀가 얼마나 어린 지를 떠올렸다. 이런 어린 소녀와 천하 정세를 진지하게 논하려던 것이 우습기도 했다.
기분전환을 하려던 것이 오히려 복잡해졌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니?”
유비는 조금 가볍게 질문했다.
어차피 어린아이의 얘기. 분명 그 나이 또래보다 똑똑하다고는 해도 아직 많이 어린 나이였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
그 질문에 제갈량은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멍한 듯한 눈동자.
“지금 당장 관직 내려놓기를 추천.”
“…응?”
제갈량은 무기질적으로 유비를 바라보았다.
“조조군의 상승세, 막을 수 없음. 현 서주의 양상으로 저지 불가능. 남은 길, 조조에게 멸망. 혹은 원소에게 항복.”
“…아, 아하하하….”
뭐라고 답해야 할까.
어린 소녀의 말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내용이었다. 그런 애매한 유비의 반응에 소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그려놓은 모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예주는 어차피 조조의 것.
하북에서도 사실상 원소를 제지할 세력은 없었다. 거기에 조조가 사예주까지 간접적으로나마 손길을 뻗는다면, 천하의 중앙은 말 그대로 조조와 원소의 양분체제로 이뤄질 터였다.
“하기는, 조조도 원소도 다 대단하기는 하지.”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서주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사실상 예주까지 점령할 수 있는 조조나 공손찬을 상대로 점점 우위를 잡기 시작한 원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어린 소녀까지 이리 말한다니.
그게 조금 슬퍼서 헛웃음이 나왔다.
“확정 아님. 어쩌면 이길 수도 있음. 기운!”
기운! …이라고 해도 말이지.
유비는 한동안 쓰게 웃으며 제갈량의 옆자리를 지켰다. 소녀는 그런 유비의 모습에도 반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약돌을 매만졌다.
서주의 시간은 그리 흘렀다.
* * *
“동새애애앵!! 누이 도와주러 왔니!?”
“…아 좀, 떨어지쇼.”
진류성 관청에 도착하자마자 조홍이 칭얼거리며 달라붙기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밀어냈다. 오면서 보기에도 진류성의 상황을 썩 좋지 못했다.
백파적은 틈만 나면 군세를 모아 진류성을 공략하고 있었고, 오는 길에는 숱한 피난민의 행렬을 보았다.
도적이 성까지 공략하는 시대라니.
진짜 말세다.
“어우, 이 누이 죽을 뻔했잖니? 한 번 공격하러 나섰더니 사방으로 포위되어서 말이야. 저게 무슨 도적이니? 서주군보다 훨씬 잘 싸우더라.”
“서주야 뭐, 그쪽은 말이 정규군이지.”
사실 진정한 의미로 상비군은 그런 도적 집단이 아닐까? 실제로 흑산적도 그렇고 백파적도 그런 것이, 그런 도적들이 전투력은 훨씬 높았다.
매번 전장에 사는 족속들이니까.
“아무튼, 우선 기마 이천에 보병집단 삼천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 빌어먹을 새끼 하나가 아주 개같이 혓바닥을 놀리던데, 내가 이번에 그 혓바닥을 도려낼 거야.”
뭘 그렇게 뒤숭숭한 발언을.
그만큼 고생했던 걸까. 그녀는 이를 벅벅 갈면서도 잘 됐다며 내 등을 한참 두드렸다. 그것과 별개로, 기존 진류의 방위군과 합친다면 백파적이 세를 확장하지 못하게 막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아, 그러면 여포랑도 같이 왔니?”
“바깥에 잠시 대기 중이요.”
그 말에 조홍은 픽 웃었다.
“그 천하무쌍을 이렇게 다룰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인성이나 원한은 별개로 그 여자가 강한 건 천하가 아는 일이잖아?”
“부탁하면 전선에 서주기는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은 이상에는 아마 내 등 뒤에서 떠날 생각도 안 하겠지. 최근 고민이 한 가지 있다면, 여포 이 여자가 내 주변에서 당최 떠날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호위를 부탁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
“그건 어떻게든 해줘. 아군도 힘을 아껴가면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게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 있수다.”
적어도 낙양 일대에서 움직이던 백파적은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관군을 이끄는 조홍도 초기 진압에 실패하여 진류성까지 퇴각하고 말았으니, 그 기세는 알 법했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그녀는 살짝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여 살짝 물러났는데, 조홍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언니랑 어디까지 갔어?”
“…무슨 말씀이신지?”
“얘도 참, 시치미 떼기는!”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니랑 몇 년을 같이 다녔는데? 말은 안 해도 연주성 떠나기 전까지 언니 기분이 얼마나 좋아 보였는데. 동생 보는 시선도 애틋하고 말이야.”
조홍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쓱 들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묘하게 거북해서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는 다시 몸을 옮겨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했지?”
“모르오.”
“에이, 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했느냐고 물으면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관계가 정말 조홍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관계였냐고 물으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나와 조조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몸을 섞었지만, 마음을 나누지는 않았다. 조조는 제 욕심을 풀었고, 나 또한 내 욕심을 터놓았다. 서로가 그리 욕심을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참나, 동생 요즘 재미없어.”
“군시에 무슨 재미요, 재미는. 우선 진류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방위군은 몇인지, 그리고 비축된 물자는 어느 정도인지부터 말해주셔.”
“시시하게 벌써 공무야?”
아니, 애초에 그거 하러 온 거다. 이걸 시시하다고 하면 어떡할까. 안 그래도 나는 팔자에도 없던 행정부터 물자 관리까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데.
과거에 했던 적이 있는 일이었지만, 이게 체계적인 계급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모든 선택지가 나에게 있다는 것도.
내 명령 한 마디로 군이 움직인다. 어디에 움직일지, 어떻게 움직일지. 그 방향성까지 전부 선택 한 번으로 결정된다는 것.
이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간 소연 아씨가 일임했던 일이었다.
“일단 군사는 성밖에 주둔시켜뒀소.”
“응, 나쁘지 않네. 어차피 백파적도 근래 다녀갔으니 당분간은 안 올 거고. 그동안 합을 맞추면서 조련해두는 게 좋겠어.”
누군가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
장군이 되려면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해보려니 이만큼 막막하고 어려운 일도 없었다.
“우선 군수물자에 관해서는 현령에게 말을 전해둘게. 아무래도 물자 관리는 그에게 전부 일임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가져온 건 얼추 한 달 분량이요.”
“그 정도면 충분해.”
내가 끌고 온 것은 연주의 상비군이었다. 게다가 진류 내의 방위군까지 합쳤으니, 일반적이라면 한 달 내로 그들을 다시 몰아낼 수 있을 터.
“안 그래도 진류가 좀 복잡하거든. 장막 그 인간이 주변 사람들은 제대로 다스렸는지, 아직도 언니에 대한 반발이 남아있어.”
전쟁은 전쟁 자체보다도 뒤처리에 더 긴 시간이 걸리고는 했다. 아직 연주는 전쟁의 여파를 채 떨쳐내지 못했으니, 이런 상황에서 도적까지 세를 넓힌다면 그 혼란은 당분간 잠재우기 어려워진다.
“뭐,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여기까지 하고.”
그녀는 그리 말하며 허리춤에 찬 호리병을 꺼냈다.
“오늘은 일단 한잔 해야지?”
“…어휴, 진짜.”
이 부잣집 아가씨가 진짜.
그래도 조홍은 할 땐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어떤 면에서는 분위기를 풀어주고 앞으로 함께 싸울 이들을 화합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특히 여포와 장료.
아직 아군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이들도 이런 가벼운 술자리를 통해 서로 알아가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도 불러올게.”
“응? 단둘이 마시는 거 아니었니?”
헛소리는.
다소 당황한 목소리에 손을 휘휘 내젓고는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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