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172화 (172/343)

172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싫어하지 않기를 바랐다 여포는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마지막이겠지. 이제 더는 세상을 눈에 담을 수도 없을 일. 머리에 뒤집어씌워 진 천 주머니에 가려져 그 마지막 풍경도 시선에 담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묘하게도 가벼웠다.

곧 죽으러 가는 길인데도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 여포가 느끼기에 그건 분명 이상한 것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모든 것 벗어던지는 것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그런 추상적인 것을 떠올렸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가로막혔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부분의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감각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여포는 그간 그저 추위에 시달렸다. 온기를 잃고 따스함을 잊어, 오로지 이 악물고 참고 견딜 뿐인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최후의 최후.

마지막 순간에는 봄날이 왔다.

“우습네.”

천 쪼가리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따스한 것에 둘러싸인 느낌.

얄궂은 일이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자신의 사람도, 가족도. 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인생이었다. 마지막에는 연심도 품었으나 그것 또한 헛된 짝사랑.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죄를 너무 많이 지었던가.

그래서 천지신명께서 벌이라도 내린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생을 추위에 시달리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봄날의 향기를 맛보게 해준 것이 인생 최후의 순간이라니.

너무 악질적이어서 반대로 웃겼다.

여기서 끝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끌려가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장료는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그간 못 이루었던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와 그간 있었던 일들.

원망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전호 그 남자에게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받았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가질 일이 없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한 번 좋은 경험을 한 셈 치면 그만이었다.

그만이었는데.

죽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에 와서 이런 건 너무했다. 차라리 이런 만남이 아니었다면. 그 남자도 병주, 그것도 자신과 같은 오원군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다. 차라리 그곳에서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으면 어떤 관계가 되었을지.

서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그림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너무 아쉬웠다.

순간 여포를 끌고 가던 병사가 자리에 멈췄다.

그녀의 무릎을 꿇린다.

“아으, 시발. 좀 살살 꿇려라.”

아려오는 무릎에 핀잔을 주며 눈을 감았다. 여기가 파란만장하던 천하무쌍 여포의 종착점이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방자하구나.”

“뒈지게 생겼는데 방자하고 자시고.”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대는 장막의 농단에 놀아나 연주목과의 동맹을 저버리고 연주를 공격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인정이라. 아, 그래. 인정해야지.”

어차피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기에 놀아났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가는 길에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목의 자리를 내려놓을 것을 맹세하는가?”

“죽는 길에 그런 감투가 무슨 소용이야.”

혓바닥이 길다.

어차피 죽일 것이라면 목부터 쳐버리지. 그녀는 개인적으로 이런 형식적인 행동을 싫어했다. 어차피 죽일 것이라면 단박에 죽여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지 말아야지.

그것이 전장에서 패한 전사에게 바치는 예우였다.

비록 패했다고 해서 그것을 조롱하는 것은 모욕이었다. 적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최후만큼은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이 전장의 법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그런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꼬락서니를 보이지 않겠노라 다짐했기에 꾹 참았다. 이 자리에 어딘가에서 그 남자가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이 여포.

마지막까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최후에는 의연하게 갔노라 기억하길 바랐으니까. 그래서 이를 까득 깨물며 억지로 참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거면 됐어.”

어딘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목소리.

익숙한 음색이었다. 순간 귀가 잘못되었나 싶었을 때, 천천히 다가오던 발소리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난 약속은 지키는 남자니까.”

빛이었다.

갑작스럽게 눈부시게 들어오는 선명한 빛무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던 천 쪼가리가 사라지고, 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보았다.

선명한 꽃내음과 화사한 햇살.

커다란 복상 나무와 흐드러지게 핀 꽃잎. 바람에 나부껴 흔들리는 광경 아래로 한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간 힘든 건 없으셨나?”

정신이 들지 않았다.

아마 이 진한 꽃망울의 냄새에 취했기 때문이리라. 눈부시게 비추는 채광에 제대로 분간조차 가지 않기 때문이겠지. 이 환한 봄날의 풍경 탓에 정신이 흐트러졌으리라.

“너, 너….”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현실미가 너무 떨어졌다. 차라리 이게 목이 떨어지는 와중에 상상한 풍경이라고 믿는 게 더욱 현실적이지 않을까.

“내가 말했지? 살려는 드리겠다고.”

주변을 둘러보니 두어 명의 병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여기가 그간 전호가 기거하던 관사의 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누렸던 건 전부 쥐여주지 못해.”

“무슨….”

그는 여포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마 기본적인 위치는 내 시종으로 시작할 거야. 물론 당신처럼 대단한 사람을 고작 그런 식으로 쓰진 않겠지만, 항장 신분이라 제대로 된 영광을 쥐려면 고생깨나 할 걸?”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런 허황된 미명 따위에 취할 생각은 없었다.

다리가 풀린 여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손을 허우적거렸다. 무릎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전호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진짜, 야?”

“싫으면 지금 말해.”

조조와 약속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약속이 붙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관계가 싫다고 하면 조조는 차라리 여포를 죽이려 들 터.

“나,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이해라는 건 원래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하는 법이지. 지금까지처럼 군을 이끌고 천하무쌍이라는 무를 떨치려면 조금 인정받을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너, 나 싫어하던 거 아니었어?”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힘없이 그 손길에 딸려 일어난 그녀는 휘청거리는 다리 탓에 그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전호는 그녀를 받아주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야말로 나 원망 안 하나?”

“…조금, 원망해.”

“나도 그거랑 같아.”

세상일이라는 건 원래 한 가지 감정으로 재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물론 싫은 감정도 남아있었지만, 감정이라는 건 딱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

“미안했어.”

“나도 미안해.”

누구의 사과였을까.

먼저 사죄를 구한 건 누구였는가.

서로 비슷하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런 앞뒤 관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둘 모두가 서로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었고, 그간의 악감정 이상으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전호는 여전히 죽어간 이들을 가슴에 품었다.

여포도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잊지 않았다.

사과라는 건 일방통행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답해주는 상대가 없다면 그건 단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내뱉는 공허한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하여 지금 여기서.

그들의 사과는 처음으로 서로에게 닿았다.

* * *

조조는 그간 볼 수 없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탐욕적이라고 해야 할까?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어딘가 슬픈 듯한 느낌도 함께 느껴졌으니까.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듯한 기분이었다.

“그대가 본인을 그리 거절하겠다면, 좋다.”

그녀는 내 멱살을 세차게 쥐었다.

“더는 적당히 행동하는 건 그만두지. 애당초 그릇에 맞지 않았다. 본인은 가지고자 했던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만 성미가 차는 여인이었으니까.”

“조공.”

“존대하지 마라!”

성질을 내며 소리친 그녀가 제 얼굴을 들이밀어 이마끼리 맞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로의 숨결이 오갈 정도로 가까이 붙었다.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그녀의 오뚝한 코와 입술이 보일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대가 본인의 욕심에 제동을 걸겠다면, 좋다. 본인은 그것 또한 긍정하지. 여포를 살리겠노라고? 좋다. 어차피 그 여자는 부릴 수만 있다면 써먹을 곳은 많다.”

설령 적이었다 하더라도 항장으로서 받아들인 사례는 많았다. 그것도 여포 정도나 된다면 부리는 것이 곤란할 수는 있겠으나, 가치로만 따진다면 이만한 무장은 천하 어디를 찾아보아도 드물었다.

“생각해보면 본인과 아양 떠는 건 맞지 않았다.”

멱살 잡던 손을 놓은 그녀는 그대로 내 턱에 손가락을 대고 슬쩍 치켜세웠다. 붉은 눈동자가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황.

“이상하지. 본인은 그대가 제법 마음에 드는데, 정작 그대는 그렇지 않은 듯해. 본인이 무얼 그리 잘못했는가?”

“싫은 게 아닙니다. 방식이 맞지 않을 뿐이지.”

돌아보지 않는다.

단지 앞만을 향해 걸어가는 건 수장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덕목이었다. 하지만 그 발밑에 얼마나 많은 시체를 쌓고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를 추가할 건지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였다.

“그대와 본인은 상당히 다르다.”

“그렇겠죠.”

“알고 있는가? 본인은 생각보다 욕심이 많다. 어릴 적부터 원하는 건 가지지 않으면 성이 차질 않았어. 그러니까 맹세하지.”

그녀는 픽 웃으며 내 턱밑을 매만졌다.

“본인은 앞으로도 계속 욕심낼 것이다. 권력과 영광, 더 나아가 이 천하 전체를 탐할 것이다. 이건 누구도 멈추지 못할 터. 싫은가?”

“…무의미한 피를 흩뿌리신다면.”

“막겠노라고? 그런 걸 위해 본인을 거절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자를 위해 무의미한 피를 흩뿌려선 안 됐다.

이 천하는 각각의 구성원들에 의해 구성된 땅이었다. 권력자가 있으면 그 밑으로는 우리 같은 일반 백성들도 함께 있기에 비로소 하나의 국가가 돌아가는 것.

가장 위에 선 자의 행동에 휩쓸릴 수밖에 없던 시절을 살았다. 내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나도 가장 밑바닥의 인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말릴 생각이었다.

“그대가 그럴 생각이라면, 뭐 좋다. 본인이 아까 말했지?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을 참지 않겠다고.”

새빨간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대가 남은 욕심을 채워라. 본인이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그대가 본인이란 그릇을 가득 메워보아라.”

천천히 다가오는 조조의 얼굴.

메마른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가볍게 맞닿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본인은 앞으로 계속 원하는 걸 쟁취할 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신 그대가 다른 방식으로 본인의 갈증을 해소하라.”

“…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알고 있음이다.”

조조의 방식이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괴물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인간적으로 굉장히 유능하고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조의 이런 방식은 의문이었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니까, 조금 더 주변의 얘기를 들어준다면. 그리고 타당한 합의점만 찾는다면 나도 불만이 없어. 그러니까 이런 방식은…!!”

말하던 도중, 다시금 입술끼리 부딪쳤다.

이번에는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혀가 느껴졌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천천히 나서, 이윽고 내 치아를 톡톡 두드리면서 잇몸과 이를 훑는 혀.

살짝 눈을 뜨니 조조의 눈과 마주쳤다.

그 시선은 입을 열라고 말하는 듯한 단호함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그녀의 혀와 내 혀를 섞었다.

숨이 가쁠 정도로 입을 맞췄다.

“…후우, 나쁘지 않았다.”

입술과 입술을 잇는 은빛 실선이 이어졌다.

“싫어하지 않는다? 틀렸다. 본인은 그대가 탐이 난다고 했을 터. 본인을 그대의 방식으로 물들이고 싶다면, 그대도 응당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붙잡았다.

“본인을 그대의 색으로 물들일 준비는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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