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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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순식간에 가도는 전장으로 변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적의 무리는 아군 숫자와 비교하면 태산과도 같은 것.
물론 아군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병사가 되기 이전부터 도적이었던 이들. 거기에 나와 소연 아씨를 따라 거친 전장만 몇인가. 이미 이들은 전부 나름의 정예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적은 많은데 정작 아군은 분산되었다.
수레를 방패 삼아 버틴다고 하더라도 저 많은 숫자를 전부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하필 아군은 산을 끼고 움직여 후방으로 물릴 수도 없었다.
“아가씨!!”
다가오는 적병 하나를 베어내며 외쳤다.
“이거 못 버텨! 퇴각해야 하오! 저거 전부 다 주더라도, 추스를 수 있는 병사만이라도. 아니 시발, 그것도 못해! 그냥 당장 몸 빼야 해!”
저 인파의 물결에 말려들면 죽은 목숨이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재산이 아깝다고 한들 그것이 목숨보다 아까울 수는 없었다. 몇억 전? 그것도 살아야 쓸 수 있지 않겠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숭을 호위하던 우리 행렬은 가장 선두에 있었다. 여기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그나마 몸을 빼기에는 가장 좋은 위치인 것.
비록 그러면 수레를 지키던 아군은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전부 죽는다.
진퇴양난이었다. 아군을 버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구하겠다고 나서면 모두가 죽는 상황. 누군가는 선택해야 했다. 아군을 내치더라도 살아남겠다는 선택.
“아씨, 지금은….”
“퇴각하자.”
내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가씨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직도 수레를 끼고 어떻게든 버티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수레 한 대당 병사 셋 정도를 붙여두었기에 그 저항이 오래갈 리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퇴각하라!! 전군 이제부터 앞만 보도록!”
그녀는 주변에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조숭이 탄 마부도 슬슬 속도를 올리려 했을 무렵, 갑자기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조숭이 튀어나왔다.
“무슨 헛소리냐! 당장 저것을 지켜야지!!”
얼굴까지 새빨개진 조숭.
그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수레를 가리켰다. 이미 서주군에게 습격당해 혼전인 행렬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지른다.
“저것이 얼마인지 아느냐? 저것이 어떤 돈인지 알고! 안 된다. 네놈들이라도 분전하여 저것들을 몰아낼 생각을 해야지!!”
“아니 어르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황을 구분하셔야지! 저걸 어떻게 버텨. 이대로 있다가는 어르신도 뒈진다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갔다.
맞았나?
아프지는 않았지만 묘한 불쾌함이 일었다. 살짝 화끈한 통증이 오른쪽 뺨에서 느껴졌고, 눈만 살짝 굴려 앞을 바라보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조숭의 얼굴이 보였다.
“죽기로 하면 못할 것이 무엇이냐! 제 목숨이 아까워서 싸우지 않겠다고? 네놈이 그러고도 병사더냐!”
거참 어르신 목청 한 번 좋네.
진짜 죽일 수도 없고.
손이 떨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미 수레의 행렬은 습격당했고, 이쪽을 향해서도 다수의 적병이 몰려오는 상황. 그러나 정작 호위할 대상이 이렇게 나와서는 방도가 없었다.
그럴 때였다.
“어르신, 실례하겠습니다.”
소연 아씨가 한 발짝 조숭에게 다가갔다.
아씨는 웃는 얼굴로 조숭에게 다가가서는 주먹을 꽉 쥐더니, 이윽고 조숭의 배를 향해 그 주먹을 세게 내질렀다.
“끄윽!!”
“잠시 조용히 하시지요.”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조숭의 목덜미를 쥐고는 열려있던 마차 내부로 던져버린 아씨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게. 당장 움직여.”
“세상에.”
쥐었던 청강에 힘을 주었다. 총 책임자인 아가씨가 이렇게 나와준다면야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단지 아씨가 이런 결단을 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이게 난세였다.
“전군! 수레를 버리고 퇴각해라!”
이렇게 외친다고 저들이 살아남을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계속 수레를 붙들고 있다가 개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더 살아남길 바라며 그리 외쳤다.
패색이 짙은 전장.
말에 올라선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찰랑거렸다. 그 새빨간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왜 말에 오르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도 보였다.
“후미를 맡을 필요가 있지 않겠소?”
“미쳤어? 병력 차이가 너무 심해. 휘말리면 빠져나오지도 못할 거야. 희생이 있더라도, 그래도 눈 질끈 감고 도망쳐야 해.”
“그래서는….”
호위대 보병도 전부 뒤처질 것인데.
그리 말하려 했지만, 눈을 질끈 감은 아가씨의 모습을 보아 그 말은 이을 수 없었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선택한 것이리라.
아군을 던져주더라도 살아남는 길.
전쟁이라는 것이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었다. 아군을 희생하더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장을 전전하던 당시에도 그런 경우는 수차례 있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알겠어, 좀 그렇게 보지 말어.”
최대한 웃는 낯으로 말하려 했는데, 그 표정을 잘 꾸몄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이런 선택을 강요받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저린 건 아직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일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여 말에 오르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이 넘는 소리. 이 소리가 무엇인지 대충 들어도 가늠할 수 있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한 차례 화살이 퍼부어졌다.
그나마 마차의 후면부에 박혀 조숭과 마차는 무사했지만, 정작 그 일대를 호위하던 병력까지는 무사하지 못한 상태.
소연은 어떻게든 그것을 몇 쳐내면서 말과 함께 무사할 수 있었고, 전호 역시 말에 오르려던 상황에서 그대로 말을 방패삼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적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잡아라, 잡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적어도 저 마차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놈들아, 좀 뛰어라!!”
장개는 화살을 비처럼 퍼부었음에도 처리되지 않은 몇 호위대를 가리키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그러면서 본인도 한 손에는 대검을, 허리춤에는 창을 차고는 말을 몰며 부리나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연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마차는 무사했다. 화살이 좀 박히긴 했어도, 내부까지 뚫지 못하고 대부분 지붕 부근에 박힌 상황. 아군은 많이 상했지만, 적어도 퇴각하기에 무리는 없어 보였다.
지척까지 적이 다가온 상황.
“무사하니!?”
“어떻게든?”
말 뒤에 숨었던 전호도 팔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본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몰아 그에게 다가갔다.
“이 손 잡아.”
화살에 발이 묶인 사이에도 서주군은 꾸역꾸역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숭과 말다툼이 있던 상황에서 다소 시간을 지체한 상황.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어우, 시발 진짜.”
그는 소연의 손을 잡고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이미 죽은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도, 남겨진 이들도 전부. 여기서 조숭을 살리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한 목숨이 희생될 수 있었다.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소연은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가자!”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마차도 이미 채찍질을 하며 달리기 시작한 상황. 물론 돌아간 이후 조가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 건에 대해서는 문책을 받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만 했다.
반면 장개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이대로 살려 보내면 안 됐다.
여기서 저들이 전부 살아간다면 재화를 처리하고 잠적할 시간을 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관병이 섞인 부대를 끌고 왔기에 더더욱 처리할 시간이 필요한 상황.
“화살 막 퍼부어라! 여기서 저놈들 살아가면 우리도 다 죽은 목숨이다! 시발, 좀 달리라고 이 머저리들아!”
그는 그리 외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제법 거리가 있던 것이, 아무리 발을 묶으려 해도 저 멀리 멀어져가는 마차를 붙잡기에는 영 시간이 부족했던 상황.
여기서 말을 빠르게 몰면 수 시간 안으로 연주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된다면 더는 쫓을 수도 없는 상황.
“이런 시부랄.”
무리였다.
장개는 미리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뒤를 쫓을 수 있었으나, 정작 후속 부대가 장개를 따라잡지도 못하는 상황.
그는 허리춤에서 창 한 자루를 빼 들었다.
“에라이 씨바아아알!!”
창을 역수로 움켜쥐고 힘차게 내던졌다.
더 이상의 추격은 무리한 상황.
분에 겨워 창을 내던진 장개는 말의 고삐를 쥐고는 멈췄다. 이미 저들을 놓쳤으니, 이제는 다른 수가 없었다.
최대한 이 자리를 빠르게 정리한다.
병사들에게 재화 몇 쥐여주고, 자신과 그 직속 부하들도 저 산더미처럼 쌓인 재화를 챙겨 도망쳐야만 했다.
“에잉, 시발.”
저들만 죽였더라도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일.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장개는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 * *
화살이 정말 비처럼 퍼부어졌다.
등 뒤에 있던 전호는 괜찮을까. 적어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괜찮은 것 같았지만, 정작 뒤를 돌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너 괜찮니? 화살 맞은 거 없어?”
“아직 한 대도 안 맞았네. 그간 재수가 없다 싶더니, 그래도 이런 재주는 있나 보오.”
그가 내 등에 몸을 받치고 있었기에, 목소리 또한 귓가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까지도 전부.
조금 안심을 주는 목소리.
“저기 뒤에서 몇 놈이 쫓아오고 있는데, 그건 어떡할 거요? 말 탄 놈들이라서 마차 속도를 생각하면 언젠가는 잡힐 건데.”
뒤를 돌아볼 수가 없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숫자는?”
“몇 기 안 돼. 아마 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러면 적 보병대와 거리가 벌어진 시점에서도 계속 따라오면, 그때는 우리끼리 치자. 그러고 가도 늦지는 않을 거야.”
추격대의 대장이 누구일까.
사실 누구여도 상관은 없었다. 숫자놀음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내 무력은 100이었다. 전호도 80 후반대까지 무력 스테이터스가 끌어올렸으니, 서주 그 누가 추격대를 맡았어도 질 이유가 없었다.
“화끈하시구만.”
그는 낄낄거리면서 내 몸에 기댔다.
“좀, 무겁잖니.”
“조금만 기댑시다. 불편해서 그래.”
그는 태평하게 말하면서 내 등에 머리를 기댔다.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묘하게 오싹했다. 말에 타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 숨결이 느껴지는데, 정작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마차도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조숭을 살릴 수 있었다.
비록 잃은 것은 많았지만, 적어도 더 큰 것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리고 서주 대학살이라는 조조 최대의 주홍글씨를 지울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던 차였다.
“에라이 씨바아아알!!”
저 뒤에서 큰 고함이 들렸다.
그리고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내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전호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확 쏠린 것. 거기에 눌려 잠깐이지만 고삐를 놓칠 뻔했지만, 무엇보다 들려왔던 섬뜩한 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퍽하고.
무언가가.
“…돌아보지 마.”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 들렸던 그 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 것이, 그런데도 그는 내 등에 머리를 기대면서 웃고 있었다.
“그냥, 달려.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
“방금 그 소리는….”
“그냥 가. …괜찮으니까.”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내 등에 축 늘어져 기대었기에 그 무게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무슨 일인지도 전혀 모르겠는데, 그런데도 그는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다.
“오늘도 날이 참 좋지.”
전호는 엉뚱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차마 답하지 못하고 계속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만약 그가 화살에 맞았더라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 어쨌건 큰 상처를 입었더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달려야만 했다.
“나중에… 말이야.”
그는 내 등에 고개를 묻으며 말하고 있었다.
“정말 나중에…, 다시 봄이 오면 말이야….”
그때는 꽃놀이를 가자.
그의 말에 차마 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서 서둘러서 조조에게 향해야만 했다. 분명 전호의 몸에 무슨 큰 이상이 생긴 것을 느꼈지만,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상황.
이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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