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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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연주 내에서의 반발은 어느 정도 진압이 되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조조의 이름 아래에 연주 통치를 막 시작한 상황. 아가씨나 진궁 선생, 조조는 굉장히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조조의 휘하로 막 가담한 순가의 선생들이나 정욱 영감 등. 새로운 얼굴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분주하게 움직이니 이제 정말로 한 주를 운영한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시기.
나는 거기서 더 할 것도 없는 것 같아 조조나 아가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냥 영지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복양 성주라는 작자가 복양성보다 연주성에 더 오래 머무르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냐?”
“시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쇼? 글도 모르는 새끼를 뭐? 성주 대리? 대장이 진짜 세상 사람이 맞긴 하오?”
방삼이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막 도착했을 때 분명 미안하다고 했는데. 아직도 원한이 남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는 꼬락서니를 보면 이놈도 남자 되긴 글렀다.
“그건 전호 동생이 잘못한 게 아닐까?”
“거, 아무리 물주님이라고 해도 그렇지. 누가 댁 동생입니까?”
이번 복양성으로 나설 때 내 뒤를 사마의와 조홍이 함께 따라왔다. 사마의야 뭐 그렇다 싶지만, 조홍 이 여자는 대체 왜 따라오는가 싶었는데.
예전부터 직급이 복양성 교위라더라.
“어허? 이제 볼일 다 끝났다 이거니?”
“아니 대체 무슨 볼일이 있었다고.”
“너 그때 복양 방위전 때 물자가 누구 돈으로 나왔는지 모르니? 그때는 울며불며 매달리더니, 이제는 다 끝났다 이거야? 나는 돈만 보고 만나는 여자였니?”
아니, 장담컨대 울며불며 매달린 적 없다.
물론 그때 당시 급하게 구호물자나 군수품을 수급하기 위해 이 여자에게 손을 벌린 것은 맞으나, 그게 어떻게 울며불며 매달린 것이 된단 말인가.
아 좀 성공하면 갚는다고요.
“누구 쓰레기처럼 만들지 좀 마십쇼.”
그게 다 나 좋으려고 빌린 것도 아니고. 응? 전부 조조 그 양반 좋으려고 맡긴 거, 그 거점 하나 지키겠다고 빌린 거지.
“사실 농담이야. 사실 그거 언니가 전부 갚기로 했거든. 동생, 얼굴 새파랗게 질리던데 설마 진짜 갚으라고 할 줄 알았니?”
“당신이라면 그럴 거 같았어.”
빌어먹을 수전노.
그간 여러 번 얼굴을 맞댈 일이 있었기에 아는 것도 있었다. 단돈 한 푼도 절대로 잃으려 하지 않는 여자. 계산은 확실하게 반반. 돈도 많으면서 밥 좀 사달라고 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어머? 얘도 참.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돈에 깐깐한 여자인 줄 알겠네. 내가 지금까지 이 군에 얼마나 썼는지 알고 하는 소리인지?”
“전부 조공한테만 쓰는 거잖소.”
그 유일한 예외대상이 조조인 것을 누가 모른다고.
황금 투구를 걸친 여걸.
수전노 조홍.
조조와 가장 흡사한 얼굴이지만, 은발과 금발. 적안과 벽안. 서로 닮았되 정반대의 인상을 주는 이 여인의 가장 큰 약점이 조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설령 하후돈 같은 일가친척이라도 돈 관련된 문제에는 철벽을 치면서, 정작 조조에게는 오히려 돈 필요한 구석이 없냐고 엉겨 붙는 꼬락서니를 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닌데? 난 천하를 위해 돈을 쓰는 것뿐인데?”
“엉?”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금발.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내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발짝. 천천히 내게 다가온 그녀가 이윽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언니는 천하를 위해 일하고 있어.”
조홍은 그리 말하며 내 뺨에 손을 가져갔다.
“천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쓴다. 그건 곧 천하를 위해 돈을 쓰는 것과도 동의어가 아닐까? 물론, 조금 방식은 과격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
내가 보기에는 조금 수준이 아니지만, 뭐 사람이 보는 시선은 천차만별이니까. 적어도 조홍이 바라보는 조조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내게는 아직도 대단할 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인데.
“동생도 언니를 너무 싫어하지 말아줘. 동생이 바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언니는 올바른 것을 위해 살고 있으니까.”
“흥. 친인척의 추천은 안 받는 거 모르쇼?”
“그도 그렇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픽 웃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내가 조조를 싫어해? 딱히 그런 적은 없었다. 물론 조금 껄끄러운 것은 있었지만, 적어도 껄끄럽다는 감정이 싫다는 감정과 직선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내가 조공을 싫어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었을까 봐? 이거 좀 보쇼, 이 죽간 더미. 평생 칼밖에 안 잡아본 사람이 이딴 일이나 하고 있잖소.”
“대장. 대장이 나한테 맡긴 게 그런 거거든?”
방삼아. 제발 이럴 때 찌르지 마라.
“아 좀. 미안하다고 했잖냐. 시발 어디 도둑놈 하나 성주 대리까지 시켜줬으면 성공했구나 해야지,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누가 시켜달라고 했수?”
빌어먹을 놈.
하여간 이 복양에는 내 편이라고 할 사람이 없구나. 그나마 사마의 정도가 오롯이 내 편을 들어주는 아이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다른 일을 시켜둬서 이 자리에 없고.
방삼이는 근래 들어서 툴툴대는 빈도가 늘어났다.
좀 너무 막 굴려 먹어서 그런가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반평생 얼굴 맞대고 살아온 제 대장한테 너무한 것이 아닌가.
이거 직장 내 괴롭힘 맞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홍이 내 뺨에 갖다 댔던 손을 떼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다는 모양새였다.
“동생네는 재밌게 노네.”
“재미요? 실시간으로 죽겠는데?”
참고로 난 이 상황에 어떤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밀려오는 죽간의 산을 보라. 전쟁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성벽의 보수라던가 전사한 이들에 대한 보상금이라던가, 아무튼 그런 행정업무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무슨 도시 내 생산력을 위한 개간이라던가. 성 바깥 촌 같은 것도 관리해줘야 한다는데, 시발 이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대부분은 사마의가 노력해주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대충 도장을 찍거나 성내를 돌면서 점검, 보수. 그리고 뭐 적당한 물자의 관리일까. 사마의가 죽는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만, 안타깝게도 내정에서 그걸 보좌해줄 사람이라고는 조홍 장군밖에 없었다.
이거 솔직히 문관의 지옥 아닌가?
“다음에 발령 나면 절대로 성주는 안 맡을 거요. 조공이 혹시 물어보거든 단단히 말해두쇼. 절대 뭐 내정 같은 거랑은 떨어뜨려 달라고.”
“뭐, 언니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 안 시킬걸? 이번에 동생이 복양으로 내빼고 나서 얼마나 날 못살게 굴었는지 아니?”
내빼다니. 내 부임지 가겠다는데 그게 어떻게 도망이 되는가? 물론 좀 내부적으로 북적거리기에 더 있다가는 귀찮은 일을 맡을 거 같아서 복양성을 핑계로 연주성에서 벗어난 건 맞지만, 생각해보니까 여기가 더 지옥이었다.
“연주성은 사람 많잖아요. 여긴 뭐.”
생각해보니까 방삼이는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내부를 다스렸을까. 나야 사마의랑 조홍 장군을 대동하고 왔으니까 이렇게라도 처리가 가능한 거지.
“방삼아. 너 은근히 똑똑하니?”
얘 머리로는 이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놈은 나보다도 조금 더 멍청한, 솔직한 말로 몸 밖에 쓸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었다.
“염병. 그냥 내부 치안정리나 하면서 어떻게든 대장 오는 거 기다린 거지. 세수 같은 것도 제대로 처리할 리가 있나. 그나마 복순이가 있어 주었으니 망정이지.”
“아, 걔 글 읽을 줄 알지.”
예전부터 방삼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계집애라면 가능은 하겠다. 저번에 온현에서 백파적을 물리칠 당시 내 부관을 맡겼을 정도로 나름 머리 돌아가는 애니까.
그런 애가 이런 못생긴 놈이 뭐가 좋다고 그리 따라다니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뭐 자기가 좋다는데 어쩌겠나.
“어쨌거나. 난 이제 다시 치안 돌러 갈 거니까 그만 좀 붙잡으쇼. 앉아서 도장만 찍는 게 심심한 건 알겠는데, 대체 몇 시간째요?”
“아니, 그치만 심심하잖아.”
좀이 쑤신다.
솔직한 말로 나도 치안 업무를 핑계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바깥 공기가 필요하다. 여기가 뭐 좁다거나 답답한 건 아닌데, 그래도 지금 며칠째 앉아서 도장을 찍거나 죽간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슬슬 나도 몸을 쓸 시간이 필요한.
“아, 아저씨. 심심하셨어요?”
“대장. 난 갈 거요. 잘 있으쇼!!”
방삼이가 후다닥 도망쳤다. 저놈이 저렇게 빠른 놈이라는 건 내 살면서 처음 알았다. 고개를 돌리니 조홍 장군은 언제 사라졌는지 진즉에 모습을 감췄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빨랐구나.
평소에도 좀 그렇게 빨라 봐라.
“그렇게 심심하면 말씀을 하시죠.”
눈 밑으로는 거뭇거뭇한 기미가 보였다. 이 가녀린 소녀는 누가 보기에도 피로에 전 모습인데, 그런 몰골로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은 어쩌면 공포 그 자체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말이다.”
“누구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고작 도장 찍는 일만 드렸더니 심심하시다고요. 아, 그럴 수 있겠네요. 이건 제가 인선을 착각했어요. 죄송해요.”
“아니 뭐가 죄송해. 고개 들어 임마. 어?”
그러지 마라.
축 늘어져서는 고개만 까딱거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데. 예전에는 생기 돌던 보랏빛 눈동자에 빛이 꺼졌다. 머리카락도 몸과 같이 축 늘어져서 힘을 잃었고, 소녀의 표정은 그야말로 무표정 그 자체였다.
“아저씨가 이렇게 일에 열정적이신지 몰랐어요. 그렇죠. 생각해보니까 도장만 찍으시면 심심할 수도 있겠네요. 이건 제가 착각했어요.”
한 발짝.
“아니다? 나 안 심심해? 이거 봐라! 내 손에 지금 굳은살 밴 거 안 보여? 그간 붓 쥐고 얼마나 글을 썼는데, 어?”
한 발짝.
“그래, 그렇지. 의아야. 너 오늘 피곤하지 않냐? 오늘 나랑 물놀이라도 갈래? 조홍 장군이랑 방삼이도 부르자. 그래, 사람이 좀 쉬어주기도 해야지!”
또 한 발짝.
천천히 내게 다가온 사마의가 이윽고 바로 코앞에 도착해서는 앉아있던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린 소녀의 손이 무거울 턱이 없는데도 묘한 무게감은 무엇인가.
“아저씨.”
“네?”
목소리가 떨렸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이미 내 미래를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 솔직히 내가 이 어린 계집애를 너무 부려 먹기는 했지. 너무 성능이 좋아서 막 부려 먹었는지도 몰랐다.
이건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
“앞으로는 현 내 개간 작업이랑 벌목권, 성내 상권과의 교섭이랑 복양 내 호족과의 회담. 좀 맡아주셔야 할 부분이 많을 거예요.”
이건 앞으로 내가 죽어 나갈 부분.
이야, 내가 살면서 후회라는 걸 딱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이번만큼은 좀 후회가 되는 것이, 복양 성주로 임명한다고 할 때 승진이라느니 떠들기 전에 배를 깔고서라도 거절했어야 했다.
“저, 의아야?”
“왜요? 아저씨.”
“내가 아직 그런 일을 처리하기에는 조금 미흡하지 않겠느냐? 그, 있잖아. 아기에게 갑자기 걸음마를 시키는 부모도 없다고 하고, 응?”
그러니 소녀가 환하게 웃었다.
“전부 가르쳐 드릴게요. 제가 아저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 사랑만큼 확실하게 가르쳐 드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하, 하하하. 고, 고맙네 그거참.”
이 사마의, 성능 좋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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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 또 올라옵니다. 몸 컨디션이 안 올라오네요... 여러분도 날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이런 시기에 감기 걸리면 밖에 못 돌아다닙니다...ㅠㅠ
조홍 일러스트가 나왔습니다!!! 개미인간님이 공모전 당선기념을 겸하여 열심히 작업해주셨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모전 당선된 거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