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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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애당초 풍족한 식량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터인 민란이었기에 더더욱. 그 움직임이 날이 가면 갈수록 무뎌지는 것을 복양에 있던 모두가 체감하고 있었다.
“아저씨, 지금이에요.”
사마의가 탁자를 손으로 딛고 일어났다.
군중회의로 모인 자리에서, 막 군의를 시작하려는 차에 사마의는 가장 먼저 선수를 쳤다. 아직 성주인 전호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기에 다소 침묵이 흘렀다.
“무슨 소리냐?”
“저 도적들의 움직임이 둔해졌어요. 애당초 겨울 추위가 맹위를 부리는 한복판에 저런 얕은 보급으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어요.”
소녀는 그리 말하며 지도를 꺼냈다.
복양성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대부대가 자리 잡은 위치. 거기에서 빠져나갈 가도는 산을 거치는 다소 협소한 가도였다. 아마 그곳을 거쳐야만 복양 이북으로 나아가 청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
“애당초 진 자체를 저리 쳤다는 건 언제든 뒤로 물리기 위해 퇴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산세 사이로 지나지 않으면 연주 내로 빙 돌아가야 해요.”
“그건 알겠는데 말이야.”
전호는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뭐가 지금이라는 말이냐?”
그 말에 사마의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지 소녀의 반대편에 있던 진궁만이 표정을 싹 굳히며 소녀와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부대가 움직임이 둔해졌어요. 당연히 기존에 준비했던 것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고, 그러면 당연히 후퇴하겠죠?”
“네 말은 뒤를 치자 이거냐?”
“그럼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산세 사이로 이어지는 가도를 가리켰다. 산세를 양쪽으로 끼고 있는 그 길은 좁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십만이 넘는 인파가 이동하기에는 다소 모자랄 넓이였다.
“저희가 기병을 데리고 왔던 것을 여기서 써먹을 수 있겠네요. 저들이 저 가도에 접어들었을 때, 그 뒤를 친다면 확실하게 대파할 수 있을 거예요.”
“고작 이백 기밖에 없는데?”
“이미 추위의 맹위와 지옥 같은 굶주림을 겪고 뒤를 보인 적이에요. 이백? 백만 있어도 충분히 배후를 완전히 부술 수 있을 거예요.”
그만한 머릿수의 배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성공한다면 자연스럽게 중앙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잘만 한다면 기병으로 죽는 이보다 서로 도망치기 위해 달리다가 밟혀 죽는 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사마의는 그리 생각하며 산세 중앙의 가도를 가리켰다.
“나선다면 지금이에요. 완벽하게 적을 부수고 공적을 쌓을 수 있는 방법. 아저씨가 조조에게 본인을 증명하실 수 있는 특급 공훈일걸요?”
전호는 그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소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약 적이 본격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배후를 덮친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등을 보인다면 기병에게 있어 그보다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그런데도 전호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어머, 사마 꼬마? 우리 언니는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소년을 인정하고 있거든? 게다가 기수들이라고 수성전에서 손 놓고 있던 것이 아니고, 말도 이런 추위에는 다소 굼떠질 건데.”
“말은 싸리로 적당히 비비면서 몸을 풀어주면 그만이고, 기수들이요? 애당초 그들의 본래 목적을 떠올려야죠.”
사마의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조홍의 말에 반박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전호에게 돌려 목소리를 높였다.
“저들을 물리치는 건 동아현에 있을 아군의 부담을 더는 것이기도 해요. 그리고 여기서 전공을 쌓는다면 앞으로 아저씨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망설이지 마라.
비록 말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전호는 소녀가 그리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방삼은 그들의 의견을 들으며 그저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킬 뿐.
조홍도 그 말에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비록 전공을 쌓아야 한다는 말에는 조가의 인간으로서 조금 거슬리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것은 군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것. 조조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군 소속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진궁만이 그 침묵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살짝 말을 끊고 숨을 들이켰다.
“자칫 피해만 늘릴 수도 있어요. 저들이 비록 무장은 온전치 못하다고 해도 그 숫자가 대해와도 같으니, 겨울 추위에 기마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그대로 매몰될 우려도 있지 않을까요?”
“성주께서는 가능해요.”
그 말에 전호가 살짝 얼굴을 감췄다.
소녀는 떳떳하게 제 가슴을 펴며 우리 아저씨가 이만큼 대단하다고 자랑하듯이 으스대고 있었는데, 그건 전호에게 있어서는 그저 부끄러운 무언가일 뿐이었다.
“저희 성주께서 기병대장으로 활약하는 걸 못 봐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적어도 저런 누런 것에게 질 리가 없어요.”
“제발 그만.”
전호는 개인적으로 진궁에게 좋은 모습으로만 남고 싶었던 것이 있어, 지금 사마의가 하는 말은 부끄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궁은 살짝 입을 가리며 전호를 바라보았다.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때 하셨던 말과 지금 상황. 그 모든 걸 고려하고 결정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저번에 그가 했던 말을 꺼냈다.
그것은 사마의도 모르는 둘만의 일. 진궁은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정으로 보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녀 개인으로서도 전호가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죽이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근래 곁에서 본 전호의 모습은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것이, 그런데도 오기를 부리면서 억지로 일어선 모습처럼 느껴졌다.
사마의는 미묘한 시선이 오가는 모습에 이를 깨물었다.
또 자신을 쏙 빼놓은 교류가 있었다. 저 사람은 자신이 빛낼 것인데, 자꾸 이런 이상한 돌발상황이 생기는 것이 소녀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특히 진궁은 소녀의 바람과는 다른 것을 꾸미는 것만 같아서, 소녀는 그것이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 주부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 상황이 아니면 언제 저들을 대파 가능하다고요? 지금이 나서야 해요. 아저씨, 틀려요?”
“아군의 피해도 생각해야만 하잖아요. 불필요한 전투를 원하는 병사는 없고, 저들이 추위에 몸부림을 쳤다는 것은 아군도 마찬가지예요.”
둘이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의견을 부딪쳤다.
나아가야 한다, 멈춰야 한다.
“아저씨, 지금은 나가죠. 하다못해 저들의 치중이라도 전부 못쓰게 만들 수 있다면 확실하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어요.”
“치중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아요.”
“설마 보급품을 앞에 세웠으려고요. 군의 편제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이들이니, 분명 후위 사이에 배치되어 있을 게 뻔해요.”
사마의의 의견에 진궁이 반박한다. 소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진궁의 말에 한마디도 지려 들지 않았다. 아득바득 반론에 반론을 이어가는 모습.
어느 것을 선택해도 옳았다. 어차피 행하는 것은 그였고, 이 자리의 책임자는 복양 성주인 전호 본인이었다. 적의 배후를 치는 것도 옳으나, 자칫 그 인파에 묻힌다면 그대로 전멸당할 우려도 있는 작전.
그러나 성공한다면 확실하게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안건이었다. 고작 이백 기의 기병으로 줄 수 있는 피해는 크지 않더라도, 그들이 호송할 치중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그러나 이미 식량이 부족해 퇴각하는 이들이었다.
이백 기의 기병으로 줄 수 있는 치중의 타격은 크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식량난에 허덕이는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리라.
성공한다면 많은 이들이 죽는다.
그것이 자칫 벌집을 건드린 꼴로, 식량 부족으로 인해 퇴각마저 포기하고 다시 복양으로 머리를 틀 우려가 있었다.
사마의의 제안은 그런 것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다시 저들이 복양으로 돌아올 우려도 있어요. 아군의 피해와 피로를 생각하면 그냥 보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 설령 막더라도 아군과 적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어요.”
“적이 훨씬 더 큰 피해를 보겠죠. 저들은 도적이고, 아군은 그걸 막아내며 물리칠 수 있다면 물리치라고 파병된 것이고요.”
진궁은 그들 역시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사마의는 그들 모두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정했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서로의 의견에 반박을 말미암으며 납득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고, 전호는 그녀들의 의견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본디 도적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떤 이유와 논리로 민란을 일으켰는지도 알고 있었다. 청주에서 여기까지 넘어오려면 선동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생애가 처절하리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사마의와 진궁은 여전히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홍과 방삼은 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이 자리의 모든 권한은 성주가 가지는 것. 둘은 전호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수긍할 생각이었다.
어린 소녀의 말도, 원숙한 여인의 말도 전부 일리가 있었다. 경력과 연배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진궁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맞겠지만.
“방삼.”
“예.”
“군을 준비해라.”
전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삼이 그에 맞춰 따라 일어나니, 사마의는 다소 낯빛을 환하게 하였으며 진궁은 조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진 선생님. 지금은 출격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 말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움은 있으나, 그 이상으로 저들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었다. 가령 그들이 퇴로로 동아현을 고른다면 조조와 소연 모두에게 부담을 얹는 꼬락서니였다.
아마 치중에 타격을 입으면 저들은 다시 머리를 돌려 복양성으로 향하겠지. 구태여 복양에서의 전투를 끝낼 수 있음에도 재차 전투를 벌이는 짓일 수도 있었다.
전호는 그것 모두 이해하고도 결론을 내렸다.
전호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마의.”
“네, 아저씨.”
웃는 낯으로 그를 돌아보는 소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일까. 사마의는 당연하다는 표정 뒤로 다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견은 채택하겠으나 다음부터는 존중을 겸해라. 진 선생님이 그래도 너보다 경력이 많은 분이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황건적이 복양을 공격하지 않고 벌써 사흘이 흘렀다. 이 정도면 슬슬 저들 내부에서도 퇴각을 준비하자는 의견이 나올 때도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기에 군의 채비는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이 누나는 어떻게 해줄까?”
“조홍 장군은 성을 지켜주십쇼.”
그와 방삼이 떠난다면 누군가는 성내에 남아 군을 다스려야 했다. 진궁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무관인 그녀가 남아주면 도움이 될 터.
전호는 방삼을 대동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회의장에 남은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이내 그 서먹한 분위기가 질색이었던 조홍이 쓰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남은 것은 사마의와 진궁뿐.
“죄송해요. 제가 결례를 범했어요.”
사마의는 먼저 진궁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까까지의 당찬 모습과는 별개였던지라 진궁이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어린 자신의 딸이 생각나서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지금까지 전호 장군 옆에서 많은 걸 했다고 들었어요. 책사라면 응당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줄도 알아야죠. 저는 개의치 마시고, 전호 장군이 나무랐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따스하게 받아주는 진궁의 말.
사마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걱정? 그런 것을 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는 진궁의 의견을 묵살했으니, 자신을 낮추며 진궁의 기분을 달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속이 상할 게 무엇이 있을까.
오히려 소녀는 기분이 좋았다.
결론만 놓고 보아 그에게 더 도움이 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어차피 그 사람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책략으로 군의 방향성을 정하는 책사로서 자신의 안이 받아들여진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무어가 있을까. 결국 이 자리에서 승리한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제 무례를 흔쾌히 허락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진 주부님의 말씀에도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앞으로도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사마의는 단 하나도 동의하지 못했다.
아군의 피해와 피로 누적? 애당초 싸우려고 차출되었고 거기에 동의한 병사들이었다. 전투 수행에 차질을 빚는 정도면 모를까, 승리가 확실한 전투에서 피해를 두려워해선 누구도 지휘할 수 없었다.
하물며 적의 안위를 걱정한다? 언어도단.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면 전호는 더욱 높은 자리로 올라갈 터. 사마의가 가장 바라는 것도 그것이었으니, 소녀는 앞으로도 그의 승리만을 위한 책략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진궁이 손을 내밀고 사마의가 붙잡았다.
조그마한 손을 맞잡은 진궁은 그 천진난만해 보이는 소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마치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한가지 안건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던 책략가로는 보이지 않는 무구한 눈동자.
위험한 아이였다.
타인의 목숨을, 그 노고와 고통을 모르는 아이였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단지 승리만을 위한 책략을 고려하는 모습이 그녀에겐 짐짓 위험해 보였다.
분명 복양에서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나이에 맞지 않는 번뜩이는 재치와 재능을 보인 아이였지만,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이런 부분에서는 전혀 타인과 공감을 못 하는 아이였다.
이것이 어린 나이에 재능을 드러냈기에 따라오는 치기인가, 아니면 단지 사마의라는 소녀의 천성인가.
전자라면 좋겠지만.
소녀와 여인은 그렇게 손을 맞잡았다.
사마의는 진궁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진궁은 사마의가 조금 께름칙하다 느꼈다. 둘 모두가 다른 마음을 품으며 웃는 낯으로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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