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106화 (106/343)

106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청주발 황건 도당 191년 12월의 끝자락.

곧 연도가 변한다. 눈송이가 펑펑 내리기 시작하면서 전쟁도 다소 고착되어가는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굵은 눈발이 뺨에 닿았다. 이윽고 체온에 녹아 물방울이 되어 흐르는 것을 손등으로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총 8번의 교전.

아직 실질적인 전쟁으로 발발하고 고작 보름 가까이가 지났다. 그간 그들은 하염없이 동문을 가장 주력으로 공격해오고 있어, 나중에는 진궁 선생까지 군을 이끌고 도우러 와야 할 정도로 전투가 격화되었다.

병사들이 지쳤다는 걸 분위기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장군.”

“아, 진궁 선생님.”

이제는 그녀가 주부의 자리에서도 잠시 내려왔기에 호칭도 애매해져, 결국에는 선생이라 부르는 관계가 되었다.

근래 계속 얼굴을 마주하면서 같은 전장에 섰기 때문에 전보다는 훨씬 더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유한 구석이 있는 데다가 주위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기도 했고.

“몸은 좀 어떠세요?”

“이 정도는 문제없죠.”

재수 없게 화살을 맞았던 왼쪽 어깨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아직은 아물지 않아 조금은 쓰리지만, 적어도 당장 전장에서 움직이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심하세요. 겨울이라 한 번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낫지도 않을 것이니, 어지간해서는 전장에 직접 서지 마시고요.”

“예입, 명심하겠습니다요.”

“정말. 이럴 때 보면 말 안 듣는 어린애 같다니깐.”

그러면서도 싫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전선에 변화는 없었다. 저들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성을 두드린다.

추위에 손발이 파리하게 얼 정도로 방비조차 되지 않았으면서. 살갗이 터지면서도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저 모습은 무엇인가.

“표정이 안 좋네요.”

“저들도 원래는 청주의 백성 아닙니까.”

모든 이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많은 이들이 이 겨울날에 조악한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인다는 극단적인 발상을 하게 된 원인을 생각하면 조금은 심란한 마음이었다.

저 마음을 어찌 모를까.

“살아도 죽음이요, 엎드려도 죽임이니.”

“전호 장군님?”

“그러면 싸우는 게 맞지 않습니까?”

단지 저들은 그 방향성을 착각했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방향성도 지정되지 않았던 분노까지 전부 포함해서 격정의 진로를 정했겠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예전에는 도적질도 하고, 뭐 이래저래 적당히 살아서 압니다. 세상이 다 원망스럽고, 가만히 있자니 겨울인데도 곳간이 텅 비었어요.”

먹을 것은 없는데 정작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다. 빈 곳간은 이미 쌀 한 톨 나올 일 없는데, 살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는 삶.

내가 오원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던 때도 그랬다.

황건적과의 전투에 동원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마땅한 수익이 없었다. 땅도 없으니 무언가가 공짜로 나올 리 없이 그저 가끔 용병으로 팔려 다니며 살았지만, 그걸로 어떻게 한겨울을 버틸까.

식량도 떨어져 배를 부여잡고 굶주리는 생.

그것이 싫어서 검을 쥐었다. 사람을 모아서 잘산다는 호족들을 털어먹고, 상인들을 털어먹고. 가끔은 같은 도적도 털어먹으면서 살았다.

그게 내가 도적이 된 이유였다.

“저들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을 겁니다.”

황건적을 모은 수뇌부에는 모은 식량이 있었다. 적어도 누런 두건을 두르고 찾아가면 일용할 한 끼를 내어줄 정도는 모였을 것이니, 거기에 이끌려 저 많은 사람이 모였으리라.

그건 분명 황실의 관료들에게도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도 먼저 손길을 한 번만이라도 내밀었더라면. 저 굶주린 민초에게 끼니라도 제대로 때울 수 있게 도왔더라면 저 많은 이들이 도적이 될 일도 없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저들과는 갈라섰으니, 전호 장군의 마음은 알겠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참. 장군도 너무 착해서 어떡해요?”

“착해요? 제가?”

인간 백정도 이런 백정이 없을 것인데.

피비린내가 손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이제는 너무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뭘 제일 잘하냐고 물어보면 당당하게 인간을 때려잡는 일이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진궁이 손을 맞잡았다.

내 손이 차게 식었기 때문일까. 부드럽게 맞잡는 손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갖은 전장을 굴렀던 손과는 다르게 아직 부드럽고 뽀얀 살결.

“아우, 우리 전호 장군님. 왜 이렇게 귀여우실까.”

이제는 아예 싱글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어떻게 이렇게 착하게 자랐어요? 저희 딸내미는 요즘 반항기인지 속만 썩이는데, 장군을 보면 어찌 이리 마음이 따듯해질까요.”

“아니, 선생! 좀 놓으쇼!!”

이제는 손을 둘러 내 머리를 잡고는 끌어안았다.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처박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대로 내 뒤통수를 꾹 누르면서 웃는 것이 아닌가.

“수, 숨!! 선생!?”

“잠시 이러고 있어요. 대견해서 그러니까.”

아니, 대견이고 나발이고.

물론 기분은 좋았다. 말캉한 여성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어 기쁘지 않은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따듯한 체온과 살짝 달콤한 여성의 체취가 느껴졌다.

“조공도 참. 이런 사람을 어찌 전장에 보내실까요.”

진궁은 그리 말하며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제가 그간 계속 생각했는데요.”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각. 그녀는 마치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나를 품었다. 차가운 겨울에 느낄 수 없었던 온기를 느끼면서 살짝 저항하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전호 장군은 역시 군부의 일이랑은 별로 안 맞네요. 적성이 틀렸어요. 제가 전호 장군의 가족이었다면 분명 관리직을 추천했을 거예요.”

“제가요? 아직 글도 잘 모르는데.”

사마의에게 계속 배우고는 있다지만, 안타깝게도 복잡한 문법은 아직 잘 모르겠더라. 가끔 그 꼬맹이가 답답하다면서 사람을 들들 볶는데, 그럴 때마다 재능이 없나 싶어서 마음이 꺾일 것 같았는데.

“위정자의 가장 큰 덕목은 공감이에요. 사람에게 공감하고, 그 아픔이나 기쁨을 같이 느낀다면 그들에게 맞는 정책을 펼칠 수 있잖아요?”

“아니 뭐, 그야 그렇겠지만.”

그렇지만 조금 다르다.

내가 저 황건적이 어떤 마음으로 싸우고 있을지 아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걸 위정자의 덕목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와 공감하더라도 이해하지 않는 이들도 있어요. 고생했으니까 되려 자신의 보신에 열중인 사람도 있어요.”

순간 내 머리에 따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진궁은 날 끌어안은 상태로 고개를 숙여, 내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작게 읊조렸다.

“그 마음을 잊지 마세요. 세상이 언젠가 평화로워진다면, 그때는 장군의 그런 마음으로 보듬어야 할 사람들이 많아질 거니까.”

언제가 되어야 그런 날이 올까.

소연 아씨는 조조를 따랐다. 나야 어찌 되건 좋은 것이, 사실 이 천하에서 전쟁이란 단어를 지우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조를 따라도 나쁠 것은 없었다.

단지, 그러네.

“진궁 선생님. 춥습니다. 들어가셔야죠.”

“그러게요.”

그제야 진궁은 내 머리를 놓아주었다. 몸을 겹치며 느꼈던 온기가 떠나 조금 허한 기분도 들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적도 쉴 모양새입니다. 관청으로 가시죠.”

아직 할 일은 많았다.

조금 지쳤던 것도 그녀와 잠깐이나마 대화하면서, 그 품에 몸을 맡기면서 다소 편해진 부분이 있었다.

물론 당분간 전쟁은 계속 지속할 터였지만, 그래도 누군가 날 이렇게 인정해주는 것은 다시 몸을 일으킬 원동력이 되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가면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릴게요.”

“아, 선생님 차는 좋죠. 솔직히 사마의 그 꼬마가 타는 차는 너무 떫어요. 제 딴에는 무슨 향이라느니 어쨌다니 하는데, 맛만 있으면 뭐든 좋은데.”

그 꼬마는 도무지 양보를 몰랐다.

양갓집에서 난 것은 알겠지만, 내 입맛은 양갓집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을. 그런 차이를 좀 이해하고 적당히 달달하게 타면 뭐 덧나기라도 하나?

“그 아이도 차는 잘 우리는데.”

“제 입맛엔 영 꽝이라서 문제죠.”

우리는 그리 대화를 나누며 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굵은 눈송이는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지상을 뒤덮고 있었다.

백색으로 물드는 세계.

그것은 그간의 전투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펑펑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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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덕. 조인이 전령을 보냈어. 태산 일대의 전투에서 승리, 적의 퇴로는 확실하게 막았다고 하더군.”

“좋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황건적의 퇴로까지 완전히 가로막은 셈. 이제 그들은 청주로 돌아갈 길을 잃었고, 앞으로도 연주에서 계속 진군할 수밖에 없어졌다.

이걸로 연주 내에 그들을 가두었다.

“연주자사는?”

“군을 모으고 있다더군. 우리에게도 전서가 도착한 걸 보아, 각지에서 군을 모아 황건적과 일전을 벌일 생각인 듯한데.”

하후돈은 그리 말하면서 인상을 썼다.

조조군은 결코 지금 나설 생각이 없었다. 마침 복양에서도 황건 도당을 대거 묶어두고 있었고, 동아현에서도 전투는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걸 핑계로 하여 연주자사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었다.

연주는 한 바탕 지옥이 되리라.

거기에서 유대가 패한다면. 죽어주면 좋겠으나, 적어도 대패를 경험한다면 그 뒤가 바로 조조군이 나설 차례였다.

“맹덕, 괜찮겠나?”

“무엇이?”

“이러면 연주 내는 큰 혼란이다. 퇴로까지 잃은 황건적이 뭐가 두려울까. 아마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으며 진격할 터인데.”

오히려 그녀는 그것을 바랐다.

그들이 공격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연주자사는 애가 탈 테니, 그가 나설 수밖에 없는 판은 깔아두었다.

연주자사가 나설 수밖에 없는 전장.

그 상대는 가히 백만에 가깝다는 황건의 무리.

“여기서 유대가 패한다면 연주를 잡을 수 있다.”

어차피 연주에 있건 청주에 있건 황건적은 주변에 피해를 부르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묶어 전투를 치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유대를 한 번 패퇴시키고, 그녀 본인이 나서서 그들을 처리한다.

순서는 조금 바뀌지만, 어쨌건 황건적을 물리칠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그것을 조금 뒤로 미뤄 그녀 본인의 욕심을 채울 뿐.

“판은 깔렸다.”

여기서 성공한다면 그녀도 한 주의 주인이 된다.

“맹덕,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무얼 걱정하는가.”

연주가 지옥이 된다? 그러면 저들이 다시 청주로 돌아간다고 하여 지옥이 아닌가. 저들은 어디에 있건 주변을 지옥으로 만드는 아귀가 되었다.

제가 굶주렸다는 이유로 타인의 것을 탐하는 악마.

연주의 백성들이 조금 고달파지겠지만, 그러하면 청주로 곱게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가? 청주의 백성도 마찬가지로 백성이었다.

“원양. 걱정하지 말도록.”

비록 잠시 방관하는 모양새를 취하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였다. 연주자사가 나선 이후에는 그녀도 군을 움직여 황건적과의 일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계획은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잡은 지휘봉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저 멀리, 흰 눈이 내리고 있는 들판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희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핏물로 다시 새빨갛게 물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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