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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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파악한 바로는 흑산적의 숫자는 대략 2만에 가까운 숫자라고 들었다. 정확한 숫자는 다시금 확인해봐야 알 노릇이지만, 적어도 아군 숫자에 배는 될 것이 분명한 규모.
“우리는 어떻게 항상 숫자가 모자라?”
“아직은 어쩔 수 없지.”
소연 아씨가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생각해보면 오원군에서 지금까지 상대보다 많은 숫자를 거느리고 전투를 나선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 있던 것은 여포와의 일전이었을까. 그것도 사실 군을 연합했기에 그랬고, 그나마도 패전에 가까운 전투였다.
지금도 보면 아군의 숫자는 약 7천일까. 반면 흑산적의 숫자는 2만에 가까운 병력이니 이것 역시도 숫자 차이가 컸다.
물론 적은 경험이 많다고 해도 도적 집단. 아군은 상비군이면서 여러 전투에 나섰던 병력이기에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만인 건 어쩔 수 없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해봐. 기병대장님.”
“쉰 소리는.”
이번 전투에서는 기병을 거느리고 별동대처럼 움직인다.
최근 전장에서 아가씨의 곁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 다소 찜찜하긴 했지만, 아가씨 역시도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성공적으로 군을 이끌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저마다 발전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서로 발전하고 있으니 그 뒤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건 어떤 의미로는 오원에 있을 적의 모습과는 큰 차이로 발전한 것이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점점 그때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만 같아 슬프기도 했다.
“아가씨.”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구태여 답하지 않는 선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많이 발전한 거 같아.”
“그러네.”
무미건조한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그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 때,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면 마주하고 웃을 수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 이렇게 점점 발전하고 나아갈수록 예전에 있던 모습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이라, 그게 조금 무서울 때가 있는 게.”
뒤돌아보면 언제나 그랬다.
과거 백 남짓의 애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가끔은 울타리 안에서 멧돼지를 잡아 술을 거나하게 들이켜던 모습. 서로 웃거나 다투기도 했던 모습을 이제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가씨도 그랬다.
과거 사람이 죽는 모습에도 안색을 파리하게 질렸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지휘를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
그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변해.”
얻은 것이 많았다면 잃은 것도 많았다.
“나중에 뒤를 돌아봤을 때, 처음 발걸음을 내디뎠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남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모르겠구만.”
어려운 문제였다.
조금 감상에 젖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내적인 문제는 너무 복잡했다. 코에 붙이면 코걸이요, 귀에 붙이면 귀걸이인 것을.
그런 것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건 내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잘하는 건 사람 죽이는 것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살아가는 일에도 급급했었지.
저 멀리에는 아직도 분주하게 배에서 내리는 아군 병력이 산재했다. 이송을 전부 끝내어 준비를 마친다면 바로 아군은 복양으로 진군을 개시할 터.
“나는 그냥, 아가씨의 말처럼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자랑스러운 내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아가씨도 그런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이제는 멈출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잃은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여기서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전풍은 내게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느냐고 물어봤었다.
처음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이제는 여기까지 오면서 죽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여기서 너무 힘들다고 그만뒀다가는 정말로 의미 없는 희생이 될 테니까.
“네가 원하는 내 모습은 뭐니?”
소연 아씨는 그리 물었다.
굉장히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어떤 나를 원해? 내가 어떻게 남는 것이 네가 더 좋아할까. 너는 내 어떤 모습을 보고 기뻐할 건지, 그게 궁금해.”
“그런 게 어디 있겠어.”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바라는 그녀의 모습, 소연 아씨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마음 한편에서는 어떠한 그림이 그려지고는 있었지만, 이걸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도 좋은 것인지.
순간 그 겨울날의 일이 떠올랐다.
풋풋한 입맞춤이, 겨울임에도 꽃내음이 느껴지던 앳된 기억. 벌써 반년 전의 일이었던 그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아가씨의.
“아가씨는 원하는 길을 나아가면 돼. 선두에 선 사람은 그냥 자기가 믿는 방향으로, 뒤를 따르는 사람은 그걸 믿고 따라가면 그만이야.”
그 말은 해서는 안 됐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진에 서서 길을 여는 것이 내가 이끄는 기병의 목표였다. 운이까지 대동했으니 실패해서는 안 될 일.
조금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치지나 마.”
“누굴 헛다리로 보고.”
예전이었다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그 여포와 비교하자니 패배의 걱정은 들지는 않았다. 흑산적이 제아무리 매섭다고 해도 어디 천하무쌍에 비할까.
“아가씨야말로 잘해봐. 조조한테 밀리지 마. 기죽지 마. 어차피 조조에게 걸었다고 하니 뒷말은 안 하겠지만, 적어도 꿀리지 말라고.”
“노력은 해볼게.”
한 발짝 나섰기에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조조는 확실히 괴물, 그런 괴물에게 밀리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가씨라면 충분히 그 괴물과도 비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내가 너무 편애하는 걸까.
뭐, 편애도 좀 할 수 있지.
“기억해. 내 주인은 당신뿐이야.”
“…용기가 좀 나네.”
그거면 됐다.
저 앞에선 이미 기마가 준비하고 있었다. 조조는 아군이 전부 함선에서 내림과 동시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복양성을 구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진 정도는 미리 깔아놓고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기동력에 모든 걸 맡긴 전투.
“그럼 난 먼저 실례하리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운이가 미리 나를 따를 이들을 간추리고는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합을 많이 맞춰보지 않은 이들이니 명령체계의 질서 정도는 잡아주는 것이 옳았다.
“힘내. 죽지 말고.”
그 말에 손을 휘적거리며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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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은 일부러 복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에 배를 댔기에 비교적 빠르게 복양성 인근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에 보이는 검은 두건을 두른 흑산적의 무리.
제법 숫자는 많았다.
“흠, 같은 검은색이라 그런지 영 구분하기 어렵군.”
“맹덕. 그거 진심이냐?”
“그럴 리가.”
하후돈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은 검은색이 군의 색채라 할지라도 저런 도적 떼와 아군의 병졸을 비교할 수 있을 리도 없지.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전체적인 흑산적의 규모를 돌아보았다.
체계는 잡히지 않았어도 숫자는 많았다.
게다가 도적 주제에 대놓고 동군태수의 처소로 자리 잡은 복양을 공략한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정작 그 흑산적을 밀어내지 못하는 동군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숫자는 많군.”
“아군이라면 문제는 없을 거다.”
하후돈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물론 조조 본인도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느냐.
“동군을 완벽하게 점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동군태수 왕굉이 자발적으로 동군태수의 인을 양보해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원소리고 해도 이미 태수가 버젓이 있는 영지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속도를 높여 복양으로 입성을 선택했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왕굉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걸 위해서라면 단 하루 만에 복양에 입성하여 그를 압박해야만 했다.
“그는?”
“그…, 아. 전호 그 친구 말인가? 저기서 기마를 준비하고 있네. 그런데 정말 자효가 아니라 저 친구에게 맡겨도 괜찮겠나?”
하후돈의 의문은 어쩌면 당연했다.
호세라는 젊은이가 아무리 그 기세가 좋고 공적이 많더라도 기본적으로 조조군의 기병대장은 조인이었다.
게다가 오백 가량의 기병대를 꾸림에도 사백 가량이 기존 조조군이었던 이상, 호세보다는 조인이 조금 더 다스리기 쉬운 부분도 있을 터.
“괜찮다. 이 상황에서는 저 남자가 더 나음이 있다.”
조인에게는 이미 별도로 남은 기병대를 맡기어 군을 돌렸다. 여차하여 호세가 이끄는 선봉이 막혔을 때, 우측으로 돌아 적의 측면을 두드리는 역할.
모든 준비는 끝내두었다.
“거참, 난 네가 왜 그리 저 남자를 아끼고 감싸는지 모르겠다. 물론 제법 한 실력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는 하는데, 그거라면 자효가 더 낫지 않은가?”
그 말에 조조가 고개를 돌렸다.
하후돈은 그 풍채가 짐짓 건장하여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야 겨우 시선이 맞았다.
“그가 이끄는 군은 명령에 죽음을 불사하지. 그건 조인에게도 없는 힘. 제 사람으로 포용하는 능력이니, 그것이 그 남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그러니 아군이 열세인 상황에서는 조인의 용병보다 그의 덕과 무예를 송곳 삼아 밀고 들어가는 것이 용이했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런 전장을 통해 그는 제 실력을 증명하겠지. 이 조조의 안목이 맞는다면 영웅이 될 터, 실패한다면 그저 그런 이일 뿐.”
그녀는 개인적으로 그의 성공을 바랐다.
영웅이 되어라, 이윽고 날아올라라.
그러지 않으면 이 조조가 탐낼 이유가 없음이니. 저 멀리에서 호세가 이끄는 기병대가 점점 박차를 가하며 맹렬히 흑산적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원양. 군을 움직인다. 깃발을 흔들어 진소연의 군에 명을. 조인은 아직 대기를 명한다. 그는 선봉이 막혔을 때의 예비군이다.”
선봉은 맹렬한 기세로 달리고 있었다.
진소연의 군은 깃발이 흔들리기가 무섭게 바로 그 뒤를 이어가는 형태로 진군을 개시. 조조의 군은 그 옆을 돌아 좌측의 군을 치며 선봉이 찢고 지나간 틈을 벌린다.
흑산적의 군은 숫자는 많아도 대열이 고르지 못했다. 이대로 전선을 벌리기만 한다면 알아서 흩어질 모래알과도 같음이니, 그녀는 그 이음새를 노리기로 했다.
“하후돈. 아군도 진군한다.”
“언제든지.”
나팔을 불어라, 북을 울려라.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군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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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인간님이 작업해주신 여포의 일러스트는 작품 설정에 올렸습니다!
다들 외쳐요! 개미인간!!!!!!!!!!
나머지 질문이나 궁금하신 부분은 다음편에서 바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