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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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이 양성을 공격했다.
비록 그곳은 예주에 있어 직접적인 원소의 거점은 아니었으나, 원소 계파의 주씨 가문이 지키고 있던 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상 직접적인 선전포고와도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그 일원으로 공손찬의 사촌 동생 공손월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까지 들어왔으니, 그간 지지부진하던 공손찬이 드디어 움직인 것과도 마찬가지.
조조와 아가씨가 말하던 격동의 시기가 찾아왔다.
공손찬은 강하다. 그것도 보통 강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 하북 일대에서 감히 공손찬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30만의 황건적을 2만으로 토벌했다.
게다가 반란군을 토벌하거나 이민족을 진압하는 등, 그간 그가 무관으로 쌓은 업적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황건적이 일어나기 전까지 직접적인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랐다. 말 그대로 정말 전쟁만을 위해 육성되고 가꾸어진 상비군을 만 단위로 이끄는 명장.
“이제 시작이야.”
아가씨가 읽던 서적을 내려놓았다. 최근 아가씨가 자주 애독하고 있는 병법서였는데, 조만간 한 번 빌려보려 했더니 그새 일이 터졌다.
“공손찬이 움직였으니 당연히 흑산적도 고개를 들겠지. 병주에서 넘어오면 위군, 황하를 거쳐 동군까지 영향을 미칠 거야.”
“그간 내내 말하던 동군이네.”
준비는 진즉에 끝내두었다. 명만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진군 가능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조군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건 출격 가능한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
“명만 내리쇼. 운이나 방삼이도 이미 준비를 끝냈어. 사마 꼬맹이는 뭐, 데리고 간다면야 언제던 싣고 갈 수 있겠고.”
“데려가야지. 이제 우리 사람인데.”
아직도 아군 병력이 거기에 남아 사마 가문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뭐 아직은 우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나.
꼬마를 전장으로 데려가는 것은 썩 달갑지 않지만, 본인도 자원하고 있는 데다가 아가씨가 이렇게 말한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나름 군 내정에는 쓸모가 있었으니 구태여 반대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면 언제쯤일 것 같소?”
“적어도 보름 이내로 원소에게 답을 받아낼 거야. 조조도 몸이 달아올랐으니, 최대한 빠르게 동군으로 넘어가려 하겠지.”
“급한 것은 원소도 마찬가지일 테고.”
안 그러냐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거리니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 역시 지금의 상황은 사면초가와도 마찬가지였다. 남쪽으로는 원술이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와중에 북쪽에서는 하북 최강자인 공손찬이, 서쪽에서는 흑산적이 몰려들고 있는 판국.
그들이 만약 위군을 거쳐 동군을 점령한다면.
“절대 손 놓고 지켜볼 리 없어. 아마 조조가 자원하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바로 위군, 더 나아가 동군의 구원을 맡길 거야.”
아가씨는 그리 말하며 황하를 가리켰다.
기주 바로 턱밑에 자리한 동군. 복양성을 인근으로 기주 남부, 위군을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원소에겐 결코 잃을 수 없는 거점이었다.
“그러면 슬슬 짐 싸야겠네.”
“그 전에.”
그녀가 손을 뻗었다.
손목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아가씨가 다소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 잡힌 손목이 다소 아려올 정도로 힘을 꼭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기주에서 할 일은 다 끝내둬야 해.”
난 또 뭐라고.
어차피 기주에서 할 일이라고는 다 끝났다.
원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부분이니 군을 모집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대체로 군의 훈련이나 부족했던 물자의 보급, 병기의 수선이나 보충 정도인데 그런 건 진즉에 끝내두었다.
“다 끝냈어.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을걸?”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뭘 말하는 걸까.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아가씨의 다소 진지한 표정을 보고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아직 마무리를 짓지 않은 일이 있기야 했다.
“전씨 가문을 말하는 거요?”
“응.”
사실 구태여 그쪽과 무슨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안 보고 잘 살았던 것을, 어머니도 돌아가셨기에 이제 연결고리도 없는 걸 구태여.
“됐수다. 거기는 관계없어.”
아가씨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냈다.
전풍은 그날 이후로 계속 사람을 보내 식사에 초대한다고 알렸다. 물론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
솔직히 말해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내 어머니를 아는 사람, 그리고 어릴 적 날 돌봐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나이까지는 키워주었으니까.
어떤 사람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싫은 기억이 없는 걸 보아서 학대당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지금도 꾸준히 초대하는 걸 보아 다소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내게 성씨는 없어. 이름도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지. 호세면 충분해. 호랑이의 기세, 나쁘지 않잖아?”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볼 거야.”
단언하듯 목소리를 깔며 그 붉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제법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더니, 이럴 때에 한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겠지.”
애써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조의 목표는 원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독립하는 것. 그리고 아가씨가 그걸 받치니, 나 역시도 조조의 파벌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전풍은 원소의 사람.
이대로 일이 잘 진행된다면 언젠가 원소와도 자웅을 겨뤄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구태여 소연 아씨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명백했으니.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뜨지 않는다.
“가족이잖니.”
“아니야.”
내 가족은 어릴 적에 세상을 떴다. 단 하나뿐이었을 가족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우리 식구들, 범위를 조금 넓히면 아가씨와 운이도 낄 수 있을까.
사마의는 조금, 아직은 좀 그렇고.
“널 아들이라 불러주는 가족이잖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가족이라고 해야 하나? 문관? 전가의 적자? 우스운 소리지.”
아직도 전풍의 꿍꿍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세라는 일개 인간의 효용만을 놓고 보자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장으로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겠지.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생각을 공유하고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너도 알면서, 왜 이럴 때만 어른스럽지 않게 구는 걸까?”
아가씨는 그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그렇지만 묘한 반발심도 함께하여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할 말은 여럿 있었지만.
“네가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 적어도 입장은 전달해주렴. 그러지라도 않으면….”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표정이 뭔가 조금 애달파 보여서, 그래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참견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 표정이 너무 애잔했다.
“너무 슬프잖니.”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겠수다.”
나도 그 사람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다소 과하게 강압적으로 날 끌어들이려 했던 부분에서는 다소 화도 나지만, 그 이전에 일단은 내 옛 과거와 추억을, 얼굴도 흐릿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덮어놓고 원색적으로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직접 만나러 간다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내 한 번 가서 얘기해볼게.”
“여기서 끊어지면 다음은 전장에서 만날 수도 있어. 조조는 결코 원소에게 숙이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아.”
그 전에 미리 확실하게 정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단지 껄끄러움이 앞서 그것을 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아가씨는 내 등을 살포시 밀어주었다.
사실 껄끄럽다는 말은 핑계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조조는 원소와는 다른 길을 걸을 터. 그렇다면 언젠가 전풍과 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확실히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적어도 저들이 나를 가족이라 부른다면,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예의는 베푸는 것이 옳았다.
그저 망설이고 있었다.
아가씨는 그런 내 등을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밀어냈다. 확실하게 모든 끝맺음을 짓고 오라며 이르고 있었다.
“그 인간이 날 꼬시면 어쩌려고 이런담?”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며 비아냥을 읊었다.
“그러면 찾아가서 네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릴 거야. 어디로도 못 가게, 확실하게 부숴서 옆에 앉혀두지 뭐.”
“그것 참.”
무서운 소리를.
그래도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소연 아씨의 모습에서 다소 용기를 얻었다. 다리 두 짝 부서지기 싫으면 똑바로 처신해야겠구만.
“알겠수다. 내 잠깐 다녀오리다.”
적어도 끝맺음만큼은 확실히 짓고 와야지.
* * *
오늘도 전풍은 빈 식탁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저녁 식사를 초대했는데, 정작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사람이 야속하기도 하여 전풍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오늘도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는 않는구나.
반면 전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버지.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언젠가는 오겠지. 한 번이라도. 사람이 찾아가는 것이 귀찮아서라도 한 번 정도는 찾아주지 않겠느냐.”
물론 한 달이 넘게 빈 식탁에 올린 저 음식들은 주인을 찾지 못하였다. 그냥 남는 것이 아쉬워 시종에게 나누니 오직 그들의 배만 불릴 뿐.
“뭐가 아쉽다고, 아버지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가문이야 제가 이으면 그만인 것을, 왜 그런 한량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가족이지 않느냐.”
소녀는 그 말이 지긋지긋했다.
무슨 가족인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깟 씨도 모르는 이에게 무얼 그리 집착하느냐고 따졌던 적도 있었다.
그때 자신의 아비가 지은 표정을,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사람이 우는 모습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전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 뿐이었다.
“오늘도 글렀구나.”
그리 말하며 전풍이 수저를 들었다.
강압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전호를 만나러 가지 않고, 이렇게 빙 돌아가는 방식으로나마 연을 다시 한 번 이으려고 했던 것인데.
북쪽으로는 공손찬이 움직이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원술이 공손월과 함께 예주 일대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흑산적의 떼거리가 기웃거리고 있는 상황.
짧은 평화는 끝이 났다.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인데, 그러면 무관인 전호도 전장으로 끌려갈 게 분명했다. 그것이 전풍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어떻게 만난 아이이거늘.
강압적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얼마든지 손 쓸 수단이 있었다. 전풍은 그걸 가능하게 할 능력이 있었다.
제발 강압적으로 가두기 전에 제 발로 찾아오길 바랐거늘. 원만한 해결을 바랐던 전풍이기에 그것은 조금 슬픔으로 다가왔다.
“어쩔 도리가 없구나.”
제 발로 찾아왔더라면.
그러면 조금 더 좋은 연을 이을 수 있었을 것을.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을, 자신을 아비라고 부르며 따르던 소년을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악역이 되더라도 좋았다.
“희야. 식사를 마치면 내 어디 다녀와야겠다.”
“어딜 말씀이세요?”
소녀의 말에 전풍이 그저 웃었다.
말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전해지는 것이기에 전희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일에 관한 얘기는 잘 안 꺼내니까,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하여 식사를 시작하려던 무렵이었다.
“주인 어르신, 전호라는 이가 찾아왔습니다.”
수저가 떨어졌다.
놋쇠가 바닥에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전풍이 고개를 돌렸다. 전희 역시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그간 코빼기 한 번 비추지 않던 이가 어째서.
전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관계였던 그가 아버지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만 있으니까.
그래서 소녀는 그가 싫었다.
“들라 이르라.”
“네, 어르신.”
소녀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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