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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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일렀나. 소녀는 그리 생각하며 살짝 반성했다. 아직 그에게 군의 주인이 되라는 주문은 조금 일렀던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답답한 상황이면 한 번쯤은 생각해볼 법도 한 것을.
“답답한 사람.”
인간다운 면이 있어서, 그래서 저 남자가 권력을 쥐면 어떻게 변할까. 그 미래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저 남자가 더욱 거대해질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제 발아래 수만의 민중을 깔 수 있을 정도로는 커져야 했다.
그래서 사마의는 한 번 떠보았다.
원소는 현재 입지가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진소연의 군을 경원시했다. 그런데도 그 상황을 타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진소연은 분명 답답한 것일 텐데도.
분노하는 호세의 모습을 떠올린 사마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충성심이, 아니면 그것을 빙자한 다른 감정이 훨씬 앞서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언제 다시 나빠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소녀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흐트러진 반상에 있던 돌을 치웠다.
빈 반상.
사마의는 거기에 돌을 올렸다. 하내에 있는 원소군을 상징하는 것은 백돌. 그 뒤에 조조로 정한 백돌과 진소연으로 정한 백돌을 잇따라 올렸다.
반대로 거기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흑돌을 작은 손으로 한 움큼 쥐어 반상 위에 펴 바르듯 올렸다. 이것이 기주목 한복의 세력.
이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현재 원소는 이만큼이나 한복과 차이가 벌려져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절망적인 차이.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소녀는 그리 중얼거리며 돌을 몇 개 더 잡었다. 당장 원소는 병주에서 넘어오던 흑산적을 부수었고, 지방 제후였던 장양도 복속시켰다.
그렇지만 아직 기주 전체를 관장하는 기주목의 힘에 미치지는 않는다.
원소군은 힘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그 군이 도망치지 않고 하내에서 북상하며 기주목 한복의 멱을 노리고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타개할 방법은.
“유주자사…, 는 아니야.”
황제의 자리를 거절한 유우가 군을 움직일 리가 없었다. 사마의는 그리 생각하며 찬찬히 하북의 상황을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원소군이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패.
발해의 군?
애당초 발해에 돌아가지도 못하는 원소가 이용할 수 있는 군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직접적인 힘. 기주목도 깨부술 힘을 끌어들일 것인데.
“공손찬?”
북평태수.
소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빙긋 웃었다.
공손찬밖에 없었다. 지금 원소가 가장 기주목에게 압박을 줄 효과적인 방법은,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세가 큰 한복을 고꾸라뜨릴 방법은 오로지 공손찬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공손찬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소문으로만 들어도 이미 말도 안 되는 군벌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하북의 절대적인 강자. 권력이 모자랄 뿐이지, 그의 힘을 그 누가 부정할까.
힘만으로 하북에서 누구도 건들지 못할 대규모의 군벌로 거듭난 것이 바로 공손찬이었다. 그라면 기주목이라고 하더라도 쉬이 깨부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천하가 더 혼란스러워지겠네.”
소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손을 뻗어 반상에 올렸던 돌을 전부 쓸어버렸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돌을 보며 사마의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호세에게 지었던 미소가 아니었다.
짙고 어두운, 누가 보아도 비웃음에 가까운 것. 소녀가 생각하기에 앞으로의 천하는 가면 갈수록 수렁으로 빠질 터였다.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 것인가.
그리고 이 상황에서 자신을 어떻게 움직일까.
진소연은 사마의의 예상 이상으로 흥미가 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 할아비가 말했던 대로 판을 읽는 식견은 뛰어났다.
거의 미래 예지라 불러도 될 정도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아마 사마의를 능가할 터. 그것만큼은 사마의도 진소연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뿐.
그녀는 소녀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없었다. 어딘가 가슴을 근질거리게 하는, 저 사람의 마지막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없었다.
호세라는 남자에겐 그것이 있었다.
불합리한 이상. 말도 안 되는 것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바동거리는 모습이 썩 볼 맛이 났다. 천하를 배부르고 등따습게? 그런 어린아이도 꾸지 않을 것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 우스웠다.
아직도 인간성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
만약 그것이 깨지면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만약 저 순수함을 계속 유지하고 나아간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괴물일까, 혹은 성스러운 무언가일런가.
그걸 보기 위해선 호세는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지켜줄게요, 내가.”
소녀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키득거렸다.
이 흥미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높은 위치에 올려주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니 당신은 내 흥미가 가시지 않게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내가 지켜줄게.”
소녀는 저 멀리 떠나고 있는 호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 파멸하건, 성공하건. 재미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받쳐주리라.
스스로 생각해도 괴물이 따로 없었다.
어쩌다가 이런 성격이 되었을까. 아무렴 어떨까. 재미만 있으면, 내 목마른 갈증만 해소할 수 있으면 그만이 아닐까?
웃었다.
사마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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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년 6월.
저번 달, 한복에게 동탁을 치러 가기 위한 길을 비켜달라는 명목으로 기주로 군을 돌린 공손찬은 그걸 막고자 나선 한복의 기주군을 말 그대로 박살을 내버렸다.
어떻게 원소가 공손찬을 꼬드겼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공손찬 정도의 거물이라면 어지간한 조건에는 나서지 않았을 것인데, 기주라도 내주기라도 했을까. 그게 아니면 공손찬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원소는 기주를 노리고 있는 것인데.
내 머리로는 거기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쨌건 공손찬이 기주의 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와중에 원소도 군을 이끌고 위군 업성 바로 턱밑인 남구까지 군을 이끌고 올라갔다.
거기엔 당연히 조조군과 진소연의 군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 모든 군을 합친 숫자가 얼추 삼만을 넘기는 대군이 되었다.
“모든 이들은 들으라.”
그는 단상에 모든 제장들을 모아, 그리고 그 아래로 원소 계열의 모든 병력을 모으고 말을 꺼냈다. 그 말은 전하는 이들의 입을 타고 흘러, 이윽고 원소군의 모든 병졸에게까지 전해지니.
원소는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 보았다.
“기다림이 길었다. 그간 저 간악한 한복의 사주로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그의 말을 쭉 이어졌다.
이제 고생의 시간을 끝났다.
앞으로 남은 것은 천하의 역적 한복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라고. 원소는 그리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우습군.”
내 옆에 서 있던 조조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이 여자는 또 왜 여기에 있는가. 원소의 직렬 부하들은 이미 저 단상 위에 올랐는데, 마찬가지로 원소가 귀히 여기고 있을 조조는 오히려 이 아래에서 우리와 같은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대는 저 말을 어찌 생각하는가?”
“뭐, 잘하고 있는 연설 아닙니까?”
적당히 완급조절도 잘 되었다. 적이라고 부를만한 이를 만들고, 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게도 했다. 저 정도면 썩 훌륭한 말이 아닌가.
“아니지, 그게 아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보라. 한복의 죄가 무엇인가?”
조조는 그리 말하며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살짝 간지러움을 애써 참으며 고민했다. 한복의 죄가 무엇인가. 뭐, 원소군에 병량을 대주지 않은 것? 아니면 반동탁 연합에서 먼저 발을 뺀 것?
“생각나는 것이 있는가?”
“있기야 한데.”
“그래도 그것이 천하의 악적이라고 몰아갈 정도의 극악한 죄는 아니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대여.”
모르겠다.
사실 반동탁 연합에서 재빠르게 발을 뺀 것은 조금 속된 말로 개새끼라 불러 마땅했으나, 다른 제후라고 아니 그랬던가?
“원소는 제 앞길을 가로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복을 천하의 악당. 역적과도 다름이 없는 이로 만든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조조는 그리 말하며 그 붉은 눈으로 단상 위를 쏘아봤다. 거기에는 아직도 연설을 이어가며 군의 사기를 북돋고자 하는 원소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을 막는 자는 천하의 역적. 우습지. 원소가 뭐라고? 그를 가로막으면 역적이 된다고? 원가의 본초는 어느새 황제처럼 거들먹거리는구나.”
거기에는 어렴풋이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도 아니었다. 주변에 어떤 귀가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이런 말은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하쇼. 주변에 귀가 많소.”
“흥, 아무도 없다. 들릴만한 위치도 아니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매만졌다. 비교적 작은 체구인 조조였기에 손도 나름 가냘픈 부분이 있었는데, 그 손가락으로 어깨를 쓰다듬는 것이 다소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원소에 대한 것일까.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지금 조조는 원소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마도 생각건대 그녀가 묻는 것은 원소가 권력을 쥐기 위해 하는 저 행위 자체에 관해 묻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확신도 없는 것이.
“뭐, 욕심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않겠소?”
그리 말하며 말을 아꼈다.
그녀는 그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질문에 썩 어긋나지는 않은 대답 같았다. 애당초 그렇게 추상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조조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항상 피곤함이 쌓였다.
그래도 몇 달인가 군을 같이하여 제법 대화도 나눴을 것인데도 아직 썩 익숙해지지 않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대는 권력에 욕심이 있는가?”
“없수다, 그런 거.”
딱히 감투를 쓰는 걸 좋아한 적이 없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 조조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손을 뻗었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
“어째서?”
“필요하다면 가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필요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그다지 끌리지 않는데.”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돈이 더 끌렸다.
당장 아군의 치중이 슬슬 바닥을 보이는 중이었다. 이러다가는 조만간 원소에게 손을 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군을 고용한 것은 원소니까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원소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아가씨도 원소와 그리 엮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 대답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하후돈 이 양반은 어디로 갔는가. 매번 조조의 뒤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더니, 꼭 이럴 때만 자리를 비운다.
안타깝게도 나는 조조와 단둘이 있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질병이 있었다. 물론 진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소름이 돋고는 했다.
뱀을 만난 양서류처럼.
호랑이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포식자 앞에 선 초식동물의 감각. 어릴 적 느꼈던 해묵은 감정은 많이 씻어낸 것 같은데, 그런데도 조조가 왠지 날 잡아먹을 포식자처럼 느껴지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조금, 욕심이 나는군.”
“…뭐요?”
그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가서 싸워라! 검을 뽑고 적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별 볼 것 없는 약자들이 너희를 반길 것이니, 무엇이 두려운가!!”
원소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역적을 토벌하라, 그리하여 영광을 얻어라!! 대 원가의 후광이 너희를 비출 것이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 말하고 나니 주변에서 나팔수들이 큰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 신호에 맞춰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분위기를 고무시키기엔 역시 이런 작업이 필요했다.
조조는 어느새 내게서 시선을 돌려 원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은발을 흩날리면서 올곧은 시선으로 흔들림 없이 원소를 쏘아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
“호세. 그대도 잘 보아두어라.”
그녀는 그리 말하며 손가락으로 원소를 가리켰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기에는 다소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걸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것이 천하제일의 사기꾼이다.”
뭐라고 답해야만 할까.
그러나 조조는 대답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손을 내리고는 입을 닫았다. 주변은 여전히 병졸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시끄러웠다.
조금 석연찮았다마는, 그걸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전쟁에 앞서 괜한 생각으로 머리를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저 다가올 전쟁을 생각하는 게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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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