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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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목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봉에 막히는 걸 확인하면서 방향을 전환, 어디로? 모르겠다. 그냥 몸이 이끄는 대로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찌르고 휘두르고. 그걸 그냥 반복하고 있자니 어느 순간 하늘이 보였다.
푸르렀다.
하늘은 굉장히 푸르렀다. 허연 구름이 지나가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아, 저기 참새 한 마리가 지나가는구나. 지저귀는 소리가 썩 귀엽기 그지없다.
“…오리버니.”
“왜 부르냐.”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요?”
집중할 것이 어디에 있는가.
방금 운이에게 뚜들겨 맞은 발목이 시큰거렸다. 축이 무너져 땅에 대자를 그리고 자빠지니 세상만사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봄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처럼 햇볕은 따스한데, 정작 지면은 아직 서늘하니 그 온도의 차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는 꽃도 피겠지. 그날에는 꽃놀이를 가자.
“아 정말!! 나와요! 어떻게 방삼 씨보다 못해!?”
“아니, 조운 대장. 난 또 왜….”
저기서 방삼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와 조운을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차고는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우, 대장. 괜찮수? 존나게 처맞던데.”
녀석이 내미는 손을 맞잡고야 겨우 일어났다. 사실 죽어라 맞았다고는 해도 봉으로 손목이나 배, 머리에 발목. 그리고 또, 음. 어쨌건 적당히 얻어맞았을 뿐이었다.
“야, 방삼아. 나 자꾸 다리가 풀린다?”
“그렇게 처맞고도 벌떡 일어났으면 인간이 아니지. 그러게 왜 자꾸 얼을 놓고 있수? 대장이 나보다 더 처맞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도 그렇기야 했다.
운이와 대련을 시작한 이후로 가끔 방삼이도 그 자리에 꼈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렇게까지 얻어맞는 경우는 분명히 말해 처음이기도 했다.
그것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오라비가 너무 정신을 판 것이 문제죠.”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도 눈을 흘기면서 나를, 정확히는 내 몸을 훑고 있었다. 살짝 눈가가 떨리는 것이 조금은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대장, 좀 앉으소. 거참, 어제부터 계속 정신을 못 차린다 싶더니만. 쯔쯔, 어떻게 조운 대장을 앞에 두고도 그리 정신을 파오?”
방삼이는 그리 말하며 내 몸을 움직여 일단 적당히 앉혀만 두었다. 여전히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얻어맞은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일까.
‘그런 게 아니야.’
아가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집중이 되질 않았다. 적어도 몸을 움직이다 보면 조금은 집중이 될 줄 알았는데, 정작 나서보니 딱히 그러지도 못했다. 운이가 휘두르며 내지르는 봉의 끝자락은 보이지만 제대로 반응하기 힘들었다.
몸에 힘이 탁 풀린 느낌이었다.
알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것도, 그녀는 나와 다른 그릇이라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던 거였다. 알고 있었잖아, 호세야. 왜 그러냐.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체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그런 황망한 꿈을 그리고 있었던가.
“왼쪽, 허리!! 오른쪽도, 허리!!”
저 멀리서는 방삼이가 또 허리만 뒤지게 얻어맞고 있었다. 쟤는 왜 방삼이만 봤다 하면 허리만 죽어라 가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방삼이가 또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무인에게, 아니 모든 일에 있어서 허리의 균형은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왜 자꾸 허리를 엉거주춤하게, 게다가 품은 왜 자꾸 열어두는 거예요?”
“아니, 말로만 하쇼!! 왜 자꾸 허리를!”
다시 일어난 방삼과 조운이 서로 무기를 겨누었다. 한 발 내디딘 방삼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저기서 저리 움직이는 건 오히려 사지로 머리를 들이미는 꼬락서니였다.
“어욱!!”
“다시 일어나요.”
쓰러진 방삼이에게 봉을 겨누는 운이.
그렇게 둘은 한동안 계속 맞붙으며 훈련을 빙자한 폭행이 반복되었다. 물론 방삼이는 계속 쓰러지기야 했지만, 과거에 봤던 것에 비해서는 훨씬 잘 버티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의 나보다 훨씬.
한숨이 나왔다.
머릿속이 여전히 복잡했다. 꼬여버린 실타래는 어떻게 풀 방법도 없이 더욱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었다. 점점 수렁에 빠지는 기분. 머릿속이 진창으로 질척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멍하니.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계.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내가 미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설픈 기대도, 과분한 망상도.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진짜 괜찮아요?”
“………어?”
순간 고개를 드니 운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방삼이와 대련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방삼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던가. 대체 언제부터 고개를 처박고 계속 생각만 반복했던가. 정신이 없다지만, 시간이 이렇게 지날 때까지 멍하니 있던 것은 문제가 있었다.
걱정을 끼쳐버렸다.
“문제는 없지. 자, 가자.”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잡으라고 뻗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뻗은 손이 무안하게도 운이는 그저 나를 치켜보면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뻗었던 손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제법 시간이 지나 슬슬 배가 고팠다. 사람이란 본디 아무리 힘들더라도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됐다. 인간은 살려면 무언가를 먹고 살아야 하는 법.
“오라버니.”
누군가가 내 등을 매만졌다.
쓰다듬듯, 그러더니 이내 뒤에서부터 양팔로 내 몸을 꼭 끌어안았다. 팔을 교차하여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꽉 부여잡았다. 살짝 부드럽게 느껴지는 감촉이 등에서부터, 그 따스한 체온마저도. 전부.
“왜 그러는 건데요.”
운이는 내 몸을 꽉, 더 세게 끌어안았다.
“별거 아니다. 덥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늦겨울, 혹은 초봄이라 부를 계절이니 더울 턱이 있을까. 그냥 놓으라는 의미로 적당히 둘러댔지만, 운이는 오히려 내 등에 얼굴까지 파묻으며 비벼댔다.
“고민이 있으면 상담을 해요.”
등이 간질거렸다. 얼굴 전체를 내 등에 파묻고 말하니 조금 뭉개지는 목소리. 그렇지만 옷가지 한 장을 놓고 직접 말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 말은 도리어 또렷하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냥, 좀 그래.”
“그런 사람이 정신을 그리 놔요?”
정신을 놓았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생각할 것이 조금 복잡했을 뿐이었지. 어떤 의미로는 설레발을 친 것에 대한 자괴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아가씨는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어 붙잡았으니까, 그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목소리는? 아마 미친 듯이 떨렸겠지.
그냥 좀 부끄럽고, 그러면서 자괴감이.
별거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예전부터 좀, 그런 구석이 있어요. 생각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매번 뚱딴지같은 헛소리만 늘어놓고, 겉멋만 잔뜩 부리고. 좀, 사람한테 기대는 법을 몰라요?”
“지금 하늘 같은 오라비한테 한다는 말이.”
“됐고.”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끌어안던 손을 풀고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조금 억세게 잡아당겨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술이나 한잔 걸쳐요. 그러면서 좀, 속내 좀 털어놓고. 네? 언제까지 그렇게 꽁하니 있을 거래요?”
꽁한 적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마른 것처럼 거칠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 속에서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 들어서.
“나 많이 마신다.”
고작 이런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처음이네요.”
“그러게.”
생각해보면 조운이 합류한 이후엔 언제나 바쁘게 돌아갔다. 흑산적 이후, 하내 인근으로 진군을 거듭하면서. 그리고 연합군에 합류한 이후까지.
제법 긴 시간을 봤음에도 이렇게 사적으로 술잔을 마주한 적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간 여유가 없어도 너무 없기는 했었다. 생각해보면 술 자체가 좀 사치품이기도 했고.
“오늘이 날이냐?”
그리 말하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런 거로 하죠.”
운이는 제법 예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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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은 원소군의 진영을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조조는 먼저 실례하겠다며 원소가 지정해준 군막으로 돌아간 지 오래. 그녀도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안에 박혀있기엔 조금 답답했다.
아직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게임과 현실의 거리감.
그것은 깨달은 이후 언제나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게 진정 현실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게 했다.
잠자코 있자니 그 상념에 묻혀버릴 기분이 들어 그녀는 길가를 거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원소군 소속 병사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웃고 떠들거나, 호통을 치거나.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비록 시대가 달라 모습이 다르지만, 그들 역시 현실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현대인과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웃고 떠들고, 슬프면 울고. 그들이 인간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을 외면했었다.
진소연은 한때 그 모습에서 고개를 돌렸었다. 그래야만 살았으니까. 그래야만 이 세계에 만연한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눈을 돌렸었다.
적의 죽음을 깊게 받아들여선 안 됐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만도 없게 되었다. 그것이 바른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 부하가 그렇게까지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세. 혹은 전호.
그의 이름은 이제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을 지금까지 받쳐준 사람이면서 도움이 되는 장수. 그리고 자신이 기댈 수 있었던.
“뭘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감정이 무엇인가.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게 그것은 제법 낯선 감각이었다. 살짝 가슴이 떨리는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꽉 막힌 느낌. 답답하면서도 애절한 감각은 그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를 지나쳐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그녀만이 멍하니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
현실과 게임의 괴리감.
「 진소연 」
통솔력 - 100
무력 - 100
지력 - 100
정치력 - 100
매력 - 100
여전히 눈을 뜨면 그것이 보였다.
이 세계를 현실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것. 차라리 이게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조금은 이 세계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리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죽었으리라. 그녀가 처음 호세를 발견했던 것도, 그를 자신의 편으로 영입하고자 했던 이유도 상태창에 있었다.
제법 쓸만한 능력치였으니까.
그것뿐이었다. 그를 잡았던 이유도,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를 부하로 만들어서 부렸던 이유도 오롯이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 당시는 막 세계에 떨어져, 이것이 자신이 하던 게임이라는 걸 막 파악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 호세를 억지로 끌어들였음에도 그가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따라줬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것에는 정말로 감사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이 품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과연 그 감정에 그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혹시 친애라거나 의존, 감사 등의 별개 감정이 아닐는지.
그렇게 그녀가 가만히 서서 시선을 떨궜을 때.
“…이보시오.”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 그녀가 뒤로 고개를 돌리니 문관의 관을 머리에 쓴 중년의 남성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리춤을.
“그 검, 어디서 났소?”
그의 말에 그녀가 시선을 살짝 낮췄다.
전에 호세가 그녀에게 맡겼던 검. 그 당시 조조가 건네었다던 청강에 대해 얘기를 나누느라, 그 뒤에는 감정이 복잡해져 미처 돌려주지 못했던 그것이 아직도 소연의 허리춤에 매여 있었다.
그 중년의 남성은 정확히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구신지요?”
소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은 옷가지 하며 관이며, 분명 그는 문관이었다. 살짝 째진 눈에 뚜렷한 이목구비. 머리카락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살짝 희끗희끗한 느낌.
그렇지만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기시감에 그녀가 의문을 품었을 때.
“아, 소개가 늦었소. 나는 전풍, 자는 원호라고 하오.”
전풍이 왜?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하얗게 변했다. 그는 분명 원소를 따르기 이전에는 기주에서 한미한 직책을 맡고 있었을 터. 그렇지만 그는 분명 하북에서 내로라하는 명사임에는 분명했다.
조금 의외의 이름을 들어 소연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전풍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한 발짝 소연에게 다가갔다.
“무성장군 진소연. 이름은 많이 들었소.”
그리 말하며 그는 그녀의 허리춤에 맨 검을 가리켰다.
“이렇게 그대를 붙잡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대의 허리춤에 맨 검이 본래 우리 가문의 것 같아서 그렇소. 한 번 보아도 되겠소?”
분명 웃는 낯이었지만 묘하게 날이 선 느낌.
웃는 얼굴인 사람에게 적의를 느낀다는 것을 소연은 처음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 검은 호세가 제 어미에게 물려받았다며 그녀에게 건네었던 검이었다.
상대는 전풍.
그렇지만.
고민은 잠시였으나 말은 빠르게 나왔다.
“죄송하지만 이건 제 수하의 검이라서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검으로 향하는 전풍의 시선을 가렸다. 분명 그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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