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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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은 제 머리에 쓴 투구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식는 기분.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었으며, 또한 공손찬은 그것을 제법 좋아했다.
30만의 황건적.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우스웠다. 고작 비루하게 살아갈 뿐인, 윗사람들의 배려를 받아 겨우 그 삶을 영유하는 버러지가 뭉친다고 하여 뭘 해낼 수 있을까.
얌전히 복종한다면 거둔다.
그러나 거역한다면 자비를 두지 않겠다.
그것은 예전부터 공손찬이 펼쳐온 강압적인 통치의 근본이었다. 강한 힘과 폭력. 인간은 그것만 있으면 얼추 다스리기에 문제가 없는 것.
“장군, 경하드리옵니다!!”
“무얼. 엄강 그대도 고생했다.”
미소를 지었다. 30만을 2만으로 격파한 것은 분명 훌륭한 전과였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30만은 전부 허수에 가까운 쭉정이. 그렇지만 이런 전과 하나하나가 결국에는 공손찬의 힘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의 수급은?”
“아직 헤아리고 있습니다. 족히 수만이 넘는 수급마저 거두셨으니, 분명 조정에서도 큰 벼슬이 내려올 것이지 않겠습니까?”
“벼슬은 무슨.”
한나라는 진즉에 쇠퇴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명맥조차 유지하지 못할 지경으로 망가진 것에서 내려오는 벼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벼슬은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이 천하에서 공손찬을 이길 자가 없었다. 적어도 그 본인은 그리 판단했다. 기껏해야 비슷한 세를 유지하고 있는 건 어린 황제를 끼고 있는 동탁 정도일까.
“이제 내게 저항할 수 있는 이가 없는데 벼슬이 무슨 의미인가? 동탁은 그 오만하고 무능한 제후들에게 쫓겨나 관중 땅으로 도망쳤다고 하니, 이제 그 누가 본인에게 대항할까.”
특히 이번 연합군이 해산하는 과정을 지켜본 공손찬은 확실할 수 있었다. 이 천하에 더는 공손찬에게 저항할 수 있는 군벌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물론입니다, 장군!!”
엄강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찬을 우러렀다.
사방에는 시체가 즐비했으니, 그 모든 것이 공손찬의 공. 30만의 병력을 2만으로 격파하여 수만에 이르는 수급을 거둔 것은 분명 역사서에도 길이 남을 큰 공적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
“아주 좋다.”
공손찬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차갑게 식은 겨울바람에 맞추어 아직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도, 승리에 도취하여 환호성을 지르는 아군의 함성도. 그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옳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 장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분명 그는 제 휘하이자 동문 후배였던 유비에게 같이 보냈던 전령. 반동탁 연합군이 기주 인근에 뭉쳤기에 그것을 알아보라고 보냈던 이가 황급히 말을 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령은 공손찬 바로 앞에서 말을 멈추고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그의 앞까지 부리나케 달려와 무릎을 꿇는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기주자사 한복과 발해태수 원소를 비롯한 몇몇 제후들이 유주자사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유주에서 황제가 나올 판국입니다!”
그 뒤로 전령은 몇 가지 말을 더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비슷한 이야기. 결국에는 연합군에서는 동탁을 토벌하는 대신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한 세력들이 나왔다는 소리였다.
유우가 누구인가.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럿 있었다. 진정한 군자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비굴하게 이민족과 손을 잡으려 든다는 악평도 존재했다.
그 이전에 그는 공손찬에게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명백히 공손찬보다 높은 직급의 인물이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사실상 적이라 불러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기주목이 드디어 실성했군.”
황제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새로운 황제를?
그것도 그 유우를?
상관이라고는 해도 그는 엄연히 공손찬의 정적이었다. 유우가 진정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공손찬 본인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살려둘 수는 없겠구나.”
명분은 충분했다.
사사로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머저리를 참살한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 제법 훌륭한 명분이었던바.
말머리를 돌렸다.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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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
결국에는 연합군의 패배였다. 혹자는 상처뿐인 승리라 표현하기도 했다. 동탁을 낙양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결국 낙양은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
이게 승리라고?
정작 목표였던 황제도, 동탁의 목도. 무엇 하나 가져오지 못했다. 이걸 승리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정신이 나가버렸거나 제후의 끄나풀이거나. 뭐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부리나케 도망가는 꼬락서니가 가관이네요. 아저씨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요. 추하기 그지없는 옛 권력의 잔재들이….”
사마의가 혀를 차며 그 꼬락서니를 비웃었다.
결국에 연합군은 낙양에서 철수해버렸다. 각지로 돌아가는 제후도 있었고, 기주나 하내 방면에서 아직 주둔하고 있는 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와 조조, 원소가 아직도 하내와 기주 인근에 군을 치고 머무르는 상황. 사실 우리는 전부 원소 계열의 사람들이었기에 원소가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오라버니, 이제부터 어떡하죠?”
“아가씨한테 물어봐야지.”
이번 형양에서의 퇴각 이후 아가씨는 점점 말을 아꼈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조금은 의논이나 상담을 해줘도 좋을 것을, 저러고 잠자코만 있으니 보는 사람도 답답해질 따름이었다.
“어차피 당장은 원소를 따를 수밖에 없을걸요? 어쨌건 그 조그마한 무도현에 돌아간다고 해서 뭐가 되겠어요? 말이 안 되는걸요.”
소녀가 코웃음을 친다.
물론 무도현으로 아군이 회군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당초 이번 전쟁에서 아군도 꽤 많은 피를 보았지만, 그래도 이천이 넘는 군세였다.
그런 군세가 그런 코딱지처럼 작은 현에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애당초 우리는 그곳의 현장 패만 가지고 있을 뿐, 거기에서 세를 걷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더 그랬다.
“일단 온현으로 돌아가야 하나.”
어떻게 되었건 그쪽과는 엮인 일이 있었다.
당장 사마의를 다시 돌려놓을 필요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쪽은 이번 혼란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지켜주겠다고 했던 맹약도 남은바.
“오라버니. 그러면….”
“아뇨. 온현은 왜 가요? 미쳤어요?”
조운이 뭐라고 하던 차에 사마의의 말이 선두를 쳤다. 이에 운이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는 말을 이었다.
“거기에서 뭘 더 얻겠다고요. 그들은 어차피 이번 혼란이 빨리 끝났으니까 더는 이 군에 필요가치를 느끼지 못할 거에요.”
그 말에도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우리가 그들과 연합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연합군의 수탈에서 지킨다는 명목이 있었는데, 하내 인근에 남은 연합군은 원소 일파 정도였다.
“그런데 당신도 사마 가문의 사람 아니었나요?”
조운이 슬쩍 사마의를 흘겨보았다.
“가문은 관계없어요. 애당초 제가 진소연의 군에 합류하기로 했던 것은 기본적인 계약이니까. 그들에게 남긴 병사도 있겠다, 그 정도 선에서 그들과는 연을 끊는 것이 옳아요.”
“그렇지만 아가씨는 그 가문에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요?”
“실이 득보다 커져서는 의미가 없죠. 그들은 상황이 이렇게 반전된 이상, 이쪽과 연을 끊으려 하던가 아예 잡아먹을 생각으로 덤벼들 건데요?”
사마의와 조운은 팽팽하게 맞붙었다.
설전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로 의지를 표출한다. 물론 사마의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아가씨가 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진정해라. 뭘 그리 열을 내? 어차피 아가씨가 정할 문제다. 휘하에서 멋대로 재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사마의, 특히 너.”
일의 경과를 파악하는 게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단지 아가씨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재단하여 말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민감한 문제였다. 물론 저 꼬마가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익히 알겠으나.
“잠시 쉬어라.”
“…알겠어요.”
말로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입을 삐죽 내밀며 사마의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걸 지켜보던 운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분명 사마의라는 아이가 다소 개성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랬지?”
“저게 어떻게 다소라는 말이 붙어요?”
왜, 행동은 저래도 보다 보면 나름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물론 자주 보면 조금 싸가지가 모자란 부분도 있었지만, 아가씨에게만 저러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니었다.
“거 똑똑한 애들은 좀 이상한 부분이 있잖아? 말은 저래도 나름 도움도 많이 받았어. 너도 정 좀 붙여봐. 앞으로 같이 다닐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아가씨는 사마의를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던 것 같았다. 무얼 보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긴 하지만, 그만큼 후하게 대접하고 있으니 우리도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요.”
저 표정은 분명 뭘 알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군 진영에는 제 성격이 강한 인간이 너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방삼이는 어디로 갔냐?”
“지금이라면 분명 병참을 확인하고 있을 거예요. 아직 수중에 병량은 제법 남긴 했지만, 슬슬 이 상황이 고착된다면 배급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그동안은 내가 하던 일이었다.
방삼이도 점점 실력이 오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산적 중에서도 산적 같던 녀석이 이제는 퍽 장교다운 모습을 보인다.
“일은 잘하고 있냐?”
“물론이죠. 그간 방삼 씨도 제법 많이 성장했어요. 지금이라면 오라버니가 구태여 그런 일을 맡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을걸요?”
그건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야 군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내가 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일을 내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 탓에 아군 내에서는 아가씨와 나, 둘 중 누가 대장인지 명확히 기준이 잡히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이렇게 점점 내 일을 덜어낸다면 그런 의문도 다소 해소는 되겠지.
“그러면 너, 오늘 한가하지?”
“그럼요.”
마침 잘 되었다. 슬슬 팔도 나았겠다, 사실 조운에게는 예전부터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었다. 그간은 워낙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 꺼냈었지만.
“그러면 나 실력 좀 봐줘라.”
“네? 갑자기??”
그녀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긴 한데.”
그간은 시간이 없었다. 사방으로 전쟁하고 돌아다니기 바쁜 와중에 대련까지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지만 요즘에는 제법 시간이 남아돌았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 몇 번이나 개처럼 발리면서 실력을 더 발전시킬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특히 여포와의 일전.
그건 충격 그 자체였다.
“네가 나보다 더 실력이 좋으니까.”
“…꼭 그런 거 같진 않은데요.”
조운은 그리 말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평소에 방삼 씨 훈련 시키던 곳이 있어요. 거기로 가죠. 오라버니가 향상심을 가진다고 하니, 이 동생이 어찌 그걸 거절하겠어요?”
“말은 잘한다.”
그리 말하며 운이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 동탁을 처치하지 못했으니 난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었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씨도 그랬고, 사마의도 그리 말했으며, 나조차도 그리 생각했다.
이젠 제 한 몸 지킬 실력으로는 부족했다.
적어도 내 뒤에 있는 사람까지 지킬 수 있는 실력을 지닐 필요가 생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향상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웃어요?”
“그냥 웃겨서 그러지.”
“그렇게 웃어도 안 봐줄 건데.”
운이는 그리 말하며 씩 미소를 지었다.
얄궂게 지은 미소가, 조금 골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귀여운 맛이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리며 두드렸다.
“봐주다가는 땅에 누울지도 모른다?”
“어머, 눕히는 거예요? 동생을?”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초면부터 자….”
“빠, 빨리 가죠!!”
어느새 운이는 한껏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여간 어차피 질 것을, 뭐하러 이런 주제로 도발을 할까.
어느새 점점 겨울의 향기가 옅어지고 있었다.
봄은 금방이니,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나름대로 기분 좋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제법 평화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이대로 계속 평화로웠으면 좋으련만.
그럴 리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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