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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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사마 가문을 방문하고 있었으니, 또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우리 작은 선생이 길길이 날뛸 것이 뻔했다. 조금은 느긋하게 해도 좋으련만.
“대장님, 나가십니까?”
“오늘도 사마 가문으로 향할 거니까, 나머지 일들은 너희에게 맡긴다. 말 돌보는 건 꼼꼼하게 관리하고.”
그러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1번대라지만 그중 이런 세세한 일은 제일 맡길만한 사람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언제나 그녀가 부관이 되어 군을 다스리는데도 문제가 없을 정도.
나쁘지 않은 아이였다. 똑 부러진 여자였으며 심성이 나름 그럭저럭 착한 편이니, 우리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괜찮은 계집애였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 옷 좀 벗어라. 그거 방삼이 외투 아니더냐? 허이구, 저번에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징징대는 것을 보았는데.”
“…제 보물입니다.”
남자 보는 눈이 없다고 할까, 그게 아니면 너무 사랑이 과하다고 할까. 어느 쪽이건 얘도 결국 정상은 아니었다.
제가 걸친 외투 양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며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투로 날 노려보는 것이, 마치 작은 동물이 제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털을 세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서라, 아서. 내가 그딴 걸 가져 뭐하게.
“알아서 해라.”
그러니 또 헤실헤실 웃는다.
저럴 것이면 고백을 하고 정식으로 연을 맺던가. 저리 좋아하면서도 어찌 뒤를 서성거리기만 할까.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본인이 좋다는데 거기에 대고 더할 말도 없었다.
“아무튼 준비 잘하고, 난 간다?”
“아, 대장.”
“무슨 일 남았던가?”
이제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꼬마 선생께서 또 경을 칠 것인데. 고개만 돌려 그쪽을 바라보니 그녀가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닐 수는 있겠는데, 저 위쪽 산 인근에서 자꾸 도적이 출몰한다고 하더라고요. 뭐라더라, 조금 숫자가 많아 보였다던가?”
다수의 도적 패거리라.
“흠.”
평소라면 적당히 무시하거나, 그 세가 커진다면 한 번 토벌에 임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이 어디 평소인가? 이미 하내에는 각 제후의 군이 몰려있었다.
게다가 천하의 이목도 낙양과 하내 일대에 몰려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꽤 다수의 도적 떼가 출몰했다는 게 조금 께름칙하긴 했다.
하필 북쪽 유주에서 황건적이 대규모로 봉기했다는 것과 바로 옆 군인 하동군 일대에서 백파적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일까.
“쯧, 귀찮게 됐네.”
우리야 온현 일대, 정확히는 사마 가문의 호위병력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 온현까지 침공해오지 않는다면 구태여 나설 일이 아니기도 했다.
“일단 애들 몇 시켜서 보내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만 알아보라고 시켜.”
“토벌하시려고?”
그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사마 가문과 상담할 문제다. 우리는 결국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거니까. 호위대상이 노려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게 맞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출정을 감행하고 싶기야 했다만, 그건 사마 가문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아가씨와 그들이 맺은 계약은 그들을 지킨다는 것뿐.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먼저 떠났다.
일단 나도 발걸음을 사마 가문으로 돌렸다. 토벌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 얘기를 꺼내기엔 여러모로 시기상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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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유주의 평야.
저 멀리에 사방으로 넓게 포진한 황건적의 모습이 보였다. 저것을 황건적이라고 하여도 되는가. 그것에서 그는 작은 의문을 가졌다.
누가 보아도 비루한 농민이었다.
그런 약자들이 저 누런 두건 좀 둘렀다고 순식간에 황건적으로 변한다. 어이가 없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황건적이라고 해도 단지 비루하고 멍청한 백성에 불과했으니.
“창을 쥐어라.”
30만? 그에겐 우스웠다.
이 북방에서 자신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설령 그 힘이 막강하다 일컬었던 이민족도 떼거리로 갈아 마셨다. 적어도 이 북방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하물며 저런 비루한 백성 따위가?
“장군, 조금 더 군을 모으시는 것이 낫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훈련이 미흡하다고 해도 저들은 30만. 그 숫자는 해수와도 같을 것입니다.”
“멍청한 것.”
제 부관의 걱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30만의 군대를 상대로 2만이라는 군을 끌고 왔으니, 물적 숫자로만 따져도 15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그 숫자의 차이는 쉬이 극복할만한 차이는 아니라는 것쯤은 공손찬 본인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 앞에 선 이를 보아라. 내가 누구더냐?”
“북평태수, 북방의 맹장 공손장군이십니다!”
장거와 장순이라는 두 반란분자가 삼군오환과 결탁하여 10만의 반란군을 이끌었을 때, 그것을 고작 1만이라는 병력으로 격파했던 것도 공손찬이었다.
오환과 선비를 비롯한 이민족을 잘근잘근 짓밟아 씹어 삼키며 한의 국경을 지킨 사람도, 이민족들의 침입을 저지한 것도. 이것도 저것도 전부 공손찬이라는 희대의 장군이 해낸 업적이었다.
배고픔에 지친 도적에게 패한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었으니.
“너는 저 비루한 백성들이 두렵더냐?”
“아닙니다!!”
“대답이 우렁차서 좋군. 불문에 부치겠다.”
그리 말하며 공손찬은 고개를 돌렸다.
전방에는 여전히 수많은 황건적이 저마다 함성을 내지른다. 30만이라는 머릿수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마치 천둥과도 같은 위력이 있었다.
기가 죽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그에 비해 공손찬이 이끄는 군은 2만. 숫자의 차이는 역력했지만, 공손찬은 그것에 기죽지 않았다. 숫자의 차이가 곧 전력의 차이라고 단언하기엔 부족하다. 그것이 공손찬의 생각이었고 그가 이끄는 군의 생각이었으니.
“두려운가!! 저 도적들이, 나약한 약자들이!!”
사방에서 아니노라고 외친다. 그 목소리는 숫자가 부족해 크기에서는 밀릴지언정 기세에선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니,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군의 기세는 아니었다.
“창을 치켜들어라. 칼을 갈아라, 고삐를 쥐어라!! 이 천하를 저런 도적집단이 헤집고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마라!”
그 주변을 지키는 것은 백마의 군세.
공손찬이 자랑하는 백마의종을 필두로 수천의 기마가 선행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색의 군세는 분명 바다와도 같은 너르고 웅장함이 있었으나, 딱 그뿐.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군이라 하더라도 결국 백성. 어떠한 군사적인 훈련도 받지 못하였으며 싸울 이유는 있지만, 각오가 부족한 나약한 약자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이라면, 자신이 이끄는 군이라면 저런 도적들은 우습게 부술 수 있을 것이라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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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마자 사마의는 곧장 내 소맷자락을 끌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작은 손길로 끄는 것이 왜 이리도 강하게 느껴지는지.
그 소녀의 손길에 그저 따라갈 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가 이러할 진가. 그렇게 털레털레 뒤를 따르니 어느새 평소 지내던 그 정자에 도착했다.
“오늘은 여기서부터, 끄응, …후우. 여기까지는 다 받아적으실 생각 하시고요. 아, 벌써 표정 찡그리시는 거 빤히 보이네요.”
“너 같으면 안 찡그리겠냐.”
그 작은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오는 죽간의 숫자가 대충 보아 스물을 넘는다. 어린 여아에겐 무거웠을 것을, 끙끙거리면서도 옮기는 것이 대견하긴 하다.
저걸 전부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잘했다며 칭찬해줄 수도 있을 것을.
“얼마 전에 글을 배우는 게 낫다고 하시던 분은 어디로 가셨죠? 아저씨는 아무래도 조금 이해력이 부족하신 듯싶은데. 이건 다 아저씨를 위한 거라고요?”
“교육자에 강한 불만을 느낀다만.”
그리 말하니 사마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입가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아 분명 거짓으로 짓는 표정인바. 소녀는 이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잽싸게 입가를 가렸다.
“어머, 저만한 교사는 흔치 않을걸요? 아저씨처럼 다소 모자란 학생을 이리 친절하게 가르치는 선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말은 잘한다.”
나이에 비해 제법 비범함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하는 짓이 이리도 얄미워서야 인정하고 싶어도 그러기 싫은 마음이 공존했다.
“쯧, 얼른 시작이나 하자고.”
작게 툴툴거리니 소녀는 또 웃었다.
그 뒤로는 쭉 글공부의 연속이었다. 사마의가 말하는 바를 들으며 그 문자를 받아적는다. 그것을 몇 번인가 입으로 읊으면서 외우기의 반복.
사마의 말하길 어설픈 재주는 학문에 있어 죄악이라던가. 꿋꿋하게 오직 반복하며 이해하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이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을 뿐.
그렇게 몇 번인가 글을 받아적을 때였다.
“호세 장군!”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제 바짓자락을 들고는 달려오고 있었다. 다소 긴 예복이라 그런가, 그는 그리 달리면서도 발밑을 주의하고 있는 폼이 좀 우습긴 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을 어찌 무시할까.
“사마 공자께서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그가 이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남자. 사마방의 장남인 사마랑이었으니, 이 사마의의 오라버니가 되는 남자였다.
겉으로는 유약해 보일 뿐이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려 하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제 오라비를 맞이한다는데도 눈을 찌푸리면 어쩌자고.
소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따라 일어났다.
“오라버니, 경망스럽습니다.”
평소 사마의답지 않은 딱딱한 어투. 표정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제 오라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사마의. 너도 있었느냐.”
“예. 있었지요. 지금도 있고요.”
순간 그들이 기 싸움을 벌인 느낌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평소 웃는 얼굴로 제 할아비와 나를 대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사마의의 모습이 다소 의문스러울 무렵.
“군의 일이다. 너는 빠지거라.”
사마랑이 먼저 소녀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군의 일이라면 무슨 일인가. 혹여 아가씨가 우려했던 연합군의 간섭이나 개입이려나 싶을 무렵, 누군가가 웃었다. 미친 듯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웃었으니.
“끄흐, 꺄하하하하하하하!! 오라버니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 미천한 재주로 무얼 하시겠다고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사마랑을 손가락질했다.
“기억하세요. 제가 지금까지 몸을 낮추고 있던 것이 오라비가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 아님을. 그저 기회가 없기에 잠시 웅크렸을 따름인 것을, 마치 이 소녀를 깔아뭉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썩 보기 안 좋습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입가에는 짙은 웃음기를 떨쳐내지 않았다. 정말로 우습다는 것처럼, 진심으로 소녀는 제 오라비를 비웃고 있었다.
“사마의!! 내 너에게 집안일의 개입을 허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곧 이들을 따라갈 사마 가문의 자손은 저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 남자를 왜 가르치고 있겠습니까? 그걸 왜 허용하셨지요? 알고 계시잖아요.”
내가 모르는 정보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것보다 사마의의 갑작스러운 돌변이 가장 당황스러웠다. 그냥 적당히 어리고 귀염성이 있는, 그렇지만 다소 잔망스러운 소녀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웃는 모습은 미친년도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저는 이제 진소연의 뒤를 따르는 이. 그 군세의 일이라면 제가 들으면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미천한 두뇌로 조금은 이해가 가시려나요?”
소녀의 원색적인 비난에 사마랑의 입가가 찬찬히 떨렸다. 분노였을까. 그렇지만 얼굴이 다소 창백해진 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렇게도 말을 할 줄 알았더냐. 그걸 속에 품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나와 웃는 낯으로 대화를 하였느냐? 무슨 심정으로 그 악독함을 감추고 있었느냐.”
“헛소리는 마시고, 본론이나 하시죠.”
사마의는 그의 말을 탁 잘랐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나야 이 가정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뭐라 할 말도 없었고, 사마의는 단지 무표정하게 사마랑을 노려볼 뿐.
정작 사마랑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백파적입니다. 호세 장군. 불과 20리 바깥으로 백파적의 무리가 접근했다는 보고가 있어, 그것만을…, 네. 그것만을 알리러 왔습니다.”
그 뒤에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들썩이던 그가 이내 몸을 돌렸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싶었지만, 사마의를 힐끗 바라보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소녀는 그걸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불편한 분위기는 딱 질색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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