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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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할 것도 없고 적당히 연합군 제후의 전통에 답장하거나 오백 정도의 아군을 돌보고,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사마 가문의 장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사마 가문에 방문하니 요 앙큼한 꼬맹이가 또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들고서 다가왔다.
“그래서, 이건 뭐냐?”
“뭐긴요. 어차피 할 것도 없으시잖아요?”
할 게 없다는 말에는 딱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와 운이, 방삼이가 다 떠나고 나서 홀로 남겨진 입장이었으니까. 게다가 의외로 온현 인근으로는 연합군의 손길도 썩 닿질 않았다.
기껏해야 연합군 소속 군주가 전통 등을 보내는 정도.
솔직히 글을 잘 읽는 수준이 아니라서 제후들의 전통 중에는 가끔 알아보지 못할 것도 있어 이 꼬마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었지. 대부분은 공적에 대한 치하였기에 적당한 말로 답했었다.
그래서 이젠 얼추 자연스럽게 대화를 튼 거의 유일한 사마 가문의 인물인 이 소녀가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반상을 들고 오는가.
“할 게 없다는 거랑 바둑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군의 장이라는 사람, 적어도 대국을 읽는 시야를 기르시는 게 맞지 않나요? 아니면, 평생 전선에서 칼이나 휘두르시게요?”
너, 그거 전형적인 문관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니까 현장을 뛰는 무관들이 문관이라면 질색을 하는 거라고.
물론 그와는 별개로 언제까지나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벌일 수만은 없다는 부분에선 동의하긴 했다.
만약 동탁 토벌전이 실패로 끝난다면, 그 뒤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더욱 전쟁의 규모가 커질 터였다. 한 번 바로잡지 못한 혼란은 더 큰 혼란을 불러온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그런 혼란 속에서 아가씨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싸울 전장의 크기도 커지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 가지고 도움이 되겠나? 차라리 병법서 같은걸….”
“글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뭐라고 해보기도 전에 앙칼진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사마의라는 꼬마는 예상 이상으로 꽤 직설적인 계집애였다. 다른 말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독설가라고 할까.
완전히 상대를 깔아뭉개는 형태의 독설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요점만을 간추리며 상대에게 직설적인 어투를 전한다. 가끔은 욕설보다도 한 가지의 진실이 더 아플 때가 있는 법.
“어휴, 내 뭐라 말을 못 하겠네.”
작게 툴툴거리며 꼬마의 뒤를 따랐다. 소녀는 바둑판 위에 돌을 얹은 채 양손으로 그걸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정자를 향해 나아갔다.
“나중에 따로 글을 가르쳐 드릴게요. 언제까지나 까막눈일 수는 없잖아요?”
“까막눈까진 아니다.”
이래 봬도 어릴 적에 배워둔 것이 있었다. 복잡한 서술이 아니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을, 이 제후라는 양반들은 말을 너무 고상하게 쓰려고 한다.
요컨대 너무 어렵게 쓰려 든다는 것.
“고작 행군사마, 고작 병졸로 만족할 셈이에요? 전선에서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은 장수의 기예가 아니요, 그것은 일개 필부의 용맹이요. 그것이 병졸의 기예일지니.”
그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린다.
“마지막까지 병졸로 남을 생각이 아니면 잠자코 배워둬요. 글이라는 건 언제건 배워두어 나쁠 것은 없으니까.”
사마의는 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물론 그 말에는 공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보다 연배도 한참이나 어린 꼬마에게 글공부를 수학하려니 다소 기분이 얼떨떨했다.
모양새가 안 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공짜로 가르침을 준다는데 마다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야.”
“나중? 내일부터 바로 할 건데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니?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지, 이 어린 소녀는 행동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생각해보면 이 장원에 방문할 때마다 몇몇 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어린 숙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항상 내가 도착할 즘엔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니.
그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엔 영 석연찮았다.
“좋다, 좋아. 그래. 내 어린 선생님을 두고 글공부에 뜻을 품어보는 것도 나쁘지야 않겠지. 아무렴?”
“나이의 고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걸 모르니까 아직도 주변에서 천치 소리를 듣는 거죠.”
“뭐야? 어떤 새끼가 그래.”
내 살면서 천치라는 말을 자주 들은 적이 없는데. 적어도 그 누구도 내 앞에서 날 천치라고는, 음. 아가씨나 운이, 방삼이 정도를 제외하면 많이 없지…?
“제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딱 대. 딱밤을 찰지게 때려줄 거니까.”
“설마 이 어린 소녀를 때리시게요?”
웃지 마라. 기분 나쁘다.
그러는 동안 사마의는 정자에 자리를 깔고 바둑판을 놓았다. 저번에도 한번 본 적이 있던 검은색 반상. 그때는 정말 사정없이 무너졌던 패전이 떠올랐다.
“몇 수나 물러드릴까요?”
“그딴 게 어딨어. 그냥 둬.”
사마의의 말에 피식 웃으며 흑돌을 쥐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공은 가져가시네요.”
소녀는 그리 말하면서도 딱히 책하는 투도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이런 건 지난 대국의 패배자가 선공을 쥐는 것이 맞다. 우리 동네에선 그랬다고.
그리고 한동안은 침묵이 흘렀다.
반상 위에 돌을 놓는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이번에도 백돌은 그저 내 공격을 받아낼 뿐. 흑돌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천천히 움직이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마의가 백돌을 마저 놓으며 말을 꺼냈다.
“최근에 백파적이나 황건적의 움직임이 요란스럽다고 하네요. 하동 인근의 백파적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던가.”
아, 그걸 막는가.
좌측 상단으로 이어지는 이음새가 끊겼다.
중앙을 중심으로 진을 구축하려 드는 흑돌과 그 주위를 포위하며 내가 뻗어 나가는 것을 잘라내는 소녀의 백돌. 의도가 너무 뚜렷하게 부딪히니 읽히기도 쉬웠다.
“그런가?”
여기서 끊기면 안 됐는데.
그리 생각하면서 적당한 말로 받아내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돌을 둔다. 아니, 잠깐만. 거길 또 끊는다고? 바둑 진짜 더럽게 두네.
“유주에서는 벌써 수십만이나 되는 황건적이 봉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최근 공손가의 제후께서 토목공사에 열을 올린 것에 분개한 것이 아닐까요?”
“토목공사는 언제나 시발이지.”
딱 한 번.
당시 만나던 창기를 보기 위해 도시로 놀러 나갔다가 잡혀 그대로 토목공사를 나가봤던 적이 있었다. 분명 그것도 지금과 같은 겨울이었지.
손가락이 얼어붙어 떨어질 것 같은데도 계속해서 성벽을 구축할 돌을 날랐다. 그 가공되지 않은 바위를 장정 수십이 붙어 나르는데, 한 번 나르고 손가락을 보면 손톱 사이에서 피가 터져 나왔더랬지.
즐겁지 않은 추억이었다.
“뭐, 이런 겨울에도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쓴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수십만은 너무 과장된 숫자 아니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유주자사도 그리 말하고 있으니 영 틀린 숫자도 아닐 것이에요.”
소녀는 그리 말하며 다시 백돌을 움켜쥐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게다가 백파적이면 그거지? 병주 남부와 사예주 일대에서 횡횡한다던 그 황건적 집단.”
보통 황건적은 좋건 싫건 그냥 황건적이라 불렸다.
그들이 어떤 이름을 내걸던 밖에서 보기엔 그냥 황건적에 불과한 것을, 그런 이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릴 정도면 나름 유명한 도적 집단이라는 뜻이었다.
참고로 도적 떼가 유명해지는 조건으로는 얼마나 사람을 잘 때려죽일 수 있는가도 연관이 있었다.
“아저씨도 제법 유명한 도적이었는 걸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다시 백돌을 둔다.
경쾌하게 반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유명한 도적이라. 딱히 그런 것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근래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 건 그리 나쁜 게 아니다 싶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사마준 어르신이 왜 내게 정치가의 안목을 기르라 하였는지, 왜 영웅이라는 감투를 거절하지 말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름값 덕분에 온현은 안전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연합군 내에서는 이름을 알렸기에 온현으로는 아무도, 당장 하내군의 태수인 왕광조차 온현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으니까.
유명하다는 건 이런 장점이 있었다.
“이젠 도적 아니다.”
그리 말하며 흑돌을 쥐었다. 반상은 어느새 포위를 마친 사마의의 백돌과 그것을 뚫으려는 흑돌의 팽팽한 대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좌 상단이 안 된다면 하단으로 돌을 놓는다.
“아니어야 하고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하단으로 이어지는 흑돌의 진로를 끊는다. 얼핏 보기엔 백중지세지만 감이 딱 왔는데, 이건 또 이 계집애의 술수에 놀아난 대국이었다.
“꼬마야. 이 오빠가 근래에 생각했는데 말이야. 너는 내가 좀 더 대단해지길 바라는 것 같다?”
“아저씨는 대단해져야죠.”
일부러 오빠라고 콕 집어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아저씨라고 선을 긋는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나름 기대하는 면이 있거든요? 당신이 흑산적과 어떻게 싸웠고, 여포와는 어떻게 겨뤘는지. 주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제법 인간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저씨는.”
“……얼마 주고 샀냐?”
이건 명백하게 매수가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하여 물어보니 사마의는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호세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걸 물어봤을 뿐이에요. 어린아이인 척하면서, 적당히 대단하다며 치켜세우니까 금세 다들 터놓던데요?”
염병할 새끼들.
아니 물론 딱히 기밀은 아니었다. 그렇다지만 제 대장이 쥐어 터진 일을 그리 쉬이 불어서야 쓰나. 흑산적이나 여포, 둘 다 내겐 아픈 기억뿐이었다.
“뭘 인상을 써요? 다들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소녀는 그리 말하며 마저 제 돌을 놓았다.
이걸로 몇 수였는가. 대충 100수를 넘긴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세하게 기억하기엔 힘들었다. 당장 대국의 판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감에 의존해서 돌을 놓고 있었다.
오히려 감에 의존하고 나서는 조금 풀리는 느낌도 드는 것이, 어쩌면 나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감에 의존하는 방식이 나으려나.
“아, 그거 자충수인데.”
“허.”
그래, 역시 사람은 머리를 쓰는 것이 맞다.
“아저씨는 상대 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나쁘지 않네요. 단지 너무 상대방을 압박하려다가 자멸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가르치듯이 돌 몇 개를 쥐고는 반상 위에 그 뒤 30수까지 늘어두었다. 방금 내가 둔 곳은 의미가 없는 곳이었고, 그 뒤 점점 좌 상단을 잡히고는 불계승으로 끝나는 그림.
“어휴, 난 도무지 이런 건 못하겠다.”
“그래도 익혀는 두세요. 이렇게 머리를 쓴다는 건,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도 대국을 읽는 감각을 기른다는 의미니까요.”
그리 말하며 바둑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기도 뭣하여 흑돌을 하나씩 집어 정리를 시작할 때. 사마의가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고개를 드니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과 눈을 마주쳤으니.
“도적의 움직임엔 주의하세요.”
“백파적 말이냐?”
그리 물어보니 사마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당장 그들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다른 제후들, 혹은 동탁일 수도 있겠네요. 천하에 도적이라 부를만한 이가 너무 많으니까요.”
“뭐 그리 두루뭉술하냐.”
당장 조심하라 이르는 것치고는 대상조차 명확하질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천하 만민을 모두 경계하고 조심해야만 한다. 자고로 굶으면 도적, 배부르면 백성이 되는 것이 현 천하의 현주소였거늘.
“아무튼, 우선 병졸의 훈련에 소홀하지 마세요. 특히 백파적은 동탁이 낙양을 비우고 난 뒤에 더욱 날뛰고 있다고 하니, 언제 어디로 움직일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동에 있다고 했지.”
하내와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그것도 멀다고 하긴 힘들었다. 당장 가도에 위치한 관문 하나만 넘어도 바로 하내까지는 일직선이었으니까.
설마 연합군 제후 몇이 위치한 하내 인근으로 진출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들은 과거 동탁이 보낸 토벌군까지 궤멸시킨 전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주의함에 나쁠 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내일부터 글공부를 시작할 거니까 그리 아시고요. 그때도 어린아이처럼 대했다가는 경을 칠 거니까.”
“허이구, 알겠수다 선생.”
행동거지는 흡사 어른이라 보아도 무방했지만, 정작 생긴 것은 예쁘장한 인형 같은 것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말해도 말이지.
그렇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어깨도 아직 만족스레 움직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당분간은 이렇게 요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세상 언제나 만족스레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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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으로 한 편 더, 아니면 내일 자정 3편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