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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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잘 쓰지 않아 먼지가 내리 앉은 방. 곳곳에 죽간을 정리해둔 흔적만 있을 뿐이지 사람의 흔적은 잘 느껴지지 않는 내실에서 사마준과 사마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어린 소녀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아야. 네가 보기에 호세라는 인물은 어떻더냐.”
그 질문에 사마의가 웃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차분하되 냉소적이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쁘진 않았어요. 힘만 믿는 무장이라고 하기엔 나름 머리가 굴러가더군요. 배운바 지식은 부족해 보이지만, 곳곳에서 지능 자체는 좋은 흔적이 보였으니까요.”
“흐음.”
소녀의 말에 사마준은 잠시 침음을 냈다.
제 손녀가 그리 말할 정도면 나름 볼만한 구석은 있다는 뜻이었다. 재능 있는 이가 넘치는 사마 가문에서도 감히 신동이라 언급할 수 있는 소녀가 사마의였으니까.
기본적으로 그는 손녀의 안목을 믿고 있었다.
“그래. 너의 의견은 알겠다. 이제 나머지는 네 오라비와도 상의해보도록 하마.”
사마준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사마의가 작게 고개를 들며 제 조부를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진소연은 어떤 사람이던가요?”
“흐음.”
그 질문에는 사마준도 살짝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진소연.
사마준이 봤던 진소연은 제법 대범한 여인이었다. 가진바 재능도 확실한 것 같았다. 주변의 정세를 읽는 식견도 뛰어나고 그에 대한 대처방안 역시 타당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만.
“뛰어난 이였다. 재능도 넘치고 배짱도 있는 여자였지. 그렇지만 한 가지.”
그는 그리 말하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제 예측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지더구나. 그건 분명 위험한 것이지. 식견이 좋다고 해도 한 번의 실수로 나락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적어도 사마준이 본 진소연은 그런 여자였다.
분명 뛰어났다. 말하는 것에서도, 행동에서도. 어디 하나 모났다고 느낄 구석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이였지만, 제 예견을 너무 당연하게 이뤄지리라 확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진소연도 그것을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사마준이 그리 느낀 것이었다. 몇십 년간 사람을 상대해오며 연륜과 경험을 쌓은 그의 안목은 분명 진소연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위험하지. 그런 이들을 믿고 사마 가문의 명운을 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냥 여양으로 떠나야 할지.”
지금의 정세는 확실히 위험했다.
반동탁 연합군은 아직도 사수관에 묶여있었다. 그만한 대군이 묶여있으면 당연히 잡음도 나오기 마련일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도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최근 하내태수 왕광이 하내 전역에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과 호족들의 감시를 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최근 사수관 공방전에서 여포에게 큰 피해를 본 상황. 그 피해를 메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식량이 필요할지를 생각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파견되었는지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하내는 곧 지옥이 될 게다. 우리는 판단을 해야만 하고. 원소 계파의 사람이라고는 하더라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그녀는 분명 사마팔달의 도움을 구했지요?”
사마의는 그리 물으면서도 못내 우습기만 했다.
진소연. 최근 급부상한 군벌이라고는 해도 그 관직은 기껏해야 현장. 은왕 사마앙의 후손이며 당장 소녀의 눈앞에 있는 조부는 영천태수까지 지녔었다.
제 아비 역시 아직도 치서어사의 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 주제에 사마 가문을 아래로 두고 부리려 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못내 우스웠다. 그렇지만 그것을 채 비웃지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
“안타깝지만 저희 가문에겐 현재 힘이 없어요. 아버님은 조정에 발이 묶여있고, 저희에겐 하내태수의 만행에 저항할 사병조차 없는 상황이죠.”
“딱 상황이 좋게 왔다고 해야 할까. 그 여자, 정확하게 우리의 사정을 꿰고 있더구나.”
그걸 생각하면 분명 머리가 좋은 여자였다.
여포와의 결전 이후로 바로 사마 가문을 찾아왔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사마 가문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는 말과도 일치했으니.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이 지켜드릴 터이니 힘을 보태어 달라며 자신 있게 웃었다.
“천하가 혼란하고 한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관직과 명예보다는 힘. 군권을 가진 이들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세상이죠.”
소녀는 제 작은 입술로 또박또박 그리 말했다.
“허어. 개탄스러운지고. 고작 하내태수 따위에게도 이리 쩔쩔맨다는 것이 우습구나. 세상이 변했어, 암. 변했고말고.”
동탁이 들어서면서. 황건적이 날뛰면서.
십상시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천하는 변했다. 사마준은 오랜 기간 그것을 지켜보았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 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할아버님. 소녀가 감히 말씀 올리옵자면 이번 제안은 받는 것이 옳다고 보입니다.”
사마의는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며 그리 말했다.
“어차피 의탁해야 할 것이라면 다른 제후들도 있지 않겠느냐? 의아야. 너는 어째서 그리 생각했느냐?”
그 질문에 사마의가 고개를 올렸다.
사마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가 조용히 응시하는 광경이 살짝 소름이 돋았으니.
평소에는 분명 귀여운 손녀였지만, 가끔 나이에는 맞지 않는 분위기를 풍길 때가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못내 불길하기만 했다.
사마의는 살짝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준과 눈을 마주쳤다.
“다른 제후들은 저희에게 관심이 없을 거니까요. 피하거나 숙이거나, 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잠시 그들을 우산으로 삼아 비를 피하는 것이 옳겠지요.”
“우산이라.”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하내의 호족은 연합군이 보기에 취할 이유도 없는, 단순히 제 치중을 채우기 위한 약탈 대상에 불과했다. 설령 지금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이 길어지면 반드시 그렇게 될 터.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군벌 중 하나의 비호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세력이 적다. 아무리 맹주의 계파라고 할지라도 그건 어쩔 방도가 없지. 우산이라고 쓴 것이 구멍이 뚫린 것이라면 이만한 낭패도 없지 않겠느냐?”
어쩌면 여양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천하의 사태를 관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마준의 그러한 의문은 당연하였으며, 그것에 대해선 사마의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수동적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사마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간 사태에 휩쓸릴 우려가 있어요.”
적어도 이 어린 소녀가 느끼기엔 그랬다.
사태는 자고로 주도해야만 했다. 적어도 휘둘려서는 안 됐다. 이 가문을 지키고, 더 나아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한 번쯤 도전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조부님.”
사마의가 느끼기에 곧 천하는 변할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인지는 그녀도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한나라는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천하와 가까운 인물은 누구인가.
딱 잘라 누구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황제는 동탁의 손에 있기야 했지만, 적어도 사마의는 이 천하의 패권이 동탁에게는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당장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움직이지 않은 제후들도 많아요. 게다가 낙양의 소식은 끔찍하기 그지없으니, 그런 이가 패권을 잡는다고 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제 작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면서. 눈을 감았다.
시야가 닫으며 조금 더 집중을, 조금 더 생각을.
사마준에게 그 모습은 다소 꺼림칙한 것이었다.
적어도 제 손녀는 멀쩡한 소녀로 기르고 싶었는데, 정작 정신을 차리니 손녀는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사마준은 그리 느껴졌다.
이래서 랑은 의아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는 이제야 이 아이의 오라비, 사마랑이 구태여 소녀를 배움의 터에서 멀리 떨어뜨렸던 이유에 대해 다시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네요.”
소녀는 중얼거렸다.
“진소연. 세력은 약하지만 그렇기에 이용하기 쉬워요. 원가의 손길이 닿기야 했지만, 그를 따르는 이는 애초에 많으니 그리 큰 악재도 아니고. 설령 일을 그르친다 해도 쳐내기 쉽고요.”
이 부분에선 사마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털 수 있다는 건 중요했다. 괜히 침몰하는 배에 같이 탑승할 의리는 없으니, 그녀가 승승장구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함께 가라앉을 이유도 없었다.
단지 걸리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네 아비가 아직 낙양에 있다. 혹여라도 사마 가문이 반동탁 연합군과 결탁했다는 걸 걸리기라도 하면 그 무도한 놈이 어떻게 나올지….”
사마준은 그리 말하며 말을 흘렸다.
이 어린 소녀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까딱하다가 줄을 잘못 댔다고 밝혀진다면 사마방의 목숨은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
“사마 가문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이를 보내야죠. 그렇지만 아예 도움이 안 된다면 함께하는 의미가 없을 터이니. 적어도 직계이며 영향력이 없는 이가 좋겠어요.”
“그런 이가 어디에 있겠느냐.”
당장 사마랑은 천하에 기재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다음 아이는 사마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를 포함한 다른 자식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이에 사마의는 너무나도 쉬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를 보내세요.”
“뭣!? 아니 된다. 너는 아직 어려!”
“그렇지만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잖아요? 이 소녀, 비록 경험은 미천하다 할지라도 그간 곁눈질로 보아온 것이 있습니다. 조금 이른 나이에 세상을 경험할 뿐이지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퍽 괴상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모든 이들이 그러합니다. 천하의 모든 백성은 어린 나이에도 검을 쥐고 전장에 서지요. 명가의 자제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사마의가 그리 말하면서도 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웃으니, 사마준은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발언은 사실 이걸 위함이라고.
이 어린 잠룡은 벌써 천하로 나가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천하라는 도화지에 사마의라는 먹을 바르고 싶은 것이었다.
가진바 재능을 세상에 실험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의아야. 너는 이리되기를 바랐느냐.”
사마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말도 없이 그저 침묵으로 응할 뿐. 그 보랏빛 눈으로 사마준을 바라봤다.
“……그래. 내 한번 얘기는 꺼내어 보마.”
그는 더는 사마의를 만류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마준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사마랑은 분명 반대하겠지만 소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바, 진정 손녀가 원한다면 어쩔 방도가 없기도 하였다.
저 잠룡이 어디 묶어둔다고 가만히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손녀가 얌전히 있던 것은 이런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았다. 한순간에 돌변한 손녀의 모습에 사마준이 적응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
사마준이 자리를 떠난 뒤.
남겨진 소녀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천하라는 무대로 향할 기회. 이것은 두 번 다시는 없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천하를 상대로 가진바 재능을, 이 몸을 불태워서라도 꽃을 피우리라.
권력을 위해 피를 흘려라. 올바른 정치를 위한 전쟁을, 천하를 안정케 하기 위한 반란을. 하여 이윽고 나 같은 이들이 살기 편한 세계를 만들자.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위하여.
“흐흐흣, 흐히, 아하하! 멍청한 랑 오라버니!!”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사마의라는 이가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미친년인지는 몰랐다.
이 어린 육체에 어찌 이런 괴물이 들어섰을까.
그것은 사마의 본인이 생각해도 의문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이 답답한 세상에서, 이 갑갑한 사마 가문이란 울타리에서 드디어 풀려났다.
소녀는 진심으로 진소연에게 감사했다.
드디어 시간이 됐다. 이제 세상에 드리우자.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우자. 만천하에 그 이름을 알리어, 이윽고 세상에 그 모습을 피우겠다.
사마의라는 이름의 한 송이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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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라는 캐릭터에 대해선 나름 고심을 했습니다.
본디 사마의라는 해석과, 자체적인 캐릭터의 구상.
흥미로운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스테이터스 관련해서는 다음 편 올리면서 후기로 같이 정리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