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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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를 바라보며 그 영감이 기분 좋게 웃는다.
“허허, 의아가 이리도 오두방정을 떠는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래, 누가 우리 의아를 괴롭혔더냐? 이 할애비가 혼쭐을 내주마.”
“할아버지까지 그러실 거예요!?”
소녀는 칭얼거리면서도 그 뱃살에 얼굴을 묻으며 포근히 안겼다.
“아무렴! 의아가 이리 귀여웠던 적이 몇 번이나 있다고. 매번 어른처럼 행세하는 것이 다소 불만이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으냐.”
손녀 바보라는 건 존재했다.
저 풍채 좋은 영감이 사마의가 안기자마자 바로 헤실거리는 꼬락서니를 보라. 아주 그냥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가게 생겼다.
저렇게 인자해 보이는 영감이 한 가문의 수장이라.
“그래, 그대가 그 병주에서 이름 높던 호세라 하였는가?”
그는 사마의에게 향하던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웃고는 있었지만 뭔가 껄끄러운 느낌에 머쓱히 고개를 숙였다.
“높을 이름도 없습니다요.”
그러니 이 할배가 피식 웃는다.
“허, 세간에서 한창 입방아에 오르내릴 영웅께서 그리 말하면 다른 이들이 뭐가 되겠나. 겸손한 것은 좋지만 가끔은 대범하게 나설 줄도 알아야지.”
영웅이라.
솔직히 그런 허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성에 의해 누군가에게 만들어졌을 뿐인 영웅. 그리 불리기까지 대체 몇 명의 사람이 희생했던가.
“피비린내 나는 허명에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 자네는 그리 생각하는가.”
그는 제 품에 안겼던 사마의를 잠시 밀어내고는 내게 다가왔다. 장대한 풍채의 영감이 앞에 서니 인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명의 명사가 서 있었으니.
“소개하지. 내가 이 사마 가문의 큰 어른인 사마준이라 하네.”
내민 손을 맞잡았다.
“병주 출신, 무성장군 진소연 장군의 휘하 행군사마 호세라 합니다. 사마 가문의 큰 어르신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아래로 낮추고 보니 조금 주름이 지긴 했지만 깨끗하고 흰 피부의 손이 시선에 들어왔다. 상처 하나 없는 손. 흉터투성이인 손과 맞잡고 있으니 더욱 티 없는 것이 두드러졌다.
“내가 영웅의 인사를 받는 날도 오는구나.”
영감, 사마준은 그리 말하며 빈손으로 제 옆에 선 사마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아까 영웅이라는 말은 별로라고 했던 것 같은데.
“허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게.”
그는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티가 났던가?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기도 했지만, 알면서도 저러는 건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구태여 싫다는 사람을 그리 부를 이유도 없잖아.
사마준은 웃는 낯으로 맞잡은 손을 놓았다.
“싫어도 어차피 영웅이어야만 하니까.”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영웅이어야만 한다니. 다른 이도 아니고 초면인 이가 그리 말하니까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네는 군인이군. 전사였으며 장군이기도 하겠지. 그러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그런 길만 있는 것은 아닐 걸세. 적어도 제 주인이 걷는 길은 제대로 볼 줄 알아야지.”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주인, 진소연이 걷는 길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는 분명 내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아가씨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가.
“그대는 정치가의 안목을 기를 필요가 있다네.”
사마준은 그리 말하며 제 옆에 선 사마의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그 소녀는 마지막에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으니.
“진 장군. 내 심사숙고는 해보지. 그때까지는 어떻게, 온현에 있을 생각이신가?”
“그럴 생각입니다.”
소연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이니 사마준이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이내 제 겉옷을 여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늙은이에게 겨울 날씨는 쌀쌀하네. 그럼 장군, 내 건강이 그러하여 먼저 들어가 보려 하니 무슨 일이 있으면 기별 주시게.”
“건강 살피세요. 혹여나 무슨 일이 있으시거나 사마 가문의 총의가 정해진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지요.”
그렇게 사마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등을 돌렸다. 그러니 그 옆을 지키던 사마의도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떠나던 차에 슬쩍 눈길을 주었으니.
“다음에 봐요.”
그렇게 사마 가문의 조손은 먼저 자리를 비켰다.
우리도 주인이 떠난 집안에 더 있을 수도 없어 일단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자연스레 아가씨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왼쪽 어깨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슬슬 부목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사수관에서의 대치는 계속될 터였다.
“안 물어보네.”
아가씨는 긴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직도 걷고 있었다. 이제는 사마 가문의 장원에서 나와 온현의 거리를 걷고 있으니, 주변의 시선이 모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뭘 말이요.”
“여기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가씨는 덤덤하게 그리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기야 했다. 적어도 사마준이라는 영감의 말은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기야 했다.
“말해달라고 하면?”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
솔직한 말로 나는 왜 아직도 여기 가문에 줄을 대려 했는지 그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는 언제나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니까.
궁금하지. 궁금하기야 한데.
“그럼 내 한 가지 묻겠는데, 난 앞으로 뭘 하면 될까. 정치적인 식견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긴 할 거잖소.”
어차피 아가씨는 언제나 자신이 확신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였다. 단지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로 나까지 엮인다고 하면 확실하게 내가 할 일은 알아두는 게 맞았다.
어설프게 실수할 수는 없잖아?
“…왜 사마 가문인지는 안 물어봐?”
“어차피 제대로 말 안 해줄 거 아니까.”
솔직히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가문을 일부러 찾아가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뭐 아가씨 나름의 합당한 기준점이 있는 거겠지.
그게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따라가기로 했으니까. 지금에 이르러서 무슨 근거로 움직이느냐 따위를 물어서 어디다 쓰겠는가. 믿는다고 정했으면 그 뒤를 따라갈 뿐.
“그러니까. 앞으로 난 뭘 하면 되오?”
“지금은 최대한 너의 이름값을 이용해야 해. 앞으로 하내 인근에서 분란이 생긴다면 너의 명성을 이용해서 그걸 억누를 필요가 있어.”
“거참, 어차피 쥐여 졌을 뿐인 명예인 것을.”
“그래도 필요해.”
그녀는 그리 단호하게 말을 하며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는 분명 모종의 마력을 가진 게 분명했다. 단지 이렇게 마주하고만 있어도. 바라보고만 있어도.
이런 억지를 들어주게 됐으니까.
“알겠수다. 한 번 노력은 해보지.”
“해보는 게 아니라 되어야만 해. 넌 앞으로 진소연을 상징할 상장이 되어줘야만 하니까.”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당장 운이만 해도 나보다 강하고, 심지어 나보다 강하다 싶은 사람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고작 나 같은 것을 진소연의 상징으로 삼기에는 부족했다.
“그건 사양하리다.”
그녀의 입지를,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나보다도 더 나은 인재가 분명 있을 터였다. 당장 운이만 하더라도 계속 발전하고 있으면서 나보다도 강한 아이였다.
그 외에도 찾아보면 나보다 나은 인재는 많았다.
“……왜?”
아가씨는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잡았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 느낌으로 그저 멍하니, 혹은 불안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확실하게 말해 그녀의 반응은 이상했다.
“왜. 내가 싫어? 너는, 너는…, 나를….”
내 오른쪽 어깨를 쥔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아, 아야, 아프오, 좀! 그게 아니라!!”
제 입으로 말하려니까 영 부끄러웠다.
어쩔 수도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만 하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반응이 너무 격했다.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일 일이던가?
“…내가 모자라서 그러오!”
“어?”
뭘 그리 허망하게 바라보는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아가씨의 표정이 못내 우스웠지만, 그 이상으로 어이가 없었으니.
당장 나는 여포에게 박살이 났다.
우리 애들의 희생으로, 조운과 아가씨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난 그 자리에서 진즉에 죽은 목숨이었다.
난 특별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알고 있었다. 난 눈앞에 있는 이 여자와 사는 세계가 다른 인물.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야 그렇잖아. 아가씨는 언젠가 더 위로 갈 사람이야. 그렇게 만들 생각이고. 그랬을 때, 나 같은 것이 상장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잖아.”
고작 1년 조금 넘긴 시점에서 그 원소와 연줄을 맺고 장군 소리까지 듣게 된 여자다. 나를 포함해 고작 백여 명 언저리의 도적 떼로 시작했던 것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
“아가씨는 대단한 사람이야. 그래야만 하고. 우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분명 아가씨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해.”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 입술을 본인의 검지로 막았다. 살짝 매끄러우면서 부드러운, 그러면서 따듯한 손가락의 감촉.
“너는 자신감이 없는 게 문제야.”
아니, 자신감은 있는데. 최근에 너무 대단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서 자기 자신에 의문부호가 붙었을 뿐이지, 솔직히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질 생각은 안 해봤다.
물론 천하무쌍은 천재지변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입을 막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 그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시작은 너였어. 처음이 너였고, 나를 여기까지 올려준 것도 너야. 너 자신을 비하하지 마. 난 너에게 분명 많은 걸 의존하고 있어.”
그녀는 그리 말하며 다른 손으로 내 뺨을 잡았다.
“너에게 의존하는 날 바보로 만들지 말아줘.”
부드럽게 내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 아가씨는 이윽고 입술을 막은 손가락을 떼었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고 느낄 무렵.
“이건 그 선금이야.”
반대편 뺨도 붙잡혀, 이젠 완전히 그녀의 손에 얼굴을 붙잡혔다. 가까운 거리에 양손으로 뺨을 붙잡힌 상황.
“무, 뭐 하는 거….”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따스하면서도 살짝 물기를 머금은, 말랑하게 맞닿은 그것에 정신을 차리니 아가씨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서로의 콧김이 얽힌다. 살짝 따스한 바람이 인중을 타고 양 뺨을 간지럽혔다. 붙잡힌 양 뺨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나도 눈을 감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솔직히 시간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그 따스하면서도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릴 뻔했으니까. 그냥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맞닿은 입술이 조심스레 떨어졌다.
“…이런 포상은 싫어?”
아가씨는 살짝 볼을 붉히며 그리 말하더니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가냘프게만 느껴졌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싫지는, 않다마는.”
얼빠진 소리긴 했지만,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겨울은 아직 끝날 줄을 몰랐다. 아직도 싸늘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으니 조금은 추워야 정상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후덥지근하다 느껴졌다.
따스했다.
이런 기분은 얼마 만인가.
그녀는 여전히 이쪽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저 멀찍이 나아가고 있었다. 무정하긴. 조금은 뒤를 돌아봐도 좋을 것을.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거참. 이런 걸 포상이랍시고 주면 더 기대하게 된다는 걸 저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그 너머를 기대하게 되어버리는 것을.
“같이 갑시다.”
“알아서 따라와.”
퉁명스레 말한 그녀의 귓불이 살짝 빨갛게 변했다는 건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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