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47화 (47/343)

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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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군세가 흑을 전반적으로 감싸고 압박하기 시작하니 그 포진 자체가 거대한 호구와도 같았다. 흑의 군세가 주위로 빠져나가려던 움직임도 주요 화점을 차지하며 막아내는 모양새.

악수를 두긴 했다.

그렇지만 내 개인적으로 패착이라 이를만한 수를 둔 적이 없는 거 같은데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완전히 백이 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을까.

상대의 빈틈은 끈질기게 물어뜯었다. 그 뒤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선이 길게 늘어졌다. 백은 그것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가 싶더니 이내 파격적으로 그 중간 이음새를 완벽하게 끊어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어찌 패착이라 부를 수 있을까.

머리가 아팠다.

“항복인가요? 병주의 호세라는 이도 별거 없네요.”

눈앞의 소녀는 그리 말하며 작게 웃었다. 이건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나를 향한 무시와 도발이었다.

“야, 꼬마야.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비록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새파란 어린애에게 지는 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여전히 제 보랏빛 눈을 빛내며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런 꼬마와 바둑을 두기 시작해서는.

아가씨는 진즉에 사마가의 어르신들과 얘기를 나누겠다고 하며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하여 홀로 남겨진 내게 접촉해온 것이 이 어린 소녀.

이름은 분명 사마의라고 했던가.

“하이고, 꼬마야. 너 참 바둑 더럽게 두는구나.”

소녀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다소 열이 받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현재 진행 중인 반상 위의 형세는 완벽하게 이 어린 여아의 것이었다.

흑돌의 공세를 그저 받아내며 흘렸다.

내가 집은 흑돌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공세에도 얌전히 받아내면서 양 측면으로 방향을 트는 백돌. 나는 그것 또한 잘라버리려고 움직였다. 분명 거기까진 내가 우세였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백돌은 완벽하게 흑돌을 둘러싸 포위하고 있었다. 오랜 장고의 기다림으로 이뤄낸 단 한 번의 역전.

이걸 역전이라고 해도 될까.

마치 미리 짜두었던 흐름 속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어때요? 항복?”

“……와, 이건 못 이기겠다.”

흑돌 세 점 정도를 쥐고 반상 위에 떨어뜨렸다. 백 불계승. 이건 어쩔 도리도 없었다. 완벽하게 내가 말려들어 패배한 판.

“쯧, 요즘은 명가 꼬마들은 다 바둑 공부라도 하니?”

어릴 적에 몇 번인가 돌을 집어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게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기에 완벽히 바둑에 대해 익숙해졌다고 논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와, 설마 이런 꼬마한테도 질 줄이야.

“명가의 자제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죠.”

소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얄미운 계집애. 입술이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아 이 한량을 이긴 것이 그리도 기쁘더냐. 그렇지만 이리 따지자니 또 이 계집애의 연배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애한테 졌다고 막 따지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

“하이구. 다짜고짜 바둑 좀 둘 줄 아느냐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어린애 놀아주겠다고 나선 내가 멍청이지.”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행위죠.”

말은 잘한다.

이 사마가라는 곳은 대체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는 거냐. 조금은 애다운 모습을 남겼어도 좋지 않은가. 난 처음에 웬 꼬마 하나가 쫄래쫄래 따라오기에 아이고 귀여운 것이라며 좋아하고 있었다고.

다짜고짜 그쪽이 병주의 호세냐고 물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러면서 바둑 둘 줄 아냐고 끌고 가는 부분에선 기절초풍.

패배한 지금엔 어안이 벙벙하다.

“복기하실래요?”

“개뿔. 딱 봐도 네 수에 놀아난 것이 보이는데.”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의 수읽기에 놀아났다.

갑자기 백돌이 중앙을 비우고 양 측면으로 찢어질 때, 차라리 거기를 막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중앙을 찢을 생각으로 돌을 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조금의 승산은 있었으리라. 물론 이리 말해도 어린 꼬마에게 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휴. 졌다, 졌어. 하여간 요즘 애들은 애들 같지를 않아요. 어? 나 때는 말이야. 응?”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 때도 그렇게 좋았던 기억은 없네. 응. 뭐, 어쩔 수 있나. 세상이 이런 것을.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여포와도 검을 겨룬 맹장이라 하여 기대했는데.”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칭얼거렸다.

그나저나 여포와 내가 겨루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걸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병주의 미친개라는 것도 그 지방에서나 유명한 일이 아니던가?

“그건 또 어떻게 아냐? 생각해보니 병주에서의 일은 여기서 또 어떻게 알고.”

“명가에 있어 정보는 생명이니까요.”

아니 뭐, 나야 명가나 호족의 생태계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어서 모른다지만 그 병주 외곽에서 벌어진 일도 꿰어야 할 정도로 치열한 세계였던가.

“병주의 미친개라면 적어도 기주나 하내 일대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걸요? 그 행보가 흑산적 장연이 세를 불릴 때와 굉장히 흡사했으니까. 신흥강호가 등장했다면 그 행적 정도는 꿰고 있어야죠.”

“그러냐.”

생각보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나보다.

아니, 이건 대단하다기보다도 장연의 대두 이후로 병주 방면 도적단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황건적에 흑산적. 게다가 백파적이라는 집단까지 활개 치는 세상에서 도적단을 단지 도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1년 만에 빠르게 세를 모아 흑산적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니.

어쩌면 이 인근에서 우리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그랬던 이가 지금은 반동탁 연합에서 가장 이름을 날린 맹장이 되었다고 하니 주변에서 흥미를 안 가질 리가 없잖아요?”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당겼다. 영악하게 웃는 모습이 참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잠깐만. 내가? 연합군의 맹장? 이름을 날린?

“내가?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했던 거라고는 열심히 쥐어 터진 것밖에 없었다. 정작 여포에게 칼끝 하나 가져가지 못했는데, 뭐? 이름을 날려?

차라리 관우라면 또 모를까.

이 상황에선 당연히 눈이 동그랗게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몰라요?”

“아니, 난 여포한테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는데.”

지금도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 당장 왼팔에는 아직도 부목을 대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포와의 일전이, 그 뒤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아저씨가 그렇다면야. 이유는 단 하나겠죠.”

그러면서 사마의는 제 앙증맞은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아저씨가 원소쪽 사람이니까. 게다가 막을 자 없다는 여포를 막아내었는데 정작 연합군에서 여포를 끝장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내세울 거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또.”

일리가 있네.

생각해보면 그렇기도 했다. 사실상 여포의 토벌은 실패한 꼴이니 체면치레할 것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맹주인 원소 입장에서 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방향성으로 생각할 것이고, 당장 여포를 정면에서 막아냈으며 원소 계파에도 속해있는 우리를 띄워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지?

조운이나 아가씨, 아니면 여포를 몰아냈던 조조까지.

어쨌건 내세울 인물은 더 많았을 터. 그런데 하필 내가 여포를 막았다는 모양으로 소문이 돈다는 게 이상했다. 솔직히 말해 아가씨를 치켜세우는 것이 모양새가 좋을 텐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잠시 고민을 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꼬마 앞에서 꺼낼 얘기도 아니었고.

나중에 아가씨가 오면 따로 묻기로 하고, 일단은 이 앙큼한 계집애를 어떻게 할까.

“어쨌건, 바둑도 끝났는데 안 가냐?”

“흥미 있는 건 전부 관찰해야 직성이 풀려서요.”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옷깃을 붙잡으며 그리 말하는 꼬락서니가 묘하게 웃겼다.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와 행동거지.

그렇지만 생긴 건 영락없는 꼬마인데.

“사실 제일 흥미 있던 건 진소연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아무래도 할아버님과 할 말이 있는 거 같아서 아저씨한테 온 건데요.”

당돌하게 말하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래서? 네가 보는 난 어떻디?”

“나쁘진 않았어요. 무식하게 힘만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적당히 마주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화법도 그렇고. 이 정도면 첫인상으로는 합격점이죠.”

사마의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것이 못내 우스워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소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아서라, 아서. 너한테 합격점을 받아야 뭐하겠냐.”

정작 합격점을 받아야 할 상대는 날 어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이런 소녀에게 합격점을 받아야 기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말에 사마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셨어요?”

“뭘?”

“당신들, 이제부터 저희 가문이랑 연을 맺으러 오신 거잖아요. 틀려요?”

연? 사마 가문이랑?

애초에 나는 아가씨에게 사마 가문을 한 번 방문하겠다고만 들었지 이유에 대해선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솔직한 말로 난 사마 가문이 무슨 가문인지도 몰랐다.

사마의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말씀하시길 연합군이 점점 하내 방면에 주둔한다고 하니, 그쪽 주군께선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신 연을 맺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연합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그 지역에는 다소 혼란이 따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고로 모이면 소란을 부르기 마련이니까.

실제로 하내 인근으로 연합군 일부가 모인다고 하면 당장 치안에도 문제가 생길 터. 과거 이런저런 전쟁에 참여하면서 민간인을 약탈하는 군의 모습도 종종 보았기에 우려에 대해선 공감도 갔다.

그렇다면 같은 연합군 소속이면서 원소 계파에 소속된 아군이 온현 인근을 지키고 있다면 문제는 없겠지.

그런 면에서 우리가 힘을 빌려줄 수 있다는 부분은 이해가 갔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마 가문일까. 알기로 그 외에도 명가나 호족가문은 많다고 들었는데. 사실상 난 사마 가문이 뭐하는 가문인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명문이기는 하나 그렇게 유명하진 않은 것이 아닌가.

어차피 원가와 맺은 연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추가로? 그럴 거라면 차라리 원가를 완전히 지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사마 가문보다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아. 아니, 아니다.”

이 상황에 대해 더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상대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무언가를 묻는 것도 우스운 꼴.

이에 사마의가 볼을 부풀렸다.

“뭔데요.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있으면 돼. 자꾸 어른인 척 재다가는 언젠가 큰코다칠 거다. 알겠냐, 꼬마야?”

“흥. 그 어린애한테 진 어른이 할 말은 아니네요!”

그러면서 홱 고개를 돌린다.

말하는 건 어른 저리가라면서 아직 어린애다운 면모는 남았다는 느낌. 저게 맞았다.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크는 것이 제일 올바른 일이었다.

“어이구, 우리 사마의 어린이. 삐졌어요?”

“아, 놔요!”

어차피 아가씨도 없어서 심심하겠다.

게다가 이 꼬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붙임성이 있었다. 이제 막 처음 만난 나에게 이리 편하게 대하는 모습이, 또 내가 편하게 대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재미있는 꼬마.

사마의의 첫인상은 딱 그러했다.

그래서 좀 놀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어, 아가씨.”

그건 소연 아가씨가 오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정신을 차리니 사마의 어린이는 벌써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분에 겨우 씩씩거리고 있었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어리지 않다고 하는 꼴이 퍽 우스웠다.

역시 어린이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허허, 우리 의아가 저러는 건 오랜만이네.”

아가씨의 뒤에는 웬 할배가 하나.

“할아버지이이이!!”

……나, 조금 실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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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는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로 묘사하고 싶습니다. 차차 사마의도 세세하게 묘사할 기회가 생기겠네요.

아직은 어리긴 해도, 그런 맛이 좀 있어야 사마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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