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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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한 발, 또 한 발. 정신을 차리니 나는 저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 나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방패를.
“어디 약한 놈들 잡아서 흥이나 나겠냐, 여포야아아!!”
배에서부터 나오는 호흡을 그대로 담아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검 자루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전신에 바짝 힘이 들어가 팔과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느낌까지 났으니.
이건 용기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용기가 아니었으니, 단지 공포 앞에서 겁을 먹고 몸이 바짝 굳은 것뿐이었다.
맹수의 앞에선 누구나가 긴장에 몸이 굳는다고 하던가. 지금 내 꼬락서니가 딱 그짝이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깐만 보아도 실감이 든다. 저건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가 없기에 나섰을 뿐이지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넌 또 뭐야.”
여포가 드디어 그 맹렬하기 그지없는 학살극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시뻘건 적토마의 위에서 눈을 빛내는 붉은 머리의 여인.
왤까.
난 저게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뭐긴. 천하무쌍을 차지할 사람이지.”
“하, 헛소리도 그 정도면 일품이네.”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하얗게 고른 치아가 눈에 들어왔다. 거참, 이렇게 보면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네일 뿐인데.
왜 저게 인간으로 안 보이지?
“어디 그래. 날 가지려 한다면 그만한 실력은 있으니까 하는 소리겠지?”
가져? 무슨 헛소리인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앞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녀는 천천히 적토마를 이끌며 날 향해 다가오니 그 말발굽이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누구도 감히 이곳을 향해 달려들 생각은 없겠지. 적군과 아군 모두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정한 것처럼 이 다툼에 끼어들 생각도 없어 보이니.
이게 여포와 나의 전장이었다.
“스읍.”
숨을 삼켰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탄 공기가 폐로 전해지는 걸 느꼈다. 답답하던 긴장감이 조금은 풀린 느낌에 검 자루를 꼭 말아쥐었다.
생각해보자. 저 인간병기의 어디를 노려야 할까.
지금 그녀는 내게 적잖이 힘을 빼고 있었으니, 방심하고 있는 지금 이 시기를 노려서 반드시 빈틈을 마련해야 했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적당히 여유를 부리는 그 낯짝을 뭉갤 곳은 어디일까.
한 번 질러볼까.
땅바닥을 바라보니 저 근처에 떨어진 창 하나가 있었다. 손에 쥔 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납도하고 달려가 그 창을 쥠으로써 얼추 방패와 창을 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정도면 한 번 대적할 수는 있겠지.
“창 하나 들었다고 되겠냐!?”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적토마의 옆을 발로 차니 드디어 그 마중적토라 이름 높은 적토마가 투레질을 하며 땅을 달리기 시작했다.
새삼 정면에서 날 향해 달려오는 적토마와 그 위에 탄 여포를 보니 그 위압감을 실감했다. 저런 것이 달려든다면 그야 뭐, 죽기 싫어서라도 함부로 덤비긴 싫어지겠지.
창을 역수로 들었다.
어차피 창 하나 들었다고 적토마에 오른 여포를 상대로 흠집 하나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다.
본디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쏘는 게 맞다.
아무리 여포라도 제 말을 향해 날아드는 투창까지 막을 수 있을까. 만약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흐읍!!”
몸을 젖혔다. 어깨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으며 그대로 천천히 상체를 오른쪽으로 젖히면서 단 한 번.
단 한 번에 모든 힘을 다해 던졌다.
소리를 질렀다. 거의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지르며 던진 창. 여포를 향한 것이 아니니 제아무리 천하무쌍이라 하더라도 그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잖아?
안 그래도 적토마는 타 군마와 비교해도 그 크기가 큰 편인 데다가 그 목 하단부를 정확히 노리고 던진 것이다. 여포가 막을 수 있는 범위 바깥을 향해 전력을 다해 던진 창이다.
못 막는 게 정상이었다.
“그리고 넌 비정상이네.”
여포는 창을 던지자마자 제 몸으로 말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 화극을 크게 휘둘러 날아드는 창을 쳐냈다.
그걸 보자마자 바로 몸을 뒹굴며 옆으로 피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적토마가 맹렬한 기세로 지나쳤으니, 아마 저기 계속 서 있었다면 내 몸이 저 말발굽에 짓밟힐 뻔했다.
그렇게 한 번 피하니 여포가 고삐를 잡고 멈춘다.
“이 새끼들이, 적토가 좀 유명하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렇게 보이는 족족 얘만 노리냐? 너희 혹시 짰니? 짜고 이러는 거야?”
여포는 제 화극을 쥔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성질을 부렸다. 적토마는 멈춘 자세에서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로 다시 이쪽으로 머리를 향하며 격하게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저를 노린 걸 알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도 말이 저렇게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 바로 방향을 반전할 수 있는 생물이었던가?
“아무래도 존재가 사기인 상대라면, 조금은 사기를 쳐야 대등해지지 않겠어?”
“대등? 대등은 앞으로 네 옆에 묻힐 해골이랑 되는 게 대등이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적토마에서 내린다.
“뭘 봐? 계속 타면 말밖에 안 노릴 새끼가.”
“아니 뭐, 그야 그렇기도 한데.”
계속 그 시뻘건 말에 타고 있겠다면 그 발모가지를 잘라서라도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게 할 생각이긴 했다. 그렇게 낙마하면 어디 한 군데는 성치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차라리 타고 있으면 안 돼?”
“조까세요, 미친놈아.”
여포는 그리 말하며 제 방천화극을 이쪽으로 겨눴다.
시퍼렇게 선 날이 반짝이며 빛나는 것을 보니 진짜 여포라는 이름의 천하무쌍을 상대하게 되었다는 걸 새삼 실감할 수 있는데, 기왕이면 힘 좀 빼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어디 그럼 한 번 죽어봐!!”
화극을 살짝 밑으로 깐 상태로 그대로 달려든다. 하단부에서 그대로 내지를 생각인가. 화극의 끝자락에 빛나는 창끝으로 그대로 찌를 생각이라면 좋다.
받아친다.
방패를 앞세웠다.
내지른다면 한 번 받아치겠다. 단 한 번만 받아칠 수 있다면 분명 빈틈이 생기리라 생각했는데 순간 여포는 방향을 틀어 몸을 오른쪽으로 젖히는 것이 아닌가.
휘둘러? 이 거리에서!?
“흡!!”
왼손에 쥔 방패를 치켜들었다. 화극은 이미 저 끝까지 날이 당겨졌으니 이제 휘둘러질 차례. 급하게 방패를 치켜들고 몸을 숙였다.
그래, 찌르든 베든 단 한 번만 버티면 된다.
“죽어, 이 새끼야!!”
화극은 날을 세우고 빠르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보인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이번 한 번만 흘려 넘기자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이상을 눈치챈 것은 다리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경장과 검, 방패와 몸무게까지 지탱하고 있어야 할 다리에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몸이 공중에 떴다.
“이게 무슨, 미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이 무언가와 부딪히면서도 한동안 바닥을 뒹굴었다. 한 번 날아간 몸을 바람에 날리는 종잇장처럼 하염없이 굴렀으니.
“크, 으으윽!!”
왼팔에 고통이 느껴졌다. 정신이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고개를 짓쳐 들었다. 내 옆에는 아군 하나가 쓰러진 것을 보아 아마 내가 날아가면서 그와 부딪힌 것이겠지.
여포는?
순간 든 생각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부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한 명.
“허, 버텨? 이걸 산다고?”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모양으로 씩 웃는다.
그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이번 공격에 살아있는 내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눈까지 살짝 동그랗게 뜬 표정. 거리는 제법 있어도 그 표정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얼마나 날아갔을까.
거리는 대충 성인을 대여섯 늘어놓을 수 있는 거리였다.
“이게 말이 되냐고….”
순식간이었다. 고작 한 번 막았다고 몸이 여기까지 날아왔다. 왼손에 쥔 방패를 바라보니 널찍하게 베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몸이 삐걱거렸다. 어깨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이 제대로 움직일 것 같질 않았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억지로라도, 죽기 직전까지 가더라도. 약속했다. 승리를 가져가겠노라 약속한 것이다.
승리하려면 여기선 일어나야만 했다.
“이야, 나름 진심으로 후려친 건데.”
여포가 한 발짝, 또 한 발짝 내게 다가왔다.
“야. 너 이름은 뭐냐? 뒈지기 전에 이름 정도는 남기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이름을 남기라는 말에 살짝 고민이 들었다. 이름이라. 그것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잘은 모르겠다. 애초에 본명은 버린 지 오래. 이제야 그 이름을 꺼내는 것도 웃기지만.
어머니가 불러주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전호.”
아주 오래전.
벌써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옛 과거에 버린 이름이었다. 아비에게 버려져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다신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이름.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아마 죽기 직전이라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안 하던 짓을 하겠어. 먼 옛적에 잊고 살았던 이름이 이제야 떠오르는 것도, 돌아갔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다 내가 죽기 직전이라 그런 거겠지.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몸은 그리 판단했던 거겠지.
“전호라. 흥, 뭐든 좋지. 이름은 기억했다. 무명 소졸이 내 화극 한 번이라도 막아 세운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아둬라.”
그러면서 여포는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왔으니 나도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갔다.
분명 전장 한복판이었다. 사방에는 아직도 소음이라 불러도 될 것이 즐비했고, 여전히 아군과 적은 서로 뒤엉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무엇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또 한 발짝. 그래서 나도 한 발짝. 이윽고 그녀와 내가 어느 정도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에 접근하니 여포는 제 이를 드러내고 흉흉하게 웃는다.
“그럼 이제, ……죽어.”
좌측에서 날아드는 화극에 검을 가져다 댔다.
철과 철이 맞붙는 소리가 귀를 찢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다시 거둬지는 화극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우측 하단에서 상단으로 붙이는 사선.
왼쪽 다리를 굽히고 몸을 젖혀 그것을 겨우 피해냈다.
그리니 다시 상단에서 내리치는, 그것을 막으니 우측 상단으로 이어붙이는 공격. 그걸 고개를 숙여 겨우 피하니 이번엔 화극을 빙글 돌려 창대로 후려친다.
“허어억!!”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 공격까진 도무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여포의 공격은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다음 공격으로 이어지니 저것이 천하무쌍이었고 그것이 여포였다.
“제법 잘 막네.”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녀는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 필사적인 것은 나뿐이고, 그녀는 그저 가볍게 화극을 몇 번 휘두른 것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
저게 천하무쌍이었다.
그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격은 내가 지금껏 가장 추구했던 그것.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맨손으로 검을 쥐고 전장을 돌면서 익혔던 싸움 방식.
그것을 저 여포라는 이가 너무나도 깔끔하게 완성하여 실현해내고 있었다.
“아직 일어날 수 있지? 갈비 몇 대 부러졌니? 못 일어나겠어? 지금 안 일어나면 반드시 죽을 건데, 기운 좀 내야지!!”
발소리가 들렸다.
몸을 우측으로 굴리는 것과 동시에 바로 옆에서 흙먼지가 튀었다. 화극을 내리쳐 땅을 가르는 소리가 거의 폭발하는 소리와 흡사하다고 느꼈다.
구르던 몸에 그대로 탄력을 줘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몸은 한계를 부르짖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자, 자, 자!! 아직 안 끝났다고!!”
바로 날아드는 화극의 날을 쳐냈다.
아니, 쳐낸 게 아니었다. 그냥 진행 방향만 막았을 뿐, 내가 맞댄 검이 퉁겨진 것이었다.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상단. 여포가 크게 방천화극을 치켜들었다.
“이번 거, 못 막으면 죽는다?”
말이 끝나자마자 내려치는 화극. 양손으로 검 자루를 쥐고 상단을 향해 치켜들며 그것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으니.
이건 막으면 안 되는 공격이었다.
신체가 비명을 지른다. 뼈의 마디, 손가락의 관절 하나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무게가, 거기에 실린 힘이 그대로 내 신체 전체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버텨라. 버텨야 한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
“크으으아아아아아아아!!!!”
허파에 남은 공기까지 모두 뱉어낼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소리라기엔 비명에 가까운 무언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여포는 내리친 그대로 힘을 주고 있었다.
양팔이 떨렸다. 특히 주로 힘을 견뎌내는 오른쪽 어깨 같은 경우에는 이미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는 애초에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은 무릎의 관절까지 끊어질 것만 같은 느낌.
그렇게 수 초를 막아냈을까.
무언가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윽…, 시바알……!!”
그건 내 검에서 난 소리였다.
뭔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소리는 내 검이 비틀리는 소리였다. 화극에 담긴 힘을 몇 번이나 버텨내면서 한계에 달했던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축이 비틀리면서 완전히 깨졌다.
왼쪽 어깨가 베이는 느낌이 났다.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베였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격통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가로로 베어오는 화극의 날.
어깨를 부여잡고 땅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리며 겨우 피했다. 드디어 움켜쥔 어깨에서는 피가 잔뜩 묻어나니 다행히도 팔 채로 베이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겠지.
“뭐냐,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어?”
“……기세는 처음부터 허세였고요….”
그리 말하며 웃으니 여포도 그것이 못내 어이가 없었는지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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