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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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의 사기도 분명 나쁘지 않았다. 겁에 질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도망치려는 자는 없었으니 그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거냐! 이게 그 연합군이라는 거냐!?”
쌍극으로 이뤄진 방천화극이 한 번 휘둘릴 때마다 아군 서넛이 쓸려나갔다. 그것을 몇 번인가 반복하니 밀집 방진의 의미를 완전히 잃고 공간을 허락한다.
공간을 허락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기병이 돌격할 틈이 생겼다는 것.
적의 선발 기병대가 먼저 목책을 부수기 시작하니 그 뒤를 잇는 기마가 말 그대로 아군의 진영을 짓밟아버렸다.
“대장!! 전열은 전멸이요! 여포, 저 미친년은 이미 2차 방어선까지 그대로 밀고 들어오고 있소!”
여포다.
그 여자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아군의 목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토마로 뛰어넘은 희대의 맹장. 그녀는 너무 여유롭게 아군의 진영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으니 그걸 막을 저력이 아군에겐 없었다.
그 뒤는 보는 바와 같이, 여포가 휘젓기 시작하여 무너진 아군의 방진을 그대로 뒤따르던 후속 기병대가 부딪치니 그걸로 끝.
뾰족하게 날을 세웠을 뿐이지 높이 자체는 그리 높지 않던 목책을 여포가 뛰어넘어 그대로 날뛰니, 그 후속 부대가 달려드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었다.
“조운은?”
“지금 우측으로 향하던 기병에 고전하고 있소! 너무 순식간이었어!!”
적어도 앞에서 조금은 버티리라 생각했던 내 계산과 아가씨의 예측이 전부 틀려버렸다. 그들은 여포라는 인간병기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아군 진영 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군 진형이 무너진다.
방진을 짜둔 효과는 있어 아직 완벽하게 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지 밀리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애당초 이 진의 정수는 적에게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고목과도 같은 두터움에 있었다.
그것을 여포라는 벌레 하나가 고목의 안쪽에서 갉아 먹은 꼴이었으니 그 고목이 어찌 외부의 충격을 버틸 수 있을까.
“대장, 후발 기병대도 몰려올 거요!! 어찌하면 좋을까? 나가서 싸울까? 아니면 뒤로 물려?”
한숨이 나왔다.
그야 한숨도 나올 수밖에 없지. 이미 최전선이 뚫린 상황에서 전제조건은 전부 무너진 지 오래였다. 목적 자체를 이미 상실했으니 이제 남은 건 적의 의도대로 휘둘릴 뿐.
“대자아아앙!! 어떻게 하면 좋냐고!”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이미 전선은 무너졌다. 여포가 그대로 직진하여 아군의 중앙으로 향하니 후속 기병은 세 갈래로 나뉘어 아군 진영의 틈을 벌리고 있었다.
압박할까? 전방은 이미 붕괴했다지만 아직 중열과 후열의 군은 통제가 잡혀있다. 이미 전선으로 번진 중열의 군까지는 어떻게든 지휘체계가 살아있기는 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여포가 문제였다.
여포는 지금도 제 적토마를 끌고 일직선으로 돌파하면서 아군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고 저걸 막아줘야 했을 조운은 현재 우측에서 발목을 잡혔다.
사방으로 압박을 한답시고 군을 펼쳤다가 오히려 여포에게 중앙이 뚫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아가씨가 있는 본영까지 쭉 뚫릴 위험도 있었다.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가씨는.
그녀만은 살려야 했다.
내 목표는, 내가 바라보는 목적과 이상. 그것은 전부 아가씨가 말한 것이었다. 전부 빌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소연.
그 여자만은 반드시 살려야 했다.
“중열의 좌측과 우측의 군에게 명해라. 전부 중앙으로 모이라 전해.”
“대장,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밀리지 않을까?”
밀리지 않을까가 아니었다. 반드시 밀린다. 이미 공간을 허락한 상태에서 오히려 그 공간을 넓혀주는 꼴이니, 분명 사방에서 기병의 압박이 들어오겠지.
그런데도 해야만 했다.
“어차피 이대로 버텨봐야 죽는다. 중앙으로 간 기마의 수가 상당하니 아마 중앙이나 우익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어.”
아마 그들은 중앙으로 들이친 군을 상대하느라 발목이 잡힐 터. 그렇다면 아군은 당장 밀려온 여포의 기마를 홀로 상대해야만 했다.
무리였다.
차라리 아가씨를 지키면서 최대한 버티는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서 단단하게 원을 구축하고 버틸 수만 있다면.
그게 안 된다면 진소연, 그녀만이라도.
“그러면 군을 뭉치라고 할까?”
방삼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안 돼. 그러면 전장의 주도권을 잃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목소리. 1년을 넘게 동고동락했던 이의 목소리.
“아가씨?”
“너 멍청이니?”
그러면서 내 손에 쥔 지휘봉을 획 빼앗았다.
“방삼. 당장 중열 좌군과 우군 전부 적을 압박하라고 전해. 지금이라도 최대한 공간을 줄여서 적어도 적이 재돌격을 해올 상황을 만들면 안 돼.”
“아가씨, 이게…, 무슨.”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아가씨를 향해 뻗고 있었으니 그게 만류를 위함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의도에서였는지는 나 자신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지,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아가씨! 당장 물러서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당장 적의 기병이 이곳을 향해, 그 여포가 여길 향해 오고 있단 말이요!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지! 뭣들 해, 당장….”
그리 말하며 그녀를 뒤로 빼려고 했다. 그렇게 손을 뻗어 아가씨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뒤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야?”
아가씨는 그런 손을 뿌리치며 내게 시선을 맞추니.
“지금 적에게 여유를 주면 안 돼. 적이 잠깐 물렸다가 다시 돌격이라도 한다면 다 끝장이야.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몰랐니? 그래서 그렇게 멍청한 판단을 한 거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오히려 공격적으로 갔다가 완전히 뚫리기라도 한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패전으로 번진다.
누구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버리는 셈.
“아가씨. 잘못하면 당신도 죽을 수 있어.”
“잘못 안 되게 하면 돼. 그러라고 있는 게 너였잖아?”
그리 말한 아가씨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 앞은 이미 전선. 방삼은 아가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좌측과 우측의 군의 전진을 명했다.
녀석, 아까 내가 말할 때는 되묻더니 아가씨가 말하자마자 바로 그것을 수행했다. 아마 방삼이도 알고 있었으리라. 거기서 되려 웅크린다면 반드시 패배하리라는 걸.
그렇지만 이것 역시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중앙이 뚫리면 그다음은 바로 여기야. 정말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그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나이 먹어가면서도 없었던 꿈을, 보고 싶은 광경을 심어준 사람이 죽을 수 있을 조금의 확률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이들의 목숨을, 설령 내 목숨이라 하더라도 그걸 희생해서 이 여자를 살리려 했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어서라도 진소연이라는 제 주군 하나를 살리고자 했다.
예전의 나라면 결코 이런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건 전부.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네가 지킬 거잖아.”
이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어느샌가 그 겁 많던 여자가 이런 전장 한복판에서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말했잖아? 넌 진소연의 첫 번째 검이라고. 그리고 무인은 결코 제 칼이 상할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언젠가 분명 그랬었지.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팔은 분명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 웃으면서 내 얼굴로 손가락을 뻗으니.
“난 네가 다칠 걸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뺨에 닿은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그것은 부드럽게 내 턱선을 타고 내려오며 뺨을 훑는다.
“반드시 내게 승리를 가져와.”
명령이라며 그리 말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도, 그 붉은 눈동자로 내 시선과 당당히 마주하는 그 모습도. 그렇지만 다리는 살살 떨고 있는 모습까지.
전부 우스웠다.
우습고말고.
언젠가 나는 생각했다. 이 오만한 아가씨는 경험이 부족하니 그것을 내가 채워주리라고. 아직 모자란 부분을 내가 채워준다면 그 옆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상황은 그것과는 전혀 반대였다.
분명 그녀는 떨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과 창칼을 부딪치는 소리, 말발굽의 소리가 울리니 말의 투레질 소리까지 전부 생생하게 들리는 전장은 분명 그녀에겐 익숙지 않은 곳이리라.
그렇지만 반대로 겁은 내가 더 먹고 있었다.
진소연이라는 여자가 죽는다는 공포. 내 꿈이 사그라질 공포. 내 이상이 무너질 공포. 그것은 모두 이 여자로 말미암아서 나온 겁이었는데, 그것을 메운 것도 그녀였다.
누가 누구를 채우겠다고?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 미숙했다. 완성되지 못한 원석과도 같았으니, 그걸 옆에서 지키고자 했다. 돌보고자 하였던 것이.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가씨를 그저 감싸고 보듬을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아직 미숙하니까. 아직 여리니까. 그런 변명과 이유를 대며 그녀를 품 안에서 놓지 않으려 했었다. 어쩌면 그건 독점욕일 수도 있었고, 지저분한 자기만족일 수도 있었다.
이런 대단한 여자가 내게 의지하고 기댄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안주하려 든 내 더러운 이기심이었다.
그녀는 직접 두 발로 걸으려 했다.
그렇다면 나는 확실히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내 주군이자, 내가 마음먹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까.
“쯧, 죽지나 마쇼.”
이젠 모두 털어내자.
그녀를 향한 이상한 집착도, 그녀를 보호하겠다며 오히려 성장을 저지했던 이상한 욕심도. 이젠 전부 털어내고 접을 때가 왔다.
“너야말로. 상대는 여포야.”
아가씨는 분명 웃고 있었다.
살짝 긴장을 머금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 표정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아가씨의 그 어떤 웃음보다도 밝고 아름다웠으니.
“좋아. 그걸로 됐어.”
다시 한 번 반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존경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 나는 그 표정과 웃음에 마음이 동했으니 이 어찌 반했다고 하지 않을쏘냐.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여자를, 이제 막 세상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여자를 그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난 이제 안 죽어. 그러니까 아가씨도 무리하지 말라고. 여차하면 도망가. 죽을 거 같으면 시체 더미 안에 숨어서라도 살아.”
“시체 더미에 묻히는 건 좀.”
그녀가 살짝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누가 시체 더미에 몸을 맡기는 걸 좋아할까. 그녀가 질색하는 표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했다.
“난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거든.”
내 경험담이었다. 뼈로 새긴 경험이었으니까 잘 듣고 반드시 살아줬으면 좋겠다. 지금부턴 잠시 그녀의 곁에서 자리를 비울 테니까 내 경험만이라도 그녀의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방삼아! 조운에게 연락이 닿으면 반드시 아가씨한테 오도록 전해! 늦으면 그 계집애 평생을 음행녀라고 불러버린다고. 알겠냐?”
“알겠수다!!”
그는 그리 말하면서도 제 손에 쥔 깃발을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우군과 좌군에 명령을 내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가씨, 내 잠시 다녀오리다.”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아 들었다. 여전히 묵직한 그 감각이 오늘따라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어딜 가야 하는지 몸이 알고 있었으니까.
“어딜 가려고.”
아가씨는 조금 전까지 웃던 얼굴을 그대로 굳혔다.
내가 하려는 말을 미리 눈치라도 챈 것일까. 참 명석하기 그지없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중앙으로. 당장 여포가 저리 달려드는데 압박하기도 전에 뚫리는 게 먼저라는 건 아가씨도 잘 알지 않수?”
내가 중앙으로 군을 모으려 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좌군과 우군을 움직여 상대를 오히려 압박하는 것보다도 먼저 여포에게 그대로 중단 채로 뚫릴 것이 뻔했으니까. 그러니까 아가씨라도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그랬었다.
이미 그것은 포기했으니 이제 차선의 책을 선택할 때가 되었다. 좌군과 우군을 움직여 상대를 몰아내려면 우선 중군이 버텨줘야 했다.
“너 미쳤어!? 지금 중앙으로 가면 죽어!!”
“아이고, 귀 떨어져라.”
아가씨는 분명 승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승리를 가져오려 하는데 뭘 그리 화를 내는가. 앞으로 사지를 향해 떠날 장수에게는 그런 분노보단 조금 더 달콤한 말이 필요했다.
“아가씨. 저번에 내가 뭐라고 했지?”
“이건 상하는 게 아니라 아예 부러지는 거잖아! 헛소리는 하지 마. 내 옆에 있어. 날 지킬 이가 필요해. 중앙의 군은 후방으로 돌렸던 군을 전진시키면 해결할 수 있어.”
못 한다. 나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불가능했고, 당장 후방의 있는 군도 중앙과 좌군, 우군을 돕기 위해 흩어진 지 오래였다.
“거 내가 돌아오면 환영식이나 준비하고 계쇼. 다음에 만날 땐 내가 천하무쌍이 되어 있을 거니까.”
못 돌아오면, 뭐 불귀의 객인가.
그리 생각하며 낄낄 웃었다. 아가씨는 마지막까지 내게 뭐라고 외쳤다만, 뭐 적당히 귓등으로 들어 흘려 넘겼다.
무인은 제 검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진소연의 검이니, 나도 저 자신이 상할 걸 두려워해선 안 되겠지. 검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러질 것.
만약 여기서도 부러지지 않는다면.
뭐, 어차피 여포가 아니면 내가 죽을 거다. 정말로 내가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천하무쌍이 되겠지?
“여포야아아아아!! 한 판 뜨자아아아!!!”
어디 내가 영웅이 되기 위한 받침대 정도는 되어달라. 정말로 여포를 꺾고 아가씨에게 간다면 적어도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해주지 않겠어?
남자가 싸울 이유로는 충분하고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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