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21화 (21/343)

21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황금 그 자체 나는 예전부터 눈치가 빨랐다.

눈치 하나만을 가지고 지금껏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첫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황건과의 전쟁도, 내 인생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영천에서의 전투도.

하다못해 병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도, 전부. 아가씨와 만난 순간부터, 만난 이후 지금까지. 언제나 눈치 하나만으로 먹고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인가?

“그리하려면, 이 원소가 적합하다고?”

그 고고한 철인 같던 남자가 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 무표정의 가면이 깨지고 나온 은은한 노기. 그러나 누가 저걸 은은하다고 평가할까.

그것은 조용하지만, 무엇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반면 그 영웅의 가면을 깬 이는 어떠한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뜻을 헤아려주실 분은, 저희 같은 무부에게도 기회를 주실 분은 원공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응당 당연한 것을 말했다는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원소를 정확히 마주 보고 있었다. 하등 기죽을 것 없이, 상대가 그 원소임에도 당당하게.

아니 아가씨, 원소 빡친 거 같은데??

이 시발, 당장 우리가 몇만에 둘러싸였다는 걸 잊으면 곤란하다. 우리 같은 무지렁이, 사실 저들이 원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가 있는데.

시발 이용할 수 있다며!! 이용은 개뿔, 괜히 벌집 잘못 건드려서 우리 다 황천가는 배편을 예약해놓은 꼬락서니였다!

내가 그래서 의심했잖아!!

원소가 상석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다 죽인다고 하면 어떡하지. 품에 있는 거라곤 작은 칼날 정도. 최소한 포박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아니 그래도 삼만이라는 병력이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

이제 진짜 죽겠구나 싶었을 무렵.

“크, 크큭, 크하하하하하!!”

원소가 체면도 벗어던지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암! 그러하지!! 응당 포부를 가졌다면 제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맞지! 그걸 위해 뭐든 이용함이 옳고, 필사적으로 저항함도 옳다!!”

그리 말하며 그는 상석에서 내려와 다시 아가씨와 마주 섰다.

와 시발, 진짜 이번에야말로 저승길 건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걸 이렇게 사네? 아가씨는 이걸 전부 알고서 그렇게 원소랑 기 싸움을 했나?

뭐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역시 아가씨라고 칭송해야 마땅했다. 그 원소가 저리 웃으며 친근하게 대하니, 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까.

사실 난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아가씨가 얼마나….

“허나 이 원소를 이용코자 하는 무례를 용서할 이유는?”

…얼마나, 어…, 얼마나 무모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웃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싸늘하게 굳은 얼굴. 살짝 떨어져서 보는 나도 간담이 다 서늘해질 기백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가씨는 이걸 정면에서 받고도 그저 웃을 뿐.

언제 저렇게 담대해졌나. 내가 알던 진소연이라는 사람은 사람 죽는 것 하나에도 안색이 창백해지던 사람인데, 대체 언제 저렇게 강해졌는가.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원소의 흉흉한 눈초리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겁을 먹어야만 하냐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원소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용서해야만 할 이유는 당연히 있죠.”

소연 아가씨는 그리 말하며 내게 손짓한다.

“원공께선 혹여 병주 흑산적 두령 중 이대목이라 칭하는 이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실까요?”

“그런 도적, 알 리가 없지.”

원소가 콧방귀를 치며 말한다. 아니 뭐, 모를 수도 있지. 내가 개고생을 해서 잡았다고 남이 알아주는 인물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좀 서글프긴 한데.

“어머, 그건 안타깝네요. 제가 원공께 드릴 선물로 가져온 것이 마침 그자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러면서 내게 재차 손짓하는 것이, 아무래도 미리 챙겨왔던 이대목의 수급을 가져오라는 것 같아서 허리춤에 매두었던 보따리를 가져갔다.

“이것이 이대목의 수급. 그 외에는, 뭐 조금 값어치는 싸겠으나.”

아가씨는 그리 말하며 한 번 빙긋 웃기를.

“흑산적의 수급 이천여 개.”

그것은 수레에 실어 운반하였기에 아직은 우리 진영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인사하러 방문하는 길에 사람 모가지 수천 개를 가져가기 뭣하여 두고 오긴 했다만, 명한다면 언제든 이리로 옮길 수 있었다.

소연 아가씨는 내게 건네받은 이대목의 수급을 탁자에 얹었다.

그리고 그 보따리의 끈을 푸니, 소금에 적당히 절여두긴 했으나 슬슬 썩어가고 있는 이대목의 수급을 원소에게 자랑스레 보인다.

“이 정도면 당신께서 저희를 이용하실 가치가, 저희가 당신에게 기댈 수 있는 근거로는 썩 적합하지 않을까요?”

천하에 흑산적을 그저 도적이라고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황실에서도 그를 다 진압하지 못하여 제후로 봉했을 정도인데, 하물며 일개 군벌로는 어찌 흑산적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들은 강했다.

설령 정규군과 달리 제대로 병법에 따른 움직임을 배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성질이 흉악하여 고관들도 차마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흥, 건방지긴.”

“고작 이천여의 병사로 흑산적 무리 일만을 토벌하였는데, 조금은 칭찬의 말씀을 건네어주셔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일만이라니, 아니 뭐. 그들의 본거지를 털었을 때, 거기에 있던 그들의 식솔들 숫자까지 합치면 얼추 일만쯤은 되겠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허풍이지 않은가?

“마땅한가라. 그래, 제 실력 하나를 믿고 원소를 찾아왔는가? 한낱 도적들의 목으로 이 원소의 환심을 사보겠다고?”

“환심이라기보단 증명이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지 찾아가기만 하면 저희를 써주실 거라는 철없는 생각은 품지 않았사오니. 하여 저희를 증명할 증거품일까요.”

아가씨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제 손으로 이대목의 목을 살살 굴렸다.

특이하게도 이대목의 수급은 목 아래까지 남겼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목줄을 씹었던 자국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원소는 그걸 보고 잠시 침음을 흘린다.

내가 봐도 조금 미친 흔적이긴 했다. 그 당시에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겨야만 한다는 의지밖에 없었다지만, 그래도 사람 생살을 씹는 건 좀 너무했나.

그렇게 살짝 반성을 하려다가 문득, 정말 불현듯이 떠오른 게 있었으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원소는 처음 보여줬던 근엄하고 자상하던 가면을 벗지 않았나? 반면 아가씨는 납작 엎드리던 자세를 던지고 처음보단 편하게 원소를 대하고 있고.

이게 언제부터였던가?

대체 언제 원소와 진소연의 관계가 이렇게 바뀌었던가.

대화의 판이 바뀌었다. 분명 진소연은 원소에게 예를 갖추었지만, 딱 거기까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자리의 주도권을 진소연이 조금씩 가져오고 있었다.

진소연. 소연 아가씨.

당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어?

저런 남자에게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정도로,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어?

“좋다. 흑산적의 수급 이천여 개라면 충분히 제 가치를 증명한 셈이지. 인정하마. 이 원소가 너희를 인정하겠다. 너희를 내 이름 아래로 거두어주마.”

그 원소가.

첫눈으로 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강자가 아가씨를 인정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의 신분을 증명해주겠노라, 그리 말한다. 고작 백 정도로 시작했던 일이, 어느새 천하의 패권을 놓고 싸우는 전쟁까지 왔다.

세간에서 가장 존경받는다는 명사가 우리를 인정한 셈이었다.

현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으며 사세삼공을 지낸 원가의 괴물이 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노라고 선언했다.

고작 도적이, 한낱 도적의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이상한 여자였다. 그것이 한 번 밀어줘 볼까 싶어졌기에 이 여자의 뒤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달리고 달렸더니,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게 과연 복일지, 흉일지.

그걸 잘 모르겠다.

“조만간 내 사람을 보내어 장군 패를 건넬 것이니, 차후 모든 제후가 모인다면 거기서는 이 원소의 이름을 대면 될 것이다.”

원소는 그리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가씨가 그에 감읍한다며 절을 한 번 하고서는 나가려던 찰나.

“다음에는 이런 무례, 용납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여 그 말에 답했다. 이에 맞춰 나도 아가씨를 따라 머리를 숙이며 원소에게 인사를 올렸고, 이제 정말로 나가려는 차.

“만일.”

원소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안 받아주었더라면, 어디로 갈 셈이었는가?”

그 말에 아가씨가 살짝 볼을 긁으며 머쓱하게 웃으니.

“아마 기주목 한복을 찾아뵈었겠지요.”

“요사한 계집 같으니라고.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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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연과 전호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원소는 상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는 제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에 다녀갔던 이들을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주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뒤, 천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공간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그 천막을 걷고 누군가가 나오니, 원소는 그녀에게 시선만을 힐끔 던졌다.

“저들이 말이 무도현장이지, 병주 변방의 현에서 사천이라는 병력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분명 도적을 규합해서 만든 세력일 확률이 농후합니다.”

“…곽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더냐.”

원소가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니 곽도가 고개를 숙인다.

“말하는 모양새도 제 주인의 위에 올라서려는 건방진 모습이니, 저들을 거두어 짐짓 원공의 명예에 누가 되진 않을는지 그것 하나만이 걱정이옵니다.”

“쓸모가 있지 않은가. 낙양에 사는 이라면 이대목이란 도적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한때 장연과 연합하여 낙양을 공격해오던 도적. 휘하에 몇만을 넘기는 큰 세력을 구축했던 도적이라면 그건 도적이 아니라 군벌이라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 뒤에 장연과의 내부다툼에서 참패하고 그 휘하로 들어갔다지만, 한때는 몇만을 거느리던 도적의 수급이었다.

하지만 곽도도 물러나지 않았다.

“거기에 한복까지 언급하는 걸 보아 저희의 내부 사정까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판을 보는 식견이 있다면 다소 도움은 되겠군.”

그렇지만 제아무리 책사라 하더라도 제 주군의 의향을 어찌 꺾을 수 있을까. 인간이 어찌 황금을 거역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저 건방진 모습을 보니 꼭 아만이 떠오르지 않는가? 저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욕심을 내는 모습이 그 아이와 닮았단 말이다.”

그것이 원소에겐 너무나도 우스웠다.

어차피 고작 사천.

만일 정말로 제 머리 위에까지 올라서려 들면 밟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원소는 언제든 치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용가치가 있을 때 이용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곽도는 그것이 퍽 불안하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본인의 의사를 꺾는 법이 없었다.

원소 본초라는 남자는 단지 고고하게 제 의사를 관철하며 앞으로 나아가니, 곽도는 그런 원소에게 반하여 지금까지 그의 뒤를 졸졸 따르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제 앞날은 어찌 되건 좋았다.

설령 황금에 매료된 이들의 미래가 파멸뿐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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