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20화 (20/343)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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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가장 큰 도박. 위가 쓰라린 것을 절실히 느끼곤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원소라는 인물을, 게임을 잘 알고 있었던 나이기에 할 수 있었던 도박.

「 원소 본초 」

통솔력 – 85

무력 – 72

지력 – 78

정치력 – 88

매력 – 91

이 세계에선 능력치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눈앞에서 제 금빛 눈동자를 부라리고 있는 저 남자는 확실히 능력치보다 대단한 부류의 남자였다.

고고하게, 그렇지만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 그저 만인을 내려다보며 위에 서는 자.

아마도 이게 이 세계에서의 올바른 지도자였다.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까. 통솔력이라는 스텟만으로는 채 전부 표현되지 않은 위압감. 위에 서는 자가 가지고 있을, 만인을 아울러 내려다보는 능력과 그 자세.

게임에서도 나름 고평가된 인물이지만 이 세계에서 실물로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걸 보고도 모르면 그 눈이 옹이구멍이지.

한때 천하를 쥐고 호령했던 남자.

천자를 대수롭지 않게 위천자라 칭하며 무시함에도 모두가 그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게 만든 남자. 어찌 보면 삼국지라는 기반을, 군웅이 할거하는 그 현장을 제 손으로 만든 남자.

난세의 계기가 황건적, 그걸 촉발한 것이 동탁이라면.

난세 그 자체의 서막을 알린 것은 원소였다.

정말 굶주린 아귀 같은 정치적 행보. 그 퍼포먼스로 정치적 당위성과 민중의 지지를 저 한 몸으로 끌어당긴 정치가이며, 그걸 위해서라면 제 가족조차 대수롭지 않게 버릴 수 있는 천하의 위선자.

그렇기에 게임에서도 그 남자는 숙일지언정 꺾이지 않고 버티고 버텨온 정치적 괴물로, 그리하여 마침내 권력을 잡아낸 고고한 황금과 같다고 묘사하던 남자.

원소 본초.

나는 괴물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흠. 이 원소의 이름을?”

원소는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 그대로 말했다.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을까.

“그대들의 마음은 알겠다. 나가서 싸우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일개 백성들도 이리 저 난적을 증오하니, 내 어찌 힘을 내지 않을까.”

그는 그리 웃으며 자리에서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의 온기가 조금 전까지 바깥에서 차게 식었던 손을 따스하게 붙든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왜 이 남자의 손을 지독하게 차다고 느끼는 이유는.

“허나 괜찮다. 나는 그대들이 그리 의기 있게 나서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용기를 얻었음이니. 그대들은 먼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라.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사는 많으니, 그대들에게 그 짐을 얹을 수는 없지.”

정말 좋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현장 따위 일개 백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 나대지 말란 말이었다.

웃는 얼굴로 곱상하게 꺼지라고 선언한 것과 뭐가 달라.

표정 관리해, 진소연. 여기서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찡그리면 안 돼. 이 괴물한테 틈을 보이면 그대로 잡아 먹힌다.

“저희가 한낱 무부에 불과한 이들이라지만 의를 압니다. 종묘사직을 겁박하는 역적이 천하에 발호하여 낙양이 신음한다고 하니, 변경에 있던 현장이어도 의를 행함에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흐음.”

원소는 내 말이 끝나니 눈을 감았다.

사실 웃기기도 한 것이, 고작 현장이 애당초 사병을 사천 이상 이끌고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아마 원소는 지금쯤 너희가 도적놈들이라는 걸 그리 포장하냐며 속에서 마구 비웃거나 멸시하지 않을까. 실제로 도적들 모은 거라 할 말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하여 제 임지를 등지고 나왔는데, 워낙 미비한 직책인지라 쉬이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 계시어 원소 어르신께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저희를 이끄신다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되어 보이겠습니다.”

“흠. 뜻은 고상하나.”

그는 그리 말하며 붙잡았던 손을 놓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세가 많네. 물론 정식으로 군에 입대하고 싶다면 자리가 남지 않을 것은 아니나.”

원소는 그대로 상석으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그대들은 별도로 움직이려는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원소가 제 손에 쥔 지휘봉을 손가락으로 빙글 돌린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몇 번을 지휘봉을 굴리며 생각하는 듯싶더니.

“하면 어떠한가. 그대들의 의기는 내 높게 살 수밖에 없는바. 그대들이 이 원소의 군문 아래 들어와 정식으로 작위를 받는다면 그대들을 귀히 쓰리니.”

여기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속 보인다, 원가놈아. 고작 세 치 혀로 사천이 넘는 군사를 홀라당 삼키려 드는 것은 너무 탐욕적이지 않니?

그래, 그렇게 욕심이 많아야 원소지.

“안타깝게도 저희 군문에는 다소 천박하고 거친 이들이 많아, 자칫 원공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들은 정규군의 지휘에 맞게 편성된 것이 아니 온지라.”

그리 말하고 살짝 옆을 바라봤다.

아무리 원만히 거절하기 위해서라고 한들, 직접 이끄는 이들을 천박하고 거칠다고 깎아내리는 것. 혹여나 전호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어 살짝 눈길을 돌렸다.

살짝 곁눈질했음에도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이미 나만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는 작게 웃으면서 눈을 감는다.

고마워. 덕분에 안심했어.

이제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천박하다라. 확실히, 이 원소의 군문에 천박한 이들이 들 자리는 없지.”

원소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죽어도 기품을 가지고 우아하게, 품위를 지키려던 게임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래도 그런 이들이기에 전투에 있어서는 범과 같이 용맹할지니, 원공께서 저희의 신분을 증명만 해주신다면 동탁군의 목으로 그 은혜를 갚겠나이다.”

“그대들이? 그 역적의 군대는 병주자사 정원의 군과 낙양의 방위군까지 제것으로 만들었다. 휘하에는 맹장들이 즐비하지. 그런 동탁군을 그리 쉬이 도모하겠다는 저의는 솔직히 잘 모르겠군.”

그리 말한 원소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도 그의 퍼포먼스였다. 안타깝다는 것처럼, 그렇지만 한심하다고 말하는 행동거지.

그의 행동은 하나하나에 무언가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드디어 한 번 내지를 때가 왔다.

“저희가 신분이 미천하다고 하여 뜻이 없진 않습니다. 그 뜻을 가지고 용사들이 모였으니, 미천한 신분이라 한들 그 능력과 뜻에 귀천은 없을 것입니다.”

도박이다. 여기가 가장 도박이었다.

원소는 노비 어미의 배에서 나온 얼자. 그에게 미천한 신분은 언제나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대놓고 그걸 건드려버렸다.

은은하게. 원소 본인을 미천하다고 폄하한 것은 아니나, 확실하게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들린 소리지만, 그건 분명히 이를 가는 소리였다. 그래, 원소는 그랬다. 게임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는 그 누가 제 앞에서 신분을 언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

생각해라. 이미 대본은 거의 완성됐다. 남은 건 애드리브. 돌발적인 상황에 어떻게 잘 대처하나 뿐이었다.

실수는 죽음이다. 살려면, 살아서 더 높은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나는 이 거지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아, 더욱 높이 오르겠다고 정했다.

원소가 얼마나 대단하건, 이제 질 생각은 없다.

게임에서의 그는 이미 익히 아는바. 그 성향을, 의중을.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립하여 현재 상황과 조립한다. 그렇게 하나씩, 퍼즐을 맞추다 보면 언젠가는.

원소, 당신은 황금이다.

단지 그 빛을 뽐낼 뿐이지만, 그 뒤에는 상처가 잔뜩인 것을 왜 모를까. 누구보다 잘 안다. 이 세계에서 당신의 생각. 당신의 의중.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

당신의 미래까지.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단 한 사람이었다.

“신분이 미천하면 언제나 엎드려있어야 합니까? 신분이 낮으면 천하에 제 뜻 하나 펼치지 못하는 것이 운명입니까?”

아니지. 그게 아니었다.

적어도 원소. 너만큼은 결코 이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주변 이들은 네가 천한 신분으로 유교의 도리를 지켜 6년 상을 치르고 원가에 이름을 올린 것만 알았다. 당신의 그 뜻을 단지 지극히 효심이 깊고 바른 뜻을 품는 이로만 알고 있었다.

누구 하나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던 당신에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오로지 황금 그 자체인 당신뿐.

백조는 우아하나, 그 수면 아래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발버둥을 친다.

딱 우아한 기품을 중시하는 것이, 그러면서 밑에서는 칼을 갈며 천하를 차지하려 드는 것이 딱 당신과 흡사한 생물이었다.

“미천한 이도 뜻이 있습니다. 고작 신분이 가로막는다면, 그걸 부수고자 발버둥을 치러 왔습니다. 예. 솔직히 저희는 동탁을 잡아 출세하려고 왔습니다.”

당신은 이런 사람을 그냥 지나치진 못해.

이건 확신이다. 원소의 생애와 뜻을, 게임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전부 보았던 나였기에 할 수 있는 확신.

이 세계가 아무리 현실과 같다고 해도.

결국에는 게임을 답습했을 뿐이다.

“예. 저희는 동탁을 잡아 출세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를 잡고 신분의 벽을 넘어, 언젠가 천하를 비석 삼아 그 이름을 새기기 위해, 당신께 왔습니다.”

“그리하려면, 이 원소가 적합하다고?”

살짝 노기가 서린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뜻을 헤아려주실 분은, 저희 같은 무부에게도 기회를 주실 분은 원공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아무렴. 너밖에 없다.

이 천하에서 가장 가파르게 주가를 상승시키고 있는 인물, 이윽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남자. 평판도 좋고 인지도도 높으면서, 든든하게 우리의 뒷배가 되어줄 남자.

황금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당신 원소는 황금 그 자체인 남자. 그러나 그것은 더럽혀진 황금이니, 그런데도 제 의지와 뜻으로 고고히 위에 설 남자.

너는 우리 같은 이들을 버릴 수 없다. 신분의 벽을 넘어서려는 이들의 강함을 너는 안다. 세간의 시선을 넘어서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너는 안다.

알기에 우리를 무시할 수는 없을 터.

설령 이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소라면 절대 우리를 무시하진 않을 거다. 아직 원소는 제 지지기반을 다 닦아놓지 못한 상황.

만약 원소가 하북을 장악한 뒤라면 힘들었다.

그는 뒤도 볼 것 없이 무례하게 제 신분을 건드리며 의중을 떠보는 우리를 대번에 처형했겠지.

지금밖에 없었다.

원소가 가장 가진 것이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힘을 원할 지금. 이 순간이라면 원소는 결코 우리를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전호야, 내가 말했잖니?

지금의 원소라면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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