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15화 (15/343)

15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흑산적 아직 채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 슬슬 해가 올라와 붉은 여명이 드리울 즘, 평소라면 조금 더 자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눈이 뜨였다.

일찍 깨어 시간은 있었기에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축 늘어진 몸을 다잡았다.

전장에서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다소 우스웠지만, 실제로 너무 이른 시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전장이라도 그곳에 서는 건 사람이었다.

그들의 피로와 소모를 생각하자면 어느 정도 이치에 맞게 병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가끔 그러다 보면 전쟁이 길어지는 경우엔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서로 비슷한 시간에 움직이는 경우도 종종 존재하고는 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일까.

머리맡에 놓인 검을 쥐었다. 아직 날은 살아있지만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이 보였다. 아직 휘거나 하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곧 다른 검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나름 유주까지 가서 비싸게 주고 산 것인데, 이게 싸구려였건 너무 험하게 썼건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물론 그간 잘 썼으니 이번 전쟁에서 너무 험하게 굴린 탓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검이건 창이건, 아무리 잘난 명품이라 하더라도 결국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가꾸고 벼린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무뎌지고 부러질 소모품.

나는 아가씨의 검이 되겠노라고 자신했지만, 언젠가는 손에 쥔 검처럼 이가 빠지고 무뎌지지는 않을까.

그런 미래는 되도록 늦게 찾아오길 바라며 칼날에 기름을 먹였다. 웬만하면 숫돌로 좀 갈아내고 싶었지만, 우리 처지에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다소 사치였다.

물론 정규군은 그런 기구를 짊어지고 다니는 병사도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어디 정규군이던가?

염병할 도적 새끼들이지.

“크흐.”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 딴생각하다가 기름을 좀 너무 많이 먹였다. 흐미, 이 아까운 것.

잽싸게 그걸 천으로 닦아내려 했.

“호세!!”

다가 깜짝 놀라 손이 미끄러졌다. 덕분에 기름을 닦아내려던 헝겊과 함께 손이 아주 씹창 나버렸다. 벌써 베인 손바닥에서 피가 몽글거리며 올라오고 있는데, 여기선 눈에서 흘러버린 눈물도 찔끔.

“아, 좀! 들어오기 전에 인기척이라도 내면 어디가 덧나냐? 너의 그 모난 양심에 덧날 상처는 있더냐?”

“기척이고 자시고 당장 따라와요!”

뭐냐 이 기백은.

“왜, 이런 꼭두새벽부터. 설마 너, 진짜로 몸이 달아오르기라도 한 거냐?”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운이 내 어깨를 거의 내려치듯이 부여잡았다. 아니, 농담도 못 하냐 이 계집애야.

"지금 그런 얘기할 시간도 없어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는 그대로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막사에서 나와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얼굴만 보면 오히려 본인이 더 하얗게 질려서는.

그것보다 뭔가 탄 냄새가 난다. 저 멀리서 뿌연 것이 처음에는 안개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연기 비스름한 것이 아닌가?

탄 냄새가 너무 독해서 그런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야, 어딜 가는 거야.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벼랑길만 있을 뿐인데.”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에서도 보이는 연기, 그녀가 향하는 방향. 모든 게 단 하나의 의심으로 다다랐으나, 그걸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아니, 제발 아니길 바랐다.

“그 벼랑길 아래에는 저희 아군의 진이 있기도 하고요.”

왜 그런 말을 하냐. 그냥 평소처럼 해라. 조금만 놀려도 금세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러면서도 평소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있었잖아.

지금은 너의 자신 있는 표정이 보고 싶었다.

물론 입으로 꺼내지 않은 바람이 이뤄질 리 만무했고, 그녀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내 손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평소에도 제법 하얗던 피부가 기분 탓인지 창백하게 질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 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는 날 이끌었고,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리면서 반쯤 체념했다.

그리고 도착한 벼랑길.

채 해가 뜨지 않았기에 더 선명해 보이는 것인가. 붉은 화마는 그 빛을 밝히며 단지 거뭇한 연기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과 함성.

“…조금 전에 확인됐어요. 아군의 2진은 이미 불길에 휩싸였어요.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아군은 퇴각하는 형세를 유지하면서 교전을 계속하고 있고요.”

“교전, 이라.”

네 눈깔은 옹이구멍이냐. 언제부터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것을 퇴각이라 불렀고, 채 도망치지 못해 살해당하는 것을 교전이라 불렀는가.

“…가장 날랜 병사들을 주면, 얼마나 걸리겠나.”

“……적어도 3시간. 한 번 영채를 경유해서 돌아가야 하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어요.”

이리도 눈에 선명히 보이는데, 지금도 아군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리는데. 그들을 잡아 삼킨 불길이, 이리도 선명한데도.

그런데도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저희가 완전히 당했어요. 저쪽에 대장기가 걸린 걸 봐서는, 저희 눈을 속이고 본대의 후방부대를 전부 아래쪽 가도로 돌린 게 분명해요.”

이 벼랑이 우리를 갈라놓았구나. 방삼아, 너는 살아있긴 하더냐. 차라리 너를 데리고 오지 말 것을, 그냥 너희는 너희끼리 살게 놔둘 것을.

우리는 언제나 졌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순간에서 패배를 경험했었다. 신분이 천해서, 가진 게 없어서. 그냥 그런 걸 납득하고 사는 순간부터 이미 졌었던 것인데.

이기고자 나선 순간에도 또 패배를 경험하는가.

“저기요, 듣고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방책을 생각해야 해요. 차라리 여길 포기하고 영채에서 농성한다던가, 뭔가 방책을.”

“지금 영채에 틀어박히는 건 자살행위다.”

안 그래도 전체의 주도권은 저쪽에 내어준 상태였다. 그렇기에 저들의 눈속임 하나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아래쪽 가도가 무너졌다.

그런데 아예 영채에 틀어박히자고? 거기가 뭐 천혜의 요새라도 된다던가. 당장 목책으로 벽 좀 둘렀을 뿐인데, 거기 가둬지는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당장 불만 질러도 다 타죽을 거다. 그건 하등 논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라. 생각해. 지금 당장이라도, 전황을 다시 뒤집을 기회가 있는가. 주위의 지형은, 상황은, 아군의 전력은, 승리 조건은.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조운! 지금 당장 주변에서 모포란 모포는 전부 싹 긁어 모아와.”

“모포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1번대, 우리 애들 전부 소집하고. 그게 끝나는 즉시 너는 가장 날랜 것들만 추려서 바로 저리로 달려와. 최대한 빠르게. 2시간 이내로.”

말이 되냐고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무시하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불길은 걷잡을 수 없었고, 적이 내건 군기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남은 아군은 죄다 가도를 뒤로하고 영채로 후퇴하는 양상. 생각보다 꽤 다수가 살아남은 것이 보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쩌면.

* * *

“전부 뒤로 도망쳐라!! 살아남아라, 퇴각해! 들리는 놈들은 어서 물러나라!!”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방삼은 제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음을 느끼면서도 어떡해서든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다 죽을 수는 없었다.

뒤로 물러나야 했다. 전부는 무리다. 그렇지만 적어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인원은 살려서 뒤로 물리면서 어떻게든 다시 한번 지휘체계를 다잡으며 병을 정비한다.

여기서 더 가다 보면 결국에는 산세와 마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고지를 잡고 다시 한번 버틸 저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방삼은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상황에서 정비는 무슨…….”

대패도 이런 대패가 없었다.

이미 아군 진영은 불에 다 타버렸다. 도망치는 녀석들도 추격해오는 흑산적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어떻게든 최대한 도망치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불길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잔뜩 먹어가며 도망쳐야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이 이끄는 병력은 본디 도적이었다.

오와 열은커녕, 대열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던 녀석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어떻게든 부려먹을 수 있게 만들기는 했으나, 이런 최악의 패배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을 재빠르게 추스를 방법이 없었다.

알고 있었다. 방삼 역시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답이 없다는 사실도, 이제는 정말 패배를 받아들여야 할 때라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최대한 후미에서 도망쳐 나오는 아군을 받아들인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위로 올려보낸다면 한 번의 기회는 남지 않겠는가.

방삼은 힘도 들어가지 않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에휴. 인생도 참, 지독하구만.”

저 지근에서 그들의 대장기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방삼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미 죽은 이들을 제외하면 얼추 뒤로 물러난 것이 보였다.

대장, 내 미안하오.

그는 마음속에서나마 작게 사과를 하며 검을 쥐었다.

“내가 진짜 존나게, 이 심장이 찢어지게 미안하니까. 그러니까 저놈 목이라도 가져다가 바치면, 그러면 좀 용서할 구실이 생길 것 같수?”

방삼은 그리 말하며 낄낄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이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제 몸도 정상이 아닌 것이, 제 병사에 지켜지는 적 대장을 어떻게 치겠는가.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기다렸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날 방도가 없음을 방삼은 익히 알고 있었다.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도망친다고 하여도, 생을 유지했다고 하여 그게 반드시 살아있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죽기보다 나쁜 삶은 있었다.

방삼에게 있어 여기서 도망쳐 생을 얻는다면, 그건 죽음보다 못한 삶이 될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적 대장기를 기다리며, 그들을 붙잡아 조금이라도 아군이 도망치는 것을 돕고자 했다.

그의 숨이 가빠왔다.

곧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꼈을까. 이미 죽음을 각오한 눈은 멍하니 적 대장기만을 바라보며, 그저 단지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제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뒤에서 들려오는 일련의 함성에 방삼의 정신이 퍼뜩 깨었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눈에 생기가 돌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대체 이 상황에서 누가 여기를.

그리 생각하고 뒤를 향한 고개, 그 눈에 비친 것.

“뭐냐, 아직 팔팔하네. 거 주저앉아서 뭐하냐?”

“대, 대장…!!”

방삼은 그의 눈을 의심했다. 아직 저 위쪽 진영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벌써 여기에 있는가. 야습에 진영이 박살 나고 채 큰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전에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을 리는 없는데.

혹여나 이 진영에 들르고자 하였다면 사전에 연락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방삼은 이윽고 제 대장의 몰골에 눈이 갔으니, 투구 아래로 찐득하게 흘러나오는 핏줄기가 보였다.

“대장! 머리에서 피가, 아니 시발? 팔은 또 왜 그 모양이요?”

인제 보니 왼팔도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방삼이 제 눈을 의심하여 몇 번이나 눈을 비비었으나, 제 대장의 모습이 퍽 이상한 것이 바뀌진 않았다.

그런 방삼을 바라보며 전호는 씩 웃었으니.

“오다가 굴렀다.”

이까지 드러내며 웃는 전호의 모습에 방삼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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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기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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