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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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자 하는 적과 막고자 하는 아군. 그것이 계속 힘겨루기를 하며 서로 밀고 밀리는 양상을 취하며 전선은 고착상태에 이르렀다.
저들이 아무리 흑산적이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도적. 그래서 그런지 뭉치기는 할 줄 아나 전술이 미약하니, 그저 닥치고 돌격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우리를 두들겼다.
처음에는 그 맹렬한 공격에 다소 밀리는 모습도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전투가 질질 끌리면 끌릴수록 아군 역시 그것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썩 봐줄 만한 느낌으로 저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막기만 해도 저들이 제풀에 나자빠지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더라도 수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피해가 더 막심하니, 이대로 막기만 해도 그들 전부를 갈아 마실 수 있을법한 기세였다.
“이상하지 않아요?”
조운은 사뭇 어두운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그녀는 그 은빛 창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저 멀리서 대치하고 있는 흑산적을 가리켰다.
“대체 뭐가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가 안 맞아요. 전술도 없이 그냥 병사를 들이부을 뿐,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어떠한 움직임도 안 보이잖아요.”
실제로 그들은 요 일주일 내내 그저 공격할 뿐이었다.
혹여나 밤을 틈타 공격을 가해오진 않을까 하여 보초까지 세우고 교대 조까지 편성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 했던 지난날의 노력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물론 그런 돌발상황은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비는 해놨으니 야습을 걸어왔다면 그 병력은 일소할 수 있었을 것을.
그것만 생각하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게 된다.
“일단은 지켜보자고. 방삼이 쪽에서도 아직 이렇다 할 신호를 보낸 것도 아니고, 그쪽은 그쪽대로 잘 틀어막고 있다 하니까.”
조운은 그런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상하다니까요? 상대도 바보가 아닌데, 이렇게 백날 해봐야 안 뚫리겠다 싶을 건데도 저리 무모하게 병력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네 생각보다 도적은 바보들이나 하는 직업인데.
그런데 또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주기에는 나 자신을 바보라고 소개하는 것 같아서 영 떨떠름했다. 이래 봬도 과거에는 나름 머리 좋은 놈으로 통했던지라 나름의 자부심일런가.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당장 대응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도 그렇긴 한데요.”
그녀도 거기엔 고개를 끄덕이며 짜증스레 제 군청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 답답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차라리 적 두령이라도 어느 정도 다가온다면, 그의 목을 쳐 전쟁을 끝내보기라도 할 것인데.
안타깝게도 놈은 예상 이상으로 주의성이 깊은지 저 멀리서 지켜보고 호통만 칠 뿐, 결코 이 인근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하기야 조운의 그 날뛰는 모습을 보고도 앞으로 나설 이가 몇이나 되겠나. 나도 한 싸움질 한다고 자부했음에도 그녀에겐 몇 수 접어야만 했다.
아가씨는 이런 걸 알고 조운을 이토록 원했을까.
그런 상상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것이, 한눈에 어찌 이럴 것까지 파악한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사람의 안목이 아니라 선인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였다.
“혹시 산을 타고 저희를 곧장 넘어가려는 생각 아닐까요?”
불현듯이 생각났다는 조운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위로는 완전 벼랑이다, 벼랑. 당장 저 아래에 방삼이 진 치고 있는 가도와도 깎아내리는 벼랑길로 막혔는데, 저 위는 어떨까. 사람이 못 지나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많은 숫자를 대동할 수는 없어.”
게다가 수시로 사람을 보내어 산등성이 주변을 정찰하고 있으니, 만약 그런 움직임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아, 진짜 불안한데.”
“왜. 생각보다 편하니까 불안하냐?”
“당연하죠! 제가 비록 경험이 미천하다고는 하나, 전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전황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고 배웠어요.”
그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물론 세상사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다간 오히려 제 꾀에 넘어질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너무 자기 편한 방향으로만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그러면 지금 부상병들을 우선 산채로 돌리자. 거기서 몸을 달래어, 그 뒤에는 소연 아가씨에게 맡기지. 여차하면 양 가도 중 위험한 곳으로 돌릴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이곳의 방비가 허술해지지 않을까요?”
사실 흑산적의 본대는 계속 이쪽 가도를 노리고 있었다. 이쪽 가도로 통한다면 산채까지 일직선으로 무난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비해, 저 아래 가도는 뚫는다고 하더라도 험준한 산세를 올라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쪽에 조운과 내가 버티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아가씨가 다시 이쪽으로 병력을 돌려줄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뿐이고. 너를 믿는 것인데, 그런 너는 자신이 없나?”
“무, 뭐! 믿는다고 하니 신뢰에는 신용으로 답할 뿐이죠!!”
조운은 그리 말하면서도 고개를 획 돌렸다.
요 일주일간 전투만 한 것은 아닌 것이, 그녀와는 제법 말이 통하는 것이 있어서 초면의 앙금은 풀고 이제는 나름 서로를 이해해가는 단계에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이 여자. 이용하기 쉬운 성격이다.
“……이 오라비가 미안해.”
“뭐에요, 갑자기? 아직 승부는 안 났어도 거의 확정적으로 제가 누이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윗전으로 올라서려 들면 곤란해요!”
그게 아니다, 이 미련한 계집애야.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미안하다고 할 때 얌전히 받아들여라. 괜히 이해도 못 하고 튕기면 내 양심이가 아파한다.
앞으로도 더 부려먹어야 하는데.
“그냥 그렇다고.”
“아 찝찝하게 반응이 뭐 그래요?”
조운이 고개를 치켜들며 따졌지만 어쩌겠나. 좋으나 싫으나 어차피 여기서 한솥밥 먹으면서 같이 싸울 전우인데. 그냥 빙긋 웃어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표정 짓지 말라고요!”
“이상한?”
이년이? 잘해주려고 해도 뭐라고 하기냐?
***
“삼이 형님. 저쪽 보수는 끝났수다.”
“수고했다.”
부하를 돌려보내고 방삼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벌써 일주일째 전투를 지속하니 슬슬 피로가 몰려왔던 그는 아랫것들을 모두 물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고작 일주일이라고도 하나, 벌써 일주일이라고도 한다.
그간 흑산적들은 정말 죽을 기세로 진을 공격해왔다. 목책을 세우고 그 사이에서 창을 견주고 있더라도 그들은 물러섬이 없었다.
그것은 방삼이 보기엔 오히려 물러설 곳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건 흑산적의 상황.
아군은 아슬아슬하게 진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점점 부하들의 피로도가 눈으로도 드러나는 걸 본인도 느꼈다.
어르고 달랜다고 될 것이 아님을 방삼은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부하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었다. 저들이 아무리 몰려와도 우리는 괜찮으리라는 희망.
방삼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비록 칼을 오래 쥐어 나름의 실력은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개 병사의 무예였지 장수의 무예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런 시발!!”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한들, 감정이 끓어오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웃옷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대장이 믿고 맡겼다. 어릴 적부터, 철들 때부터 따랐던 대장이 이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은 응당 그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내심 한편으로 자만하고 있었다. 언제나, 어디건. 방삼은 전호의 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그는 그런 방삼을 믿고 제 등을 맡겼다.
“이런 곳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실수하면 안 돼.”
안 된다고 방삼아.
그는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자신감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그것은 이미 방삼이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잃었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 그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이러할진대, 저 위는 어떻겠는가.
제 대장도 저 위에서 필사적일 것인데, 대장이 버티고 있는데 자신이 먼저 무너질 수는 없었다.
한낱 짐승도 발목을 붙잡히면 지면을 뒹군다. 하물며 사람은, 그것도 막 날아오르려는 사람이 발목을 붙잡히면 어떠할까.
그건 분명 날아오르는 새에게서 날개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지니.
그것은 몰락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대장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대장은 자기의 뜻을 펼치는 게 아닌, 다른 이에게 그 뜻을 맡겼다고 할지라도.
방삼에게 있어 그것은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솔직한 말로 방삼은 진소연이라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를 바라볼 때, 마치 품평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렇지만 정작 그 여자가 대장을 움직였다. 그냥 세상에 숨어 조용히 살겠다던 대장을 움직인 것은, 그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
“후우….”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방삼에게 있어 진소연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 허나 그 대장이 믿고 따르겠다 하며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이상, 방삼은 그걸 밑에서부터 받쳐야만 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이런 곳에서 좌초한다고? 그것도 무슨 천하제일의 무인이나 관아의 정예를 상대로도 아니고, 고작 저런 도적 떼거리에?
“차라리 혀를 깨물고 뒈졌으면 뒈졌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준비가 만전은 아니지만, 아직은 버틸법했다. 이제 저 위에서 무언가 승전보가 들려온다면. 그때까지만.
제발 그때까지만.
방삼이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되뇌고 있을 때였다.
“사, 삼이 형님!!!”
누군가가 막사를 확 열어젖혔다. 그에 맞춰 방삼이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에 목책의 보수를 맡겼던 이가 숨까지 헐떡이며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냐?”
“야, 야습이요!!”
그 말에 방삼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지금까지 흑산적 패거리가 야습을 감행한 적은 없었다지만, 이미 그에 맞춰 준비는 해두었다. 경계병을 두고 교대 조는 계속 운영하였을 것인데.
설마. 혹시나 하여 방삼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몇 명이나 왔더냐.”
“그, 그게 말이요. 어둡기도 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미 목책 쪽에서 경비하던 놈들은 다 죽었소!! 계속 밀려 들어오고 있다고!!”
천지신명이시어. 어찌 이리도 무심하시나이까.
방삼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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