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와 나-12화 (12/343)

12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흑산적 189년 9월. 병주 오원군 무도현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산맥. 산세가 험준하여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그곳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날.

흑두건을 머리에 두른 이들이 물경 오천을 넘겼고 그것과 대치한 집단도 이천이 넘는 머릿수였으니,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숫자만 하여도 칠천을 넘겨 사람 소리 들을 길 없던 산길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위로는 산세가 험준하여 사람이 다니기 힘들고, 아래로는 가파른 비탈길이어서 차마 사람이 등락하기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길은 오로지 단 두 갈래의 가도.

가고자 하여도 오고자 하여도 단 두 갈래의 길밖에 없었으니.

결전은 금방이었다.

***

사람의 위에 선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예전부터 생각했다. 남자라면 한 번은 해볼 법한 망상, 만인을 아우르는 대장군이 되어 한마디 말로 수천의 부하가 움직이는 장관을 꿈꾸는 건 보통이지 않은가?

물론 나 같은 무지렁이가 그럴 일도 없겠거니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비록 만인을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명령 하나로 수천의 부하를 움직일 수는 있는 사람은 되었다. 어쩌면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옳을 수도 있겠네.

그럴 생각도, 그릇도 아니던 놈이 어디 선녀님 하나 만나서 이리되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과연 이게 팔자를 핀 건지, 조진 건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인데.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자니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뭐, 팔자 한 번 조지면 어떠한가.

“너희에게 하나 묻는다. 푸른 하늘, 창천이 드리우는 세상에 감히 무도하게도 검은 두건을 두른 도적 새끼들이 설치고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나?”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아무런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배운 거라곤 남 조져 먹는 것밖에 없는 도적놈들 모아놓고 할 말도 아니었다.

솔직한 말로, 나도 조운 이 계집애가 출정식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며 막 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런 자리는 안 만들었다.

남사스럽잖아.

“아무도 답을 못하는구나. 그러면 다음 질문이다. 너희의 앞에 선 저들은 도적이다. 한낱 도적놈들이 머리에 검은 천 하나 둘렀다고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망아지들이지.”

그리 말하며 저 멀리에 희끗희끗 보이는 흑산적 무리를 가리켰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도 도적인가?”

그 뒤로도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것 또한 아무도 대답하지 않나 싶어 넘기려던 찰나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아닙니다!!”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몇몇 이들이 그에 동참해 아니라 외쳤다. 그 물결은 이윽고 모든 이들이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본인들은 도적이 아니라고.

물론 그리 말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진소연 아래 모인 이들에게는 도적 떼의 토벌과 약탈만을 명하였지, 그 외에 인근 백성의 수탈은 일절 삼가게 하며 일부 현엔 구휼마저 행했으니, 그것은 도적의 행세라 보기엔 거리가 있었다.

도적을 토벌하며 굶주린 백성에게는 베풂을 행한다. 그것은 썩 정의의 사도와 같은 모습이 있어 그 모습에 취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다.

“아니긴 시발 뭐가 아니야, 이 도적 새끼들아.”

너거가 조금 착해졌다 해서 도적이 아닐 것 같았더냐.

당장 네놈들도 그 토벌당한 도적 중 일부가 아니었는가. 근데 시발 빠져서는 몇 달 만에 도적이 아니라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고 즈그들 손에 죽어난 사람들이 통곡하겠다.

옆에 있던 조운이 헛바람을 삼켰다. 방삼이는 아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으니, 당장 내 앞에 모인 이들은 어찌 생각하겠는가.

그렇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할까.

“이 도적 새끼들아. 너희도 도적이고 저것들도 도적이다. 머리에 검은 천을 둘렀냐, 안 둘렀느냐의 차이지.”

어차피 같은 도적이었다. 어딜 조금 착한 짓을 해봤기로서니 도적이 아니라는 말이 제 입에서 나오는가? 그러기엔 아직 공보단 과가 많지 않은가.

아직 너희의 공은 과를 덮기엔 한참 부족하다.

“그러니 묻겠는데, 너거들은 언제까지 도적으로 남을 생각이냐.”

“……이건 또 뭔….”

고요한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연설 중이기에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 말은 제법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 이어지는 말로는 뭔 헛소리냐, 정도일까.

“어떤 새끼가 감, …대장?”

방삼이 크게 소리치려는 것을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그래, 헛소리지. 네놈들의 근본이 도적이라 지은 죄를 씻는다는 개념조차 없으니, 어찌 너희 힘만으로 도적에서 직업을 변경하겠나.”

죄에는 벌을, 행동에는 책임을.

그러나 저들은 배운 게 미천하여 어째서 벌이 따르는지 모르고, 왜 책임이라는 것을 짊어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여타 백성들의 평균과도 궤를 같이했다.

도덕 따위가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책임 따위 짊어져야 무거울 따름이다. 그러니 굶으면 도적이요, 배부르면 백성이 되는 것이 천하의 현주소였다.

천하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은 누가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대로겠지. 그저 견디고 참다가, 못 참는 순간이 오면 곡괭이를 쥐고 도적 떼로 변하는. 그런 세상이겠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돕겠다. 그 누구도 너희를 도적이라 부르지 못하게 내가 도와주마. 그러니 닥치고 따라와라. 싸울 땐 오롯이 내 등만을 쫓아라. 내가 너희 앞에 설 것이니, 누가 감히 날 넘어설까.”

너희는 생각하지 마라. 그냥 나만 쫓아서, 내 뒤만을 따라와라. 그렇게 따라오면서, 너희에게 주어진 천민의 삶에 저항해라.

짓밟히기만 하던 과거를 떨쳐내라.

“저 무도한 흑산적 놈들을 그렇게 짓밟고 나면, 진소연 현장께서도 벼슬길에 오를 것인데. 그러면 우리도 이제 떳떳하게 정규군 딱지 달 수 있지 않겠나?”

물론 확실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뭐 흑산적 머리통 잔뜩 들고서 가면 쫄려서라도 뭐 하나 주겠지.

설령 아무것도 못 받더라도, 그녀는 언젠가 위에 설 인물이다.

“그러니까 싸워라. 싸워서 이기면 팔자 피는 거다. 곯은 배 부여잡고 도적질이나 하다가, 언젠가는 관군에게 붙잡혀 죽을 뿐인 운명은 좀 개떡 같지 않냐.”

그리 말하며 임시로 만들었던 아군의 군기를 쥐고 크게 휘두르니.

“그러니 성공하고 싶은 새끼들은 다 내 뒤나 따라라!!”

마지막으로 크게 웃어주며 그 자리를 파했다.

그렇게 출정식을 마치니 다들 분대끼리 모여 군장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것이 제법 모양새가 난다. 비록 정규군은 아니지만, 나름 훈련까지 시켜가면서 모은 것들이 저리 움직이니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밑바닥에서 백 여명의 사람으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비록 대장군은 못 되겠으나, 적어도 수천을 이끄는 수령까진 올랐다. 이 광경을 어릴 적의 내가 보면 뭐라고 말할까.

아마 헛짓거리한다며 비웃지 않을까. 어릴 적엔 다소 냉소적인 경향이 있어 세상 전부를 쓰레기의 집합소로 보던 애송이였으니까. 세상 전체를 적으로 보던 애송이가 나였으니까.

그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어요? 웃음이 나와요?”

아 시발, 내 정강이!!

조운은 언제 다가와서는 냅다 내 정강이를 차버렸다.

“무슨 출정식을 그따구로, 아니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생각이 있어요? 저들을 도적이라고 깎아내리면 당신은 그 도적놈들 수령이 되는 거예요. 대체 왜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세요?”

“아니 시발, 도적은 맞잖아.”

무슨 조정에서 벼슬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도적놈들 여럿 모아서 끌고 다니는 게 도적이 아니면 뭐냐.

좋게 말하면 뭐, 협객 집단 정도로는 바꿀 수 있겠네.

“어휴, 내가 미쳐서 도적 떼 편을 들어버렸네요.”

조운이 어이없다는 듯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쯔쯧, 가뜩이나 가슴도 그다지 안 큰 것이 저러면 가슴 작아지는데, 어찌 저렇게 제 젖을 함부로 대할까.

한심하다, 한심해.

“크큭, 아무렴, 우리야 도적 나부랭이지. 그럼 대장. 나는 나머지 애들 데리고 아래쪽 가도로 내려가리다. 뭔 일 있으면 깃발로 신호나 주시구랴.”

“엉, 방삼아. 너한텐 기대가 크다.”

산중 영채로 향하는 가도는 두 곳. 그렇기에 방삼에게 천의 병력을 맡기어 한쪽 가도를 방비하게 하였으니, 그는 그만의 전장터로 나가기 전까지 웃고 있었다.

“애들 관리 잘하고. 혹시라도 무리하진 마라. 어차피 놈들 수령 깃발도 여기 있으니 주공은 이쪽이겠지만, 혹시 모른다. 너 죽으면 어차피 우리 다 망하는 거니까, 네 몸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내가 애요?”

“너 같이 생긴 애가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지.”

아이는 자고로 귀엽고 천사 같은 존재였다. 만약에라도 이놈처럼 아귀같이 생긴 아이가 있을 턱이 있나. 있다면 그건 이미 현세가 지옥으로 변했다는 하늘의 뜻이렷다.

“시발, 나 가오.”

방삼은 그리 말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무정하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대장 안부라도 걱정해줄 것이지, 그냥 저리 무심하게 가버리나.

아쉬운 맛에 그 뒤통수에라도 손을 흔들어주니 조운이 다가왔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어느 가도건 하나라도 뚫리면 저희 패배에요. 그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다마다. 그러니 방삼이에게 천이라는 머릿수를 채워서 보냈지.

녀석이 평소에는 좀 싹수가 노랗긴 해도 사려가 깊고 아랫것들에게 모질게는 대하지 않으니, 잘 추슬러서 막아주리라 믿었다.

방삼이는 믿었지만, 이쪽은 별개였다.

“말의 저의가 뭐냐.”

살짝 고개를 삐딱히 하며 조운을 바라봤다. 노려보았다 표현하는 게 맞을 수도 있으리라. 아가씨는 이 계집애를 높게 평가했다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방금 그 말은 아직 누구인지도 모를 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죄송해요. 실언했네요.”

“알면 됐다. 저놈은 나랑 살 맞대고 벌써 5년을 넘겼다. 같이 황건적 토벌하는 관군으로 영천에서 등 맞대고 싸우면서 알았다고.”

오히려 내게 있어 의문부호가 붙는 건 조운이라는 계집애였다.

아가씨가 그렇게 군침을 흘리면서 바랄 정도의 인재라기에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다마는, 내게는 그냥 창 좀 잡고 말 좀 잘하는 계집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돕겠다는 사람한테 이런 말 하긴 뭣한데, 도움이 안 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거 알지?”

“……정말로 뭣한 말이네요.”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눈만큼은 부릅뜨고 노려보는 게 제법 모양새가 났다. 그럼, 군인이라면 저 정도의 기백은 있는 게 맞았다.

“네가 뭘 할 줄 아는지 모른다. 취사병을 맡기고 싶어도 밥은 할 줄 아는지도 모르겠고, 병졸을 맡기자니 지휘는 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니 너에겐 아무것도 맡길 수가 없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긁을 수 있는 말이고, 한 사람이라도 손이 부족한 상황에 객장이라고 찾아온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일 수 있겠으나 나로서는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조운이 제 창을 들며 말하길.

“당신이 좋아하는 내기 하나 하실까요?”

“…내기?”

그렇게 반문하니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투에서 당신이 저 도적놈들의 목을 많이 칠지, 제가 저 도적놈들의 목을 많이 칠지. 승자는 패자를 동생으로 삼는다는 것 정도면 어떨까요.”

“…이 요망한 계집애를 보소.”

내게는 나쁠 게 하나 없었다. 저 계집애가 실력이 없다면, 그냥 그런 허언을 내뱉던 계집애도 있었다고 비웃으면 그만이었다.

반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만일 저 조운이란 계집애가 진짜라면, 혈연은 아니더라도 호형호제하며 서로를 가족과 같이 여긴다는 것이니 내가 동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저 여자가 나보다 뛰어난 이라면 소연 아가씨에게 분명 도움이 될 터.

내가 이기던, 그녀가 이기던 조운이라는 이는 우리와 함께하겠노라고 말한 셈이었다. 그걸 저리 빙 돌려 말하니, 우습기도 하며 요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냐, 네가 이기면 내 누이로 깍듯이 받들어 모시지.”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자기는 동생을 험히 부려먹는 성격이라며 그녀가 씩 웃는다. 그게 얄밉기도 한데, 어떻게 보면 귀엽게 보이기도 하여 그냥 웃어주었다.

뭐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랴.

곧 전쟁은 시작될 터이니, 앞으로 못 웃을 거 미리 웃은 셈 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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