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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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지금까지 병주에서 야금야금 이름을 떨치고 있던 우리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둔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를 넋 놓고 보고만 있어야만 했던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 진짜 이 요사한 아가씨.”
아무래도 진정 황실은 흑산적 토벌을 할 상황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숫자는?”
“아주, 육시랄, 존나게 많소!!”
하여간 무식한 새끼.
대략 얼마 정도는 되는 갑다, 이렇게라도 말하진 못하나 싶어 한심하게 바라보니 방삼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는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아니 시벌, 내가 군에 있던 것도 아닌데 그걸 한눈에 어찌 다 파악하오. 어쨌건 오라지게 많다는 건 확실한데.”
“……군기의 숫자는요?”
어느새 내 뒤에 붙은 조운이 방삼에게 물었다.
“뭐야, 이 처자는 여기 왜 있소?”
“군기는요.”
“아니 이건 또 뭔데 자꾸….”
일체 다른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조운의 딱딱한 말에 슬슬 방삼이 열 받을 것처럼 보여 진정하라는 의미로 그의 등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쯧, 글쎄올시다. 아무래도 정확히 보기 전에 달려와서,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흠, 보자. 거기가 10개 정도였고. 음. 그러니까. 대충 마흔에서 쉰 사이겠구만.”
아무래도 즉석에서 기억을 떠올려야 하기에 조금 버벅거리며 말하는 것을 전부 침착하게 듣던 조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 흑산적도 그 세를 불리면서 정규군의 체계를 답습하였다 하니, 아마 그 군기는 백인대를 중심으로 나누었을 거예요. 그러면 대략 숫자로는 사천에서 오천 명 사이로 추정할 수 있겠네요.”
“확신은?”
“허장성세가 아니고서야 구태여 체계를 어지럽힐 이유가 없으니까요. 확실한 숫자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 숫자는 될걸요?”
그러면 거진 우리의 두 배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려나. 분명 방삼도 아주 많다고 얘기한 것을 보자면 얼추 그 정도라고 상정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사천에서 오천 사이의 병력.
그 정도면 흑산적 내에서도 대영채의 군주가 나섰다고 판단하는 게 맞았다.
언젠간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병력을 모으긴 했지만, 한 번의 회동에 그만한 숫자라니.
“하, 역시 흑산적은 흑산적이네. 아무리 낙양에서 한 번 깨졌다고는 하지만 도적 떼의 수장으로 관직까지 받은 만큼의 값은 하네.”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움직이는 것이다.
필경 우리에게만 군을 돌린 것이 아닐 텐데도 이만한 숫자다.
우리가 거의 반년 이상을 투자해서 모은 병력을 우습게 웃도는 머릿수를 움직이는데, 그것조차 그들에겐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 단순히 털어내기 수준이었다.
“웃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갑자기 흑산적이 이렇게 움직였다는 건,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가씨께서 한 예상이 맞아들어간 모양인데요.”
“크큭. 그렇지, 그래. 웃을 때가 아니긴 하지.”
웃을 때가 아니긴 한데, 그런데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째서일까.
“방삼. 그만한 머릿수가 벌써 지척에 도착하진 않았을 거고, 위치는 어디냐.”
“사흘 전에 배말봉에서 보고 냉큼 달려왔으니까, 아직 거리는 좀 있을 거요. 기병처럼 보이는 무리도 없었으니, 걸어오면서 그만한 머릿수 다 챙기려면 앞으로 이틀은 더 걸리지 않겠수?”
이틀 정도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도 하루 뒤에는 흑산적이 우리 영채 인근에 당도하리라는 계산이 섰다.
이런 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게 올바르니, 선발대가 있으리라 가정하고 하루를 계산으로 잡아야 할까.
준비하기엔 다소 촉박하긴 했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방삼아, 얼른 애들 다 집합시켜라. 아가씨한테는 말해두었냐?
그리 물어보니 방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외다.”
“앞으로 이런 중대사안은 무조건 아가씨한테 먼저 보고해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방삼.
대체 이놈도 그렇고, 우리 애들은 왜 이리 아가씨랑 친하게 지내질 못하는지 원.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슬슬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 방삼을 뒤로하고 아가씨가 기거하는 중앙 산채로 달려갔다.
평소 그녀는 이 시간에 잘 깨지 않았다. 보통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기상하기 때문에 그 전에 찾아오면 항상 신경이 곤두서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
하여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잠은 깨우지 않게 행동했지만, 이번에는 사안이 사안이었다.
혹여 자고 있으면 엉덩이를 팡팡 때려서라도 깨우는 게 맞았다.
“어이, 아가씨! 중대사안이오!!”
그렇게 크게 외치면서 문을 벌컥 열었다.
벌컥 열어젖힌 것까진 좋았는데, 예상외로 아가씨는 책상에서 턱을 괴며 죽간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노크하라고 하지 않았나?”
“……허, 무슨 바람이 불어 벌써 깨어있소?”
평소라면 아직도 잠이나 자고 있을 시간인 것을. 표정을 보아하니 방금 막 일어난 듯이 눈이 반쯤 감겨서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게다가 뒤엔 또 누굴 달고 와서는, …조운 공?”
“어, 그러게. 그러고 보니 이 계집애도 따라왔네.”
넌 왜 따라왔냐. 그런 시선을 던지니 조운이 아가씨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팔꿈치로 옆구리를 푹푹 찌르는 것이 아닌가.
대체 왜 이러나 싶다가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니 조운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요!”
“나발까진 아니지 않나요.”
본인이 재촉해놓고 뚱해져 토라지지 마라.
“흑산적이요! 아가씨 말이 맞긴 했나 보오. 이놈들이 머릿수 잔뜩 이끌고 이쪽으로 몰려온다고 하네!! 크으, 이 조막만 한 머리에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예상하는 족족 맞추는 거요?”
이 정도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내가 진실로 역사에 이름을 새길 천재를 모시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황을 알면 당연한 거야.”
그녀는 새침하게 그리 말하고는 책상에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쳤다.
저번에 이 인근 산세와 가도를 기록하라 하기에 방삼이가 죽어라 뛰면서 조잡하게나마 기록했던 지도였다.
“적의 위치는? 동선은, 군의 숫자는?”
“앞으로 이틀, 만약 선발로 보낸 이들이 있다면 내일 중에도 당도할 수 있을 거요. 마지막으로 확인된 것이 배말봉이었으니, 아마 시간을 고려하면 지금은 여기쯤일까. 숫자는 오천에 기마병은 없다고 하오.”
아무래도 장연 직속의 병력은 아니기에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끌고 왔으나 제대로 된 기병대는 없었다. 전원이 보병, 아마 도적 떼로 무리를 지은 병력이리라.
그 정도면 할만하다.
우리가 분명 머릿수는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모든 준비를 해뒀다.
“아군의 준비는 다 끝났고?”
“뭐, 미리 언질을 두었으니 얼추 해가 중천일 무렵에는 모두 끝낼 거요. 아무래도 급작스러운 소식이었으니까,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그러니 소연 아가씨는 혀를 차더니, 이내 입술을 매만지며 지도를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말하지 않는 긴 침묵. 나와 조운은 그저 그녀가 골똘히 고심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으니.
이내 소연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군을 물리면 잡히진 않겠네.”
“……군을 물리실 생각이오?”
“그럴 생각인데.”
아니다. 그건 안 된다.
내 비록 배운 것이 적어 아는 것이 많진 않았으나, 그게 하책이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군을 물리면 당장 목숨줄은 구명할 수 있겠으나 반대로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눈을 돌려 조운을 바라보니 그녀는 단지 빤히 아가씨를 바라볼 뿐,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보다 배운 것도 많을 것인 계집애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아마 조운도 지금 여기서 군을 물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나서지 않는다는 건 당사자가 아니다 이건가.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니요. 아가씨, 왜 군을 물리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을 싸워야 할 때가 아니요? 내가 보기엔 싸우는 게 맞는 거 같소만.”
“병력의 차이가 두 배를 웃도는데? 숫자가 적으면 다툼을 피하는 것이 옳다고, 어떻게 모은 사람들인데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게 할 순 없어. 차라리 힘들더라도 군을 물리는 게 맞지 않아?”
아니,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한데. 완전히 틀려먹은 생각은 아니다마는.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우린 싸워야 하오.”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비록 열 손의 차이는 아니라도 열세인 건 확실해. 당장 그 불리한 인원으로 나가 싸우는 건 너인데도 그래야 한다는 거야? 구태여 불리한 인원으로 싸우다간 정말로 죽을 수 있어.”
이거 혹시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싶어 빤히 바라보니 그녀의 하얗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게 분노인지, 혹은 부끄러움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 근간이 걱정어린 마음에 있다는 건 얼추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참을 수 없었다.
“크, 크흑, 크흐흐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칫 상대를 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에 참아보려 했으나 속에서부터 끓어나오는 웃음은 도무지 참을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악연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었다.
어쩌다 저런 년이랑 얽혔나 싶었던 그것이 발전하고 교감하여, 어느덧 이렇게 걱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뭐가 그리 웃겨??”
아가씨는 그런 날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니, 그게 아니요. 미안하오. 그냥, 아가씨가 나 걱정해주는 거 같아서. 그게 기뻐서 그랬어. 정말 다른 뜻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쇼.”
그렇지만, 그 뜻이 기쁘다 하여서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누, 누가 걱정을…!!”
“하지만 말이요.”
작게, 그렇지만 또박또박.
“제 칼이 상할 걸 걱정하여 싸우지 않는 무인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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