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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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대협! 내 으, 은공은 절대 잊지 않으리니! 도, 돈이 필요하시오? 아니면 계집? 뭐든 다 드리겠소!!”
손에 쥔 칼을 꾹 움켜쥐었다.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그냥 나쁜 놈들 몇 썰어버리는 것뿐.
어차피 배워먹은 게 칼질밖에 없었으니 뭐가 되건 병사 아니면 노략꾼인데, 애석하게도 누구 밑에서 부려지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이보쇼. 아니 그러게 적당히 해 드셨어야지. 현장이라는 양반이, 어? 막 뜯어가고 그러면 쓰나. 어지간하게 해야 우리 아랫것들도 살길이 보일 거 아니겠소.”
“대협!! 제발 살려주시오! 내 한때의 미망에 눈이 멀었을 따름이오!!”
아 근데 이 아저씨는 한낱 산적새끼한테 대협, 대협. 본인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
그래도 무도현장으로 나름 그 지역 왕처럼 군림하던 양반이 정작 목에 칼이 들어오면 산적도 대협이라 부르고 있으니.
“아 뭐, 그래. 적당히 좀 해먹을 수 있지. 댁도 그 현장 하나라도 해보겠다고 금은을 바리바리 가져다 바쳤을 거 아뇨? 그건 인정해야지. 쓴 돈이 있으면 메꾸는 게 세상 도리 아니겠소?”
“아, 그, 그렇소! 나도 이, 생계가 있는….”
“그러면 적어도 백성들을 이민족에게 노예로 파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해도 해도 그렇지, 어떻게 현장이라는 인간이 한인을 이민족에게 노예로 팔아넘길 수가 있나.
거참, 천자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면 통탄을 금치 못하셨을 것이다. 물론 매관매직이 흥행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걸 아실 리도 없겠지만.
“그, 그것이…!!”
“거 대장. 뭐하고 계쇼. 빨리 그 돼지 목이나 따고 갑시다.”
저기서 우리 애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까지 현장의 사병을 썰어대고 있던 놈들이라 얼굴이나 옷은 피범벅이었음에도 표정만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작태.
“느이들은 정말 태생이 살인마구나.”
천하가 혼란한데 이런 놈들까지 날뛰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들도 내 지적에 당연한 말을 하냐면서 귀를 후비적거리는 것이, 언제나 보았다지만 도적 같은 놈들이었다.
“히익!!”
그 광경이 현장에게는 아무래도 자극이 좀 과했던 걸까. 벌써 경기 들린 사람처럼 몸을 떨면서 안색이 창백한 것이, 곧 죽기 직전인 사람의 표정이 이러할 진가.
물론 곧 죽을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게 누가 계집질하러 현에서 여기까지 기어 나오랬어. 응? 괜히 우리 귀찮게 말이야. 얌전히 느그 현에 처박혀 있었으면 우리 같은 대인께서 댁 같은 소인배를 잡으러 올 일도 없었지 않았냐는 말이오.”
“미, 미안하외다!! 내 다시는 현에서 두문불출하며 자숙하겠소!!”
아니 딱히 그걸 문제 삼는 건 아닌데. 하기야 목에 칼 들어와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기대하면 안 되는 게 맞다.
당장 나라도 목에 칼이 들어오면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싹싹 빌 진데.
“그러게 사람이 뭐 그리 죄를 많이 짓나. 누런 것들이 설쳤다고는 하나 창천이 아직 저물지도 아니하였는데, 어찌하여 도적의 법도를 한 황실의 관리라는 작자가 행한다는 말이오.”
황건적이 한창 봉기했던 때, 그들은 적어도 백성을 이민족에 팔아치우진 않았다.
한인을 이민족의 노예로 파는 건 불법 중에서도 극형에 처할 중죄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민족에게 한족을 팔아넘길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러니 아가씨가 대놓고 죽여도 된다 일렀지.”
이런 관리라면 죽어도 좋다. 어차피 병주 땅은 사람도 적은 데다가 도적이 판을 치고 있기에 적당히 현장 한둘 죽어 나간다고 해도 별 탈도 안 났다.
게다가 이런 돼지가 현장이었다면 차후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반발도 적을 터.
이것이 아가씨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기에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내 다리를 붙잡고 제발 살려달라고 울고 불며 매달리는 현장의 등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렇게 백성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의 최후치고는 너무 손쉬운 죽음이긴 한데, 애당초 현장 따위가 탐관오리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장. 슬슬 정리도 끝났는데 돌아갈까요?”
“적당히 놈들 병장 중에 쓸만한 것만 벗겨내고 가자. 아, 넌 돼지 몸에서 현장 인장이나 호패 있으면 챙겨오고.”
대체 이 조그마한 현을 건드려서 뭘 할 속셈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 아가씨는 생긴 건 무슨 절세가인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이 좀 극단적이라고 해야 할까. 왜 구태여 저런 짓을 할까 싶은 짓도 태연하게 저지르곤 했다.
우리 같은 도적들이 700호도 될까 말까한 현 하나 점령해서 뭘 하겠다고 다짜고짜 현장의 목을 들고 오라니.
“그런데 말이요. 대체 언제까지 그 아가씨 말에 굽히고 있어야 하오?”
우리 애들의 불만도 썩 방향이 틀리진 않았다.
애초에 처음 만남부터가 이상했었다.
어디 이상한 놈들이랑 싸우는데 제법 고전하는 것 같기에 도와줬더니 마침 잘됐다면서 이쪽을 쥐어패기 시작하던 미친년.
와 시발, 그렇게 센 년이 어떻게 그런 애들이랑 드잡이하고 있었지?
어찌 됐든 그렇게 뒤지게 맞고서 죽기 싫으면 자기 따르라는데 어쩌겠나. 뒤지기 싫으면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지.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긴 한데.
어쨌건 원래 내가 끌고 다니던 놈들이랑 같이 그 아가씨를 두목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식견도 제법 높았고 생긴 것도 곱상하니 어디 양갓집 규수를 떠올리는 것과는 별개로 하는 짓이 막무가내다.
애초에 아무리 우리가 도적질한다고 해도 선은 지켰다.
물론 우리가 나쁜 놈들 쥐어패는 독특한 취미를 가지긴 했지만, 적어도 나라님은 건드린 적도 없었는데.
“죽기 싫으면 따라야지. 하는 짓이 좀 조잡하긴 한데, 적어도 우리한테 죽일 놈들 알아서 척척 지목해주는 게 썩 나쁘진 않다. 게다가 뭔가 생각하는 구석이 있는 듯하니 따라서 나쁠 건 없잖냐.”
그렇다고 좋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애들 기분이라도 맞춰줘야지.
그 아가씨는 다 좋은데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좀 모르는 여자였다. 머리도 좋다는 양반이, 오히려 머리가 좋기에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게다가 정신도 좀 이상한 것이 가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이상한 말을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상태창이랬나.
하여간 똑똑하다는 인간들은 어디 하나 미쳐있었다.
***
“어이, 아가씨. 우리 왔수다.”
적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적당히 그녀가 앉은 책상에 현장 인장과 그 호패를 휙 던졌다.
그러니 의자에 앉아 죽간을 보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살짝 젖혀 이쪽을 바라본다. 무감각하게 단지 사물을 인식하는 정도로 바라보는 무기질적인 눈빛.
저래서야 원판이 아무리 절세가인이면 무얼 할꼬.
“너는 얼마나 교육해줘야 예의라는 단어에 대해 기억할까?”
“예의는 얼어 죽을. 아니면 뭐요. 조금 전까지 아가씨가 시킨 일 열심히 하고 왔던 나를 또 패게? 그거 진짜 벌 받을 거요.”
“게임 세상에 갑자기 떨어졌는데, 내가 만약 죄가 있다 해도, 받아야 할 벌은 다 받은 게 아닐까.”
“참 나. 대체 전부터 게임, 게임. 게임이 대체 뭐요?”
전부터 정신이 이상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어차피 물어봐야 대충 얼버무릴 게 뻔했다.
봐라, 또 고개 휙 돌리고 무시하지 않는가.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린데, 어린 것이 싸가지가 가출하여 잔망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저것이 내 동생이었다면 정말 죽도록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줬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한들 난 맞고 자라는 오라비 정도가 되었겠지.
“대체 그런 현 하나 건드려서 뭘 하려고 그러쇼?”
“여차할 때를 위한 방파제.”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뭐를 위한 건지를 알아야 나도 애들한테 설명해줄 거 아닌가.
자고로 아랫것들의 사기를 가장 떨어뜨리는 일은 위험한 명령도 아니오, 마음에 안 드는 상사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래서 자신들이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때야말로 사람의 사기를 떨군다.
적어도 자신이 뭐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납득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조용히 노려보니 아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병주자사가 어느 정도 통치하고는 있다지만 그것도 곧 끝날 터. 그렇다면 우리도 여차할 때를 대비할 보험 한두 가지는 필요하지 않을까?”
병주자사라면 정원인데, 그 양반이 곧 끝난다고? 그럴 리가 있나.
내 일개 필부인지라 군부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 양반이 어디 보통 양반이던가?
정규군만 5천 이상을 보유하고 그 아래 여포를 필두로 내로라하는 맹장들이 즐비한 군벌계 관료가 아니던가.
“아니 아무리 병주가 이민족이다 도적이다 난리라지만 그 양반이 병주에서 말아먹는 그림이 도무지 안 그려지는데??”
“지금 낙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장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진 적당히 돈 많고 사람 나쁜 개새끼들 살생부에 적고 그것들 목을 쳐서 돈 털어내기 바빴다.
세상은 넓고 나쁜 놈들은 천지라고, 죽여도 죽여도 또 죽일 놈이 나오던 세상이었지.
“모르겠구만.”
적당히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이니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십상시와 하진의 대립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야. 건석 필두로 한 십상시의 행태는 도를 넘었고, 그것이 군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하태후를 배경으로 권력을 잡고자 하는 하진의 입장에서는 썩 달가울 리 없지.”
아가씨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적당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잇기를.
“십상시의 입장에서도 군부에서 내궁부에 간섭하는 처사를 용납할 수 있을 리 만무. 그렇지만 황제를 끼고 실권을 쥐고 있는 건 십상시이니 하진은 그들을 힘으로 칠 수밖에 없는데, 군부 내에서도 십상시의 입김이 닿은 계파는 많아.”
찻잔의 끝을 손으로 문지른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마냥 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그게 정원이랑 뭔 상관이라는 말이요?”
“멍청하긴. 낙양 내 군벌이 두 계파로 나뉘어 힘이 부족하다면 바깥에서 불러들이면 그만이잖아. 마침 하진은 군부 최고위인 대장군. 주변 군벌에게 파병을 요청해서 그 힘을 바탕으로 십상시를 토벌하려고 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지.”
“그래서?”
“마침 정원은 사예주 바로 북쪽에 있는 병주자사이며 그 자체로도 군벌로 이름을 날린 인물. 그밖에 큰 군벌이라면 동탁. 아마 크게는 그 둘이 낙양으로 호출 명령을 받았겠지.”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숨을 고르며 손에 쥔 찻잔을 살짝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하던 말들을 채 이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죽간을 읽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니 하던 말은 다 해야 할 거 아니요. 뭐요? 그러면 정원이 낙양에 불려가니까 병주가 공백이 될 거다, 뭐 그런 거요?”
“쯧. 여기까지 말을 했으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혀를 차는데, 그렇게 말해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정보량이 너무 부족하다. 애초에 지금까지의 정보로 결과를 추측해낼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도적질이나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은 거기까지야. 낙양으로 불려 나가는 순간, 그는 죽었다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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