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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화 〉페로몬 VS 페로몬 (1) (100/110)



〈 100화 〉페로몬 VS 페로몬 (1)

사람들을 상대하고 빌딩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제가 지금 보내는 주소로 오세요.>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나는 그녀가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
그곳은 제법 근사한 호텔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는 이정혁이라고 합니다. 한혜원이라는 분이 방을 잡아놨을 텐데요.”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연락해 드리죠.”

호텔 프런트에 문의하니 바로 그녀에게 연락을 해줬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녀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향기 씨!”

“지혜 씨, 미안합니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버려서요.”

“아니에요. 요즘 핫한 CL컴퍼니의 창립자가 향기 씨였다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는 지혜 씨도 ‘새 생명제약’이라는 회사의 임원급이  거죠?”

“네. 저도 사정이 있었거든요.”

근사한 방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혹시 모를 이목을 걱정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이 호텔은 이틀에 한 번은 몰카와 도청에 대비한 검사를 하는 곳이에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대화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다는 뜻이다.
나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실은...”

나의 물음에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녀는 남은 모든 약품과 연구자료를 폐기하고 몸을 피했다.
그리고 블랙 애로우의 손길을 피하며 그들의 비리와 부정을 밝히기 위한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마침내 블랙 애로우를 고발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를 모으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는 예전에 알던 사람을 통해서 그 자료를 미국의회와 중앙 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그리고 연방수사국(FBI)에까지 전달했다.
하지만 그들은 블랙 애로우가 범한 숱한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계약을 위반하고 무기개발을 중단한 그녀를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개발한 무기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나 되기에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약을 빼돌렸는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위해서 공개되면 안 되는 지식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녀를 오히려 망상에 빠진 과학자로 치부하며 무시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NGO 단체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UN에도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도 영 신통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무기가 존재할수 있다는 사실이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미국은 철저하게 블랙 애로우의 편이었고, 국제사회는 신지혜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들에게 명백한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또 다른 약품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렇게 만든 약을 지혜 씨가 먹은 거군요?”

“네. 향기 씨가 납치되고 제 위치까지 노출되니 방법이 없더라고요. 놈들에게 쫓기다가 급한 마음에 집어삼켰죠. 그리고 이후에는 보시는 대로에요. 저도 향기 씨처럼 페로몬을 내뿜을 수 있게 된 거죠.”

“그 힘으로 위기를 모면하신 거군요?”

“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어쩌다가 수치를 확 올리게  때가 있었거든요. 덕분에 이렇게 공짜로 성형수술을 하게 된 거죠.”

그녀도 나처럼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생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전에는 그녀가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내가 납치당하는 것에도 속수무책인 것을 보면서 원망을 하기도 했다.
다시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처리를 어떻게 하면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지 단단히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의 내막을 듣고 보니 그녀가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나 못지않은 고초도 겪은 듯싶었다.

“그런데 나 걱정  했어요? 잡혀간 걸 알았으면 뭐라도 했어야지?”

그래도 슬그머니 화가 치미는 부분이 있었다.
잡혀가는  막지 못했다면 뭐라도 했어야지?
왜 여태껏 가만히 있었지?
나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똘똘한 대답에 나의 분노는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블랙 애로우에서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내가 개발한 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가 쓰던 번호도 제대로 추적을 못하더라고요.”

그녀는 손가락을빙글 돌리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향기씨를 해부하거나 조사했다면 뭐가 바뀌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아냈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뭔가 알아낸 낌새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향기 씨가 쓰던 스마트폰을 조사하면 내가 있는 곳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대로 찾지를 못하더란 말이죠. 거기에서 느낌이 오더라고요. 놈들이 향기 씨를 제대로 손에 넣지 못했다는 걸요.”

“그래서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다는거예요?”

“네. 저는 분명히 향기 씨가 능력을발휘해서 탈출한 거라고믿었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돌연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향기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어요. 바다에서 시체가 나오고,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이놈들이 향기 씨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냥 제거했구나. 이제 세상에 향기 씨는 없구나 하고 말이죠.”

그러고 보니 죽음으로 위장하고 신분을 세탁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구하지 않았다고 타박하려고했다니.

“그래서 저는 복수를 다짐했죠.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라도 저는 향기씨를 끌어들였어요. 평온한 일상을 보냈을 분에게 지옥을 가져온 거죠. 그것도 모자라서 목숨까지 잃게 만들다니. 저는  이후에 얼마나 죄책감과 분노에 시달렸는지...”

그녀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울먹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이렇게 미남이 되고 다리도 멀쩡해졌으니.”

내가 유머로 받아치자 그녀는 간신히 얼굴의 표정을 밝히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회사를 세운 거예요. 정당한 방법으로 힘들다면 돈과 권력을 손에 쥐고서 블랙 애로우를 칠 생각이었죠.”

허, 이것까지 나와 생각이 똑같았다.
그녀도 힘을 키우기 위해서 회사를 세웠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새 생명제약은?”

“네. 대학원 시절 알던 친구와 의기투합해서 만든 회사에요. 제가 특기로 삼던 유전자 조작과 뇌 과학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돈을 벌어볼 생각이었죠. 생각보다 잘 풀려서 오늘 전경련에 올 정도가 된 거고요.”

이것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평행이론인데?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향기 씨가 이정혁이라니. 이건 또 어떻게 된 스토리에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겪었던 일을 들은 그녀는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겪은 일이랑 왜 이렇게 비슷해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담은 웃음은 한참을 이어졌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거예요?”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해야죠. 계속 사업을 하면서 힘을 키울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놈들에게 되갚아줄 겁니다.”

“그건 제가 할게요. 향기 씨는 향기 씨의 인생을 살아요. 이건 제가 책임질 문제죠.”

“놈들은 아직도 당신을 찾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을 테죠. 제가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안전합니다.”

우리는 한동안 누가 블랙 애로우를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옥신각신하며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그녀도 포기한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지금 회사의 규모를 봐도 향기 씨가 훨씬 앞서나가고 있으니까.”

“그것보다 놈들 자료가 있다고 했죠?”

“네.”

“그거 저한테 보내줄 수 있어요?”

“그것도 이용하려고요?”

“네. 쓸모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놓치고 넘어간 약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키도 커지고 엄청나게 미남이 되었네요.”

지금까지 밀렸던 이야기를 나눴고, 연락처까지 교환했다.
더는 할 말이 없어지자 그녀는 다가와서 나의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그녀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나의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아직도 내가 이상형이에요? 지금이라면 프러포즈 받아줄 수 있는데.”

그녀는 젊어진 자신의 육체 덕분에 나와 이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하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이고, 이걸 어쩌죠? 저 이제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나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물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그렇죠. 향기 씨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욕심을 부리면  되는 거겠죠. 내가 무슨 염치로.”

그녀는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해줘요?”

“네.”

“향기 씨가 페로몬을 쓰는 것도 알아요?”

“네.”

내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추궁하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설마 페로몬을 사용해서 유혹한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서로에게 끌렸어요.”

그러자 굳어졌던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는 동작까지 취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미소 띤 얼굴로 지켜봤다.

“그러면 당신이 다른여자와 자고 돌아다니는 것도 알고 있다는 소리네?”

“네?”

갑자기 그녀의 분위기가 더욱더 요염하게 변했다.
그녀는은근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팔을 나의 목에 감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네요. 하지만 뭐 좋아요. 그냥 우리 섹스만 하는 사이로 지내죠.”

그녀는 당돌한 말을 내뱉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최대한 여유로움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허,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저는 향기 씨를 좋아하지만, 향기 씨는 이미 애인이 있다면서요? 그러면 어쩔  없죠. 저는 섹스 파트너로도 만족해요.”

그녀도 페로몬을 내뿜는 체질이 되고 나서 성격이 변한 것일까?
전에는 좀 더 성숙미가 넘치고 차분한 성격의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지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매력까지 갖춘 발랄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페로몬을 내뿜는 사람과 잠자리를 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요. 내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게 좀 도와줄래요?”

그녀는 내 목에 감은 손을 천천히 당기며 나에게 밀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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