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뜻밖의 재회 (99/110)



〈 99화 〉뜻밖의 재회

“자네 제법인데? 짧은 시간에 회사를  키웠네? 그래 봐야 아직 구멍가게지만.”
“...”

“그런 사업은 큰 회사에서 하는 게 맞아. 슬슬 넘겨. 욕심은 적당히 부리고.”

“...”

“이제 적당히 풀어. 혼자  먹으려고 하면 체하는 법이야.”

“...”

“어차피 곧 따라잡혀. 그 전에 그냥 풀어. 우리와 척을 져서 좋을  뭐가 있겠어?”

“...”


전에 찾아왔던 임원급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점잖았다.
경박하거나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에 부합하거나 예의가 바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압박하면서 거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자신감을 드러내며 나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저 자신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에서 나오는 거겠지.
대한민국의 대기업을 이끄는 회장이라는 작자들의 수준이 고작 이거였다.
돈을 믿고 갑질하는 거.

‘그럴듯한 말과 행동으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천박하기는 똑같아.’

그들의 비상식적인 모습은 전에 찾아와 나를 협박하던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들보다 직설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미소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미친놈들은 무시가 답이다.

“어쨌든 생각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그들은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주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흥, 그래도 대중의 시선은 두려운 모양이지?
더는 나에게 수작을 부리지 못하고 말조심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찢어버리고 싶지만...’

나는 손에 남겨진 그들의 명함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의 손을 빌릴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주 회장과 주아린이 있었고, 마리나 자매도 있었다.
정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들을 의지하면 된다.

‘흥, 최영훈이 당부한 것도 있으니까 버리지는 않겠어.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나는 알아줄 사람도 없는 호기를 부리며 명함을 구겼다.
그리고 구겨진 명함을 그대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이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춘풍전자의 박시우라고 합니다.”
“저는...”
“저희 회사와...”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만남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중하게 다가와서 공동투자나 개발을 제안하는 회사도 있었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점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경영이념이나 철학에 관해서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기업인이라면 싫지 않았다.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장의 분위기나 전망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장의 분위기를 익히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역시 이곳에 온 것이 시간낭비는 아니었다.
얻어갈 것도 있었다.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을 나름대로 이겨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CL컴퍼니의 이정혁 씨?”

“네. 그렇습니다만?”

“저는 ‘새 생명제약’의 ‘한혜원’이라고 합니다.”

새 생명제약이라면 새로운 표적 치료제를 만들어서 유명해진 제약회사였다.
우리 회사처럼 신생회사임에도 기술력이 뛰어나고 유전질환에 대한 관련 약품을 개발해서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회사도 아직은 이런 자리에 올 정도의 사이즈는 아닐 텐데?
우리 회사처럼 예외적으로 초대를 받은 건가?

“아직 이런 자리에 올 정도는 아니라고 보시는 거죠?”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내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었는지 단번에 속내를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사실이니까요. 그나저나 요즘 회장님들의 주머니 사정이 별로인 모양이에요. 중견기업에 중소기업까지 불러들인  보면 말이죠.”

“역시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군요?”

“후후후...”

그녀와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그녀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대충 눈치를 채고있는 모양이었다.

‘투자가 필요하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전망과 제약업계의 흐름까지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흥미는 없었지만, 눈을 반짝이면서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무래도 연구개발에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큰일을 하고 계시네요. 하지만 우리 회사도 아직 여력이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서...”

“저희 회사에 지금 투자하시는 게 이득이에요.”

그녀의 제안은 솔깃했지만, 우리 회사도 그다지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겨우 숨을 돌리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바로 다른 분야에 투자하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옳은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좀  정보가 필요했다.
 자리에서 결정할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미소로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하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살며시 가로막았다.
그리고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뭔가 뜨거운 기운이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내가 페로몬을 발할 때 느껴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이 힘은 내가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었다.
누구지?
어떻게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나를 지켜보던 한혜원은 당황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향기 씨?”

“!!!”

어떻게 그녀가 나의 본명을 알고 있는 거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까지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녀가 ‘블랙 애로우’의 사람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일단은 모른 척이다.
나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게 누구죠?”

“제가 지금 페로몬을 내뿜은 거 아세요?”

“!!!”

그녀의 입에서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쯤 되니 더는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내가 어디에서 정보를 흘린 적이 있었나?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카렌과 척에게 붙잡혀 갔을 때도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던 덕에 블랙 애로우에서도 아직신지혜가 개발한 약품과 성질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서 그런 사실을 알게  것일까?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페로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페로몬을 내뿜을 수 있는 사람뿐이죠.”

“...”

“저예요. 신지혜라고요.”

“!!!”

이제는 도저히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커지는 눈과 벌어지는 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나는 그런 사람은 모릅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로 제가 맞아요.”

자세히 그녀를 살펴봤다.
신지혜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신성형을 하지 않는 이상 동일 인물이라고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달랐다.

‘여기서 섣불리 입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신지혜를 자칭하면서 나를 떠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슬그머니 페로몬을 끌어올렸다.
50%까지 위력을 높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 지금 페로몬을 쓰는 거예요?”

내가 힘을 끌어내자 그녀는 이변을 느끼고 나에게 질문했다.
정말 신지혜가 맞는 건가?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꽉 쥘 뿐이었다.

“향기 씨의 외모가 변한 걸 보니 역시 페로몬 수치를 100% 이상으로 올렸던 모양이군요.”

그녀는 내가 겪었을 일에 대해서 짐작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나와 같은 일을 겪은 것일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쫓기다가 성형이라도 한 겁니까?”

 속에 함정을 섞어서 그녀에게 던졌다.
자, 이제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향기 씨도 경험해서 알 거 아니에요? 저도 수치를 무지막지하게 올렸더니 이렇게 모습이 변하더라고요.”

“!!!”

정말 신지혜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고 모습이 변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슬며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혜 씨?”

“그렇다니까요. 설마 ‘이정혁’이라는 사람이 향기 씨일 줄은...”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경계를 풀고는 그녀의 손을 연신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일을 당했을까  걱정했습니다.”

“네. 어떻게 무사히 도망 다닐 수 있었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말을 이어가려다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붙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주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기자들도 우리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우리는 얼른 명함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놀란 가슴에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평온함을 가장하며 음식을 씹어 삼켰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이것으로 준비된 모든 순서를 마칩니다. 이렇게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만남이 아쉽게 느껴지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본 건물의 회의실을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식사 후에는 쓸데없는 토론까지 열렸다.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 그럴듯한 거대담론과 애매한 논리로 자신들의 추악함은 감추고,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부분은 강조했다.
그렇게 역겨운 용비어천가가 끝나자 겨우 오늘의 회의가 마무리된 것이다.

“정혁 씨, 우리와 이야기를...”
“저는 최우혁 기자입니다. 귀사에서 개발한 기술에 관해서...”

서둘러서 자리를 떠나려고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기업인들과 기자들이 나를 붙들었다.
그들은 쉽게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솟아나는 짜증을 간신히 참으며 눈으로 그녀를 찾았다.
과거에는 신지혜라고 불렸고, 지금은 한혜원으로 불리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쳐다보자 손으로 전화기를 받는 시늉을 하고는 얼른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연락하자는 뜻이겠지.

“좋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나는 불쾌한 빛을 얼굴에서 지우고는 얼른 웃는 표정으로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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