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전경련에 가다
회사를 세운 것도, 다시강윤소를 만난 것도 마치 환상 같았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일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느낌이야.’
일에 치여서 밤을 지새우기를 얼마나 했던가?
하지만 이제 제법 회사는 궤도에 올랐고, 의자에 앉아서 빈둥거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나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주위의 풍경을 둘러봤다.
불과 몇 명이 지키던 사무실은 빌딩이 되었고, 몇 개에 불과하던 공장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사업도 알아서 굴러가기 시작했고.’
사업이 궤도에 오르니 크게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시장의 수요를 쫓아가는 것에 급급했고, 기술을 지키기 위하여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디자인이나 새로운 모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아직은 시장에서 기술적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다.
사업이 안정된 것은 좋았지만, 영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 부분은 영훈이와 상의를 해봐야 할 거 같고.’
나는 다음 행보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우리 회사의 성적이 담겨있는 재무제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어느새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우리 회사의 기업활동 내용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1년 만에 직원이 3천 명에 매출액도 가볍게 천억 단위를 넘겼어. 재투자를 꾸준히 했더니 자본금도 엄청나게 늘었고.’
중소기업이라고 보기도 민망할 정도의 50억이란 자본금은 현재 100배가 넘게 늘어난 상태였고, 매출도 엄청난 규모였다.
이제 'CL컴퍼니‘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통장에 꽂히는 내 월급을 세는 것도 그만뒀지.’
CEO에 해당하는 나와 최영훈의 통장에 쌓인 돈은 가뿐하게 20억을 넘어선 상태였다.
사업을 하기 전에도 물론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경영활동을 영위하고 난 후에도 추가로 각각 20억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게 된 터였다.
만약에 우리의 개인 자산과 빌딩, 공장 그리고 기술의 권리까지 포함한 기업의 총 가치를 굳이 현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아마 1조는 가뿐하게 넘어설 것이다.
그렇다.
나와 최영훈은 불과 50억으로 1조가 넘는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 모양이다.
재무제표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회장님, 뭐 하세요?”
“거창하게 회장은...”
나의 사무실에 들어선 최영훈이 건넨 말이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는 주위를 아우르며 말을 이어갔다.
“좁은 사무실에서 지지고 볶다가 이런 개인사무실까지 생겼으니 회장님이지. 그게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직은 대표이사로 족하지.”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얼굴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최영훈을 바라봤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좀비 같은 모습으로 일에 짓눌리던 그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되고 인력도 충분히 늘어나자 약간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다 죽어가던 그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온 걸보면 말이다.
“이건 뭐냐?”
“전경련에서 온 서신.”
최영훈은 손에 들고 있던 우편물을 넘겼다.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날아온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도 아직 대기업 정도는 아니잖아?”
그랬다.
전경련이라는 번드레한 이름을 걸고 있었지만, 모든 기업인이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대기업이라고 불리는 그룹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뭐, 그들 생각에 우리도 곧 그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거겠지. 게다가 요즘에는 튼튼한 중견기업이나 아이디어가 괜찮은 중소기업도 참여시키는 추세더라.”
“흥. 그래봤자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랬다.
그들은 겉으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면서 건전한 경쟁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집중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결국 속내는 자신들의 이익을 공고히 하고, 상대의 전략과 의도를 알아내는 것에 더 골몰했다.
기회가 있으면 상대의 전략을 모방하거나 기술을 훔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호랑이굴에서 우리를 부른 것이다.
‘통장에 돈이 쌓일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뭔가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가슴을 부풀게 했다.
통장을 채워나가던 돈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열광에 찬 함성도 아니었다.
언제나 위에서 벌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깔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어 오자 비로소 내가 성공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서신을 흔들면서 말했다.
“속셈이 뻔히 보이지만 가는 게 좋겠지?”
“당연하지. 참석해서 언론에 우리 회사가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라고.”
사업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우리나라의 기업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위 ‘재벌’이라고 불리는 세력의 추악한 일면을 알게 되었다.
친일매국의 후손!
혹은 6.25전쟁 후에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한 자본으로 성장한 비정상적인 경제주체!
그것이 그들의 정체였다.
그들은 뛰어난 전략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상품이나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창출과 경제성장을 목적으로 국가가 의도적으로 육성시킨 이상한 경제 집단에 불과했다.
같은 민족을 착취하던 사람을 여전히 사장님으로 놔두고, 성실하게 노동으로 성공하겠다는 사람보다는 사업을 하겠다며 나대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돈과 생산시설을 제공해줬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수성가한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돈이 많은 대기업이라도 역겹게 보일 뿐이었다.
‘아, 나도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닌가? 만약에 자본금 50억이 없었다면?’
나라고 100%로 떳떳한 상황은 아니었다.
주 회장이 건네준 돈이 있었으니.
하지만 우리는 뛰어난 기술력과 피나는 노력으로 회사를 키웠다.
앉아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대기업과는 달랐다.
이런 대기업과 우리 회사를 굳이 비교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에스코트를 받아서 레벨을 올린 무능한 유저 vs 레벨 1부터 손수 하나하나 키운 유저]
어떤 유저가 캐릭터를 더 잘 다루겠는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역경을 국민과 국가가 막아주면서 성장한 회사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경험하면서 돌파해온 회사는 맷집이 달랐다.
그나마 지금의 대기업들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자본의 힘’ 덕분이었다.
엄청난 액수의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어쨌든 나는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을 다스리며 서신에 적혀있는 주소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전경련회관이 여의도에 있었지?
“어쨌든 가서 분위기 잘 보고 오라고. 좋은 공부가 될 수도 있어.”
“알았어.”
며칠 후 나는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회관으로 향했다.
빌딩은 제법 그럴듯했다.
예전에는 모 통신사와 같은 사옥을 썼었는데 2013년에 완공된 새로운 빌딩으로 이사를 했다.
전경련의 시작이 1961년이었으니 역사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독립된 시설이나 체계를 최근 들어서야 겨우 갖출 수 있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하는 것이 없는 조직.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상품가격 담합, 임금수준 평준화, 노동 착취,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기술 탈취.’
그렇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경제를 위해서 서로의 생각과 이론을 토론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자신들의 부를 지키고 더욱더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골몰했다.
그렇게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성장하는 개인이나 중소기업을 찍어 누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어줄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자금을 대는 것 전부였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알고 건물을 쳐다보니 속이 니글거렸다.
“오셨군요. 회장은 이쪽입니다.”
서신에 적힌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두리번거리자 누군가 다가왔다.
안내를 위해서 일하는 직원인 듯했다.
그는 친절하게 나를 회장으로 안내했다.
“하하하,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줄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곳을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혜성그룹의 주대철 회장과 주아린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 회장은 주위를 살피고는 반가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차, 이제는 이정혁 군이지? 괜히 아는 척하면 골치 아플 수도 있으니 이 정도만 하겠네.”
“네. 감사합니다.”
“정혁 씨,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주 대표님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칫!”
주아린에게도 거리감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장난기가 서린 표정과 윙크로 그녀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어쨌든 보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적당히 얼굴을 익혀두라고. 나중에 도움이 될 때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 오는 인간들 모두 능구렁이야. 절대로 100%를 보여주면 안 되네. 알겠나?”
주 회장은 주변을 살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희미한 미소와 고개의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자 주아린과 주 회장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른 테이블로 떠나갔다.
“오늘 방문해주신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제 ㅇㅇ회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정기 보고 및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행사 시각이 되자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단상에 올랐다.
그 뒤에는 지루한 보고의 연속이었다.
각 기업의 성과와 매출액에 관한 이야기가 줄을 이었고, 가끔 시장에 대한 분석이 뒤따랐다.
하지만 대부분 내용이 형식적이고 깊이가 부족했다.
나에게 있어서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아~. 드디어 끝났네.’
정해진 순서가 끝나고 드디어 식사 시간이 되었다.
사회자의 발표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그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지.
진짜 전경련의 시간은 지금부터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줄 상대를 찾아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회장은 어느새 시골 장터처럼 시끄러워졌다.
[빠-라라라~. 빠-라라라-아~~~~.]
고상한 클래식 음악도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기지개를 켰다.
이곳에 와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오랜만에 주 회장과 주아린을 만났다는 사실과 뻐근해진 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