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헬로우 마이 레이디
현장의 모든 스텝과 인사를 나눈 강윤소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피곤해서 실수를 많이 했네요.”
“아닙니다. 멋지게 잘하시던데요.”
“그래도 광고주가 보고 있는데 더 잘했어야죠. 호호호.”
아무래도 돈을 대는 소위 ‘물주’가 지켜보는 가운데에 실수를 연발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너스레를 떨면서 손을 내저었다.
“힘드셨을 텐데 우리 회사 광고를 선택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광고도 신중하게 고르는 그녀였다.
그녀가 모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우리 회사가 투명하고깨끗하다는 것.
둘째, 우리 회사의 전망이 밝다는 것.
어느 쪽으로 보나 그녀가 광고를 맡아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업의 이미지는 더욱더 좋아질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최영훈과 만든 판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에도 좋은 일이었다.
이게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와 정리가 끝나자 강윤소와 그녀의 매니저는 현장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최영훈은 나를 슬쩍 밀치면서 눈치를 줬다.
그렇지. 내가 이 자리를 왜 만들었는데.
“혹시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네?”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네. 그러시죠. 그전에...”
나는 곁에 다가온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주위에들키지 않을 정도로 은근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접니다. 조향기.’
‘!!!’
속삭임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올리고는 눈을 찡긋거렸다.
이어서 소리를 내지 않고 동작만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표현했다.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면서 죽음을 가장하고 현재의 신분을 얻은 것을 표현했고, 입을 벙끗거리며 ‘조향기’라는 이름을 그려 보였다.
그렇게 주위의 눈을 피해서 내 존재를 알렸다.
‘정말 향기 씨?’
강윤소도 주위를 살피며 입을 벙끗거렸다.
나의 이름을 그리며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이 대표님과 이야기 좀 하다가 갈게요.”
“어? 아니, 그래도 같이...”
매니저는 내가 광고나 기타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라도 꺼낼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독대하겠다고 말하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사람의 딸이 아이돌 연습생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시스템이나 업계의 전망 같은 걸 조금 물어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아무래도 이런건 현역 연예인이 잘 알겠죠?”
“아, 네...”
내 말에 매니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고, 강윤소를 힐끔거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매니저의 등을 슬며시 밀면서 내몰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발걸음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러자 곁에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최영훈은 실소를 터뜨렸다.
“푸-흡! 크크크. 아이고, 이거 참. 어쨌든 오늘 아름다운 모습 눈동자에 잘 담고 갑니다. 사인도 고마워요.”
“뭘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최영훈에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감독과 주요 스텝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설비를 치우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일단 나가자.”
듣는 귀가 적어지자 나는 편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따랐다.
[위-이잉-]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를 만난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내가 조향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항상 미소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던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으로 이 상황을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을 뿐이었다.
“차 있어요?”
“저도 회사차로 와서...”
[깨오똑-.]
말을 흐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최영훈에게 톡이 날아왔다.
그는 걸어가는 자신의 사진까지 같이 첨부하며 이런 메시지를 날려 온 것이었다.
<차는 두고 간다. 잘 써먹으라고.>
이런 눈치도 있고 제법이네.
나는 톡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쪽 차로 가시죠.”
그녀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이제 인적도 없는 지하주차장에 들어섰건만 그녀의 태도는 쌀쌀맞았다.
[덜-컥-! 텅-!]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그쪽이 향기 씨라고요?”
“네. 맞아요.”
밖에서 보다는 훨씬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아무래도 지켜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과 행동을 조심했던 것이리라.
“좋아요. 그러면...”
그녀는 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부터 서로의 취향과 버릇까지.
나는 그녀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처음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해대던 그녀도 내가 막힘없이 질문에 대답하자 점점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향기 씨!!”
“그래!!”
[와-락!]
그녀는 내가 ‘조향기’라는 것에 확신이 들자 바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힘껏 껴안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성형수술만 했다면서. 왜 이렇게 골격까지 변했어요?”
“그게 그렇게 되었어.”
“일단 여기에서 더 말하기는 그러니까 자리를 옮겨요. 이 자동차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그녀는 자리를 옮기길 원했다.
하기야 요즘에는 선팅된 유리창을 뚫고도 촬영할 수 있는 기자들도 있다고 하니까.
여기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단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 차에 광고 래핑을 하지 않는 건데.’
이런 일로 후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실제로 내가 납치를 당하기 전에는 그녀와 자동차에서 몰래 데이트를 많이 했었다.
그만큼 인적이 드문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만나는 것은 그럭저럭 유용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방법을 이용해서 그녀와 대화를 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회사의 제품을 홍보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모든 회사의 자동차에 광고 래핑을 해버렸고, 결론적으로 엄청 눈에 띄는 차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자동차만 평범했어도 계속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미안.”
“아니에요. 어차피 저도 좁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거 답답하다 싶었어요.”
그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달랬다.
여전히 상냥하고 성격이 좋았다.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천천히 자동차를 움직였다.
“생각해 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네요. 저나 향기 씨나 이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그랬다.
막상 차를 몰고 나오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뇌리를 스치는 장소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좋은 곳이 있어요. 원래 은밀하게 사람들 만나려고 섭외한 장소인데 이런 식으로 쓰네요.”
그곳은 무인모텔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무인모텔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절대 안의 동정을 살필 수 없도록 철저하게 차단된 형태의 모텔이었다.
사실 영화처럼 CCTV도 없고, 인적도 드문 폐가를 안전가옥으로 삼을까 고민도 했었다.
주 회장과 주아린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오히려 눈길을 끌것만같았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불륜 커플’을 노리고 만든 ‘외부 차단형 모텔’이었다.
여기라면 특별한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CCTV도 공개될 일이 없었고, 다른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여기는 주차장도 외부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불륜 커플을 노리고 만든 시설이라...”
“왜 그렇게 잘 알아요? 이 인간 나 몰래 바람피운 거 아냐?”
차를 세우며 그녀의 질문에 답하자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제가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었겠어요? 목숨 부지하랴 사업하랴 바쁘기만 했죠.”
내가 약간 쓸쓸한 표정으로 답하자 그녀는 등을 다독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오늘은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의 무사함을 알리고 보고 싶었던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던가?
[철-커-덕! 쿵! 삐리-릭!]
방에 들어서고 문이 닫혔다.
그러자 그녀는 비로소 긴장된 표정을 풀고는 침대에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으~. 이제야 좀 쉬겠네요.”
“많이 힘들었어요?”
“조금요. 그래도 중간부터 왠지 힘이 솟아서 괜찮았어요.”
내가 그녀를 회복시킨 덕에 괜찮았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뒤척이던 그녀는 내가 다가가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걱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된 거예요? 정말로 향기 씨가 맞아요?”
“확인했잖아요.”
“동시에 ‘이정혁’인 것도 맞고요?”
“현재의 제 신분이죠.”
“세상에...”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전신 성형을 했다면 이렇게 빨리 회복할 리가 없는데...”
역시 강윤소는 똑똑했다.
아니면 연예계에 종사하는 만큼 성형에 대한 지식이 남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나의 변화된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마리나 자매와 달랐고, 약간의 증거를 보여주니 바로 나를 믿어준 주아린과도 달랐다.
그녀는 단번에 이치를 뛰어넘는 나의 상태에 의문을 품었다.
나는 잠시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다른 사람에게 둘러댄 것처럼 적당히 얼버무릴까?
아니면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쪽이 좋을까?
‘그것보다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페로몬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까지 엑스칼리버를 휘두르고 다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더 거북했다.
과연 그녀는 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
비록 많은 여자가 먼저 나에게 달려들기는 했다.
하지만 때로는 나도 페로몬을 이용해서 여자들을 농락하기도 했기에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애인이 생긴 후에도 나는 페로몬을 이용하기도 했고,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이 모든 걸 그녀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꼭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있어? 그냥 다른 여자들과는 적당히 지내고 그녀에게 충실하면...’
마음속에서 간사한 생각이 솟아났다.
솔직히 들키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능력을 이용해서 평생을 속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있자니 왠지 사실을 말하고 싶어졌다.
게다가 페로몬을 이용하지 않고 인연을 맺었던 진짜 사랑이 아니었던가?
시작도 끝도 솔직하게 나아가고픈 마음이 생겨났다.
누가 듣는다면 허울 좋은 양심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아니면강윤소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심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나 이것보다 더한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마다 나는 그녀를 속이고 사실을 감춰야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거짓이 많은 관계일수록 그 관계는 지속하기 어렵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90년대 모 유명 프로그램의 동작을 흉내 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