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애인에게 버프를 겁니다.
잠시 후에 강윤소가 현장에 나타났다.
힘이 넘치는 힙합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인상이 강해 보이도록 화장까지 한 모습이었다.
‘잘 어울리네.’
평소에는 지적이고 털털한 느낌의 인상인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그럴듯한 옷을 걸치니 소위 ‘걸 크러쉬’라는 말이어울리는 래퍼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터-덕-!]
[[“!!!”]]
밝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던 그녀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비척거리며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왜 저러지?’
다행히 그녀가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주위로 스텝과 매니저가 몰려들었다.
그녀는 다시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진정시키며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표정이...’
그녀의 밝은 표정과 힘이 넘치는 걸음걸이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창백한 편이었고, 눈빛은 탁했다.
어딘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목을 길게 뺐다.
그녀의 상태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
“아이고, 놀라셨나요? 요즘 윤소 씨가 거의 잠을 못 자서요.”
“그렇게 스케쥴이 많습니까?”
“바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안 재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최근에 고민거리가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광고주인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매니저와 감독은 황급히 다가와서 나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안한 사람은 나였다.
그녀를 저 정도로 지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일거리에 오히려 행복해하던 사람이 강윤소였다.
그런 그녀가 일 때문에 힘들어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내가 위기에 처해서 쫓겨 다니고, 심지어 죽은 것으로 위장까지 해야 했다는 사실을 전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녀의 걱정을 덜어줄 요량으로 사실을 전했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미안해. 윤소야.’
나는 차마 강윤소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죄스러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강윤소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소란 떨 거 없어요! 어서 촬영 시작하죠.”
주위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키려고 더욱더 밝은 모습으로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매니저와 감독을 다독이며 웃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현장으로 돌려보냈다.
“야, 찔리냐? 걱정시켜서 미안해?”
내 표정을 읽은것인지 최영훈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곤란한 상황이 되면 최대한 무표정한 모습으로 있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냈던 녀석은 그런 나에게서도 무엇인가를 읽어내는 모양이었다.
이런 눈치는 또 기가 막힌다.
“그래, 미안하지. 정말 나 때문에 저런 거라면...”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그는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잘 설명하라고. 다 이해해 줄 거다.”
“그렇겠지?”
나는 최영훈의 말을 버팀목으로 삼아서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너무 바뀌어버린 외모에 그녀가 나를 밀어내는 건 아닐까?
아니면 위험한 일에 발을 담갔다고 나를 책망할까?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녀가 눈앞에 있건만 내 마음은 묘한 불안으로 떨렸다.
“좋았어! 깟뜨!”
한동안 그녀는 다양한 걸음걸이로 촬영장을 걸었다.
우리 회사의 제품인 S3B the monster를 들고서.
그리고 중간에스웨그가 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매력적인 모습을 뽐냈다.
역시 스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멋졌다.
얼마간 그렇게 촬영에 임한 후에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졌다.
“이제 워킹은 그만하면 충분하게 담았어요. 이번에는 바스트 위로만 찍을 거예요. 표정이 중요해요. 표정! 그리고 멘트를 밝은 표정으로 확실하게! 자, 준비~~액션!!”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감독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카메라의 앵글로 들어갔다.
그녀는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꺼지지 않는 열정! 새로운 힘! 경험하세요. S3B the monster.”
나는 학예회의 발표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그녀의 연기를 지켜봤다.
그녀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우리 회사의 제품을 흔들며 대사를 읊는 것이었다.
훌륭해.
“컷! 스탑! 스탑! 아니야! 이게 아니죠! 윤소 씨! 땀! 그리고 표정!”
그런데 감독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촬영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뭐가 문제지?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와 감독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표정도 더 밝게! 거기 메이크업! 땀 닦아주세요. 다시 준비~.”
그들의 대화를 듣고 보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실제로 그녀의 얼굴에 제법 많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네. 괜찮을까?’
강윤소는 땀을 닦고 숨을 고른 후에 다시 촬영에 임했다.
“이...일주일 동안 꺼지지 않는 열정...”
“컷! 컷! 거기서 말을 더듬으면 어떻게 해요!”
이번에는 말까지 더듬는 것이었다.
감독은 나오는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과 곤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고, 강윤소는 지친 표정으로 연신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찍어내고 있었다.
“야, 윤소 씨가 힘들어하는 모양인데? 이거 괜찮겠어?”
“그러게 괜히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더 강해지는 상황이었다.
나는 바쁜 그녀를 만날 요량으로 광고를 이용해서 그녀와 접점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광고가 그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잠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뭔가가 떠오른 나는 슬그머니 현장으로 다가갔다.
감독은 슬며시 끓어오르기 시작한 짜증과 분노를 간신히 삭이고 있었고, 강윤소는 미안함과 피곤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찍어내고 있었다.
“감독님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닙니다. 다만 윤소 씨가 조금 실수를 하네요.”
“어떤 부분이죠?”
“이 광고에서 핵심은 고용량 배터리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밝고 건강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자꾸 윤소 씨가 어두운 표정을 보여요. 게다가 땀도 많이 흘리고.”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감독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척했다.
‘역시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야.’
나는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화장으로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열정적인 연기와 의욕으로도 다 채울 수 없을 정도의 그늘이었다.
“천천히 하시죠. 다그친다고 좋은 그림이 나오겠습니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여유를 가져도 좋다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감독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촬영장과 장비를 빌리는 것도 다 돈입니다. 게다가 시간도 정해져 있고요. CF 촬영을 할 때 감독들이 닦달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몇 마디 말로 때울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말이다.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강윤소의 피곤함은 사라진다. 몸에서 힘이 넘친다.’
그렇게 은근히 페로몬을 발했다.
얼마간 그녀에게 암시를 보내자 연신 피곤한 표정으로 땀을 찍어내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밝아지기 시작했다.
“어? 윤소야, 너 안색이 좋아졌다?”
그녀의 이변을 눈치챈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무겁던 몸이 가벼워졌어요. 역시 저는 일하는 체질인가 봐요.”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웃는 그녀를 바라보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미안해요.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아요.’
나는 힘을 되찾고 밝은 표정으로 촬영장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렇게 해야 강윤소지! 자, 다시 갑시다! 레디~~악숀!”
감독은 상태가 좋아진 그녀를 다시 앵글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우리 회사의 제품을 흔들며 힘차게 대사를 읊었다.
“일주일동안 꺼지지 않는 열정! 새로운 힘! 경험하세요. S3B the monster.”
그녀는 해바라기도 울고 갈 정도의 밝고 건강한 미소를 뽐내며 연기를 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봤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카메라의 앵글과 프롬프트를 바라보던 감독은 그녀의 연기가 끝나자 크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좋았어!갓뜨!”
감독은 그녀의 대사와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손을 크게 휘두르며 ‘O.K’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촬영은 마무리가 되었다.
간단하게 보였던 촬영이 족히3시간은 넘게 걸렸다.
“자,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감독은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 오늘 촬영은 끝입니까?”
“네. 추가로 더 원하시는 게 있나요?”
이 감독이 왜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철저하게 광고주에게 맞추는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더 요구하면 여러 사람이 귀찮아지겠지?
어차피 광고도 강윤소를 만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뇨. 감독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겠죠. 저는 대만족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편집 끝내고 완성된 영상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내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감독은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정리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천천히 시선을 강윤소에게 향했다.
그녀는 촬영이 끝났음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스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역시! 내 여자! 예의가 바르기도 하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앞으로더욱더 아름다워진다.’
‘당신은 앞으로 더욱더 목소리가 좋아진다.’
‘당신은 앞으로 더욱더 똑똑해진다.’
‘당신은 앞으로 체력이 더 좋아진다.’
‘당신은 병과 피로에 강해진다.’
‘당신의 피부와 머릿결은 더욱더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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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축복의 말을 그녀에게 내뱉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만 말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암시를 걸었다.
“어-어멋! 내가 왜 이러지?”
나의 암시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다시 비틀거렸다.
그러자 매니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좀 무리한 거 같다. 얼른 가서 쉬자.”
“괜찮아요. 잠시 머리가 띵했을 뿐이에요. 저 멀쩡해요.”
그녀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밝은 미소를 보이는 것이었다.
‘갑자기 변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게다가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고.’
나는 암시를 보내면 ‘천천히’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나의 암시도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상대를 조정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면 탈이 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긋하게 암시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