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안녕하세요. 제가 접니다.
지금까지 나의 생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총 7명이었다.
우리 가족과 최영훈, 강윤소 그리고 주아린과 주 회장이었다.
척과 카렌 그리고 배에 있던 용병들도 나의 생존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완벽하게 조종하고 있어서 발설의 위험은 없었다.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은 들었을까?’
나는 그녀들이 나의 소식을 들었을지 궁금했다.
연락해보면 알 수 있겠지.
[뚜-르르르르.]
신호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마리나 씨?”
“...너 뭔데 대뜸 이름으로 불러? 이 번호 어디서 알았어?”
“아, 저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번호는 조향기 씨에게서 들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이바노바’씨. 놀라게 해드린 것 같군요.”
“풀네임까지. 너 뭐 하는놈이야?”
내 입에서 ‘조향기’라는 이름과 그녀의 풀네임이 나오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곧 냉정함을 되찾고 앙칼진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죽었어. 무슨 용건이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이야기를 진행해야.
“그의 죽음에 관해서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요?”
“!!!”
또다시 거친 호흡과 침묵이 이어졌다.
꽤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어디 말해봐. 그가 어쩌다 죽은 거지?”
“전화로 말하기는 그렇군요. 약속을 잡는 건 어떨까요?”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습니다. 올 때 호위나 경호원을 데리고 오셔도 됩니다.”
“알겠어.”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에서 나는 그녀들을 기다렸다.
분명 마리나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마리야도 같이 오겠지.
“우리를 불러낸 간 큰 놈이 너냐?”
마리나와 미리야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였다.
요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젊은 모습이었고, 동서양의 매력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비단처럼 고운 은발도 여전했다.
‘뭐, 이제 내 외모도 그런 편이지만.’
지금의 내 모습도 그녀들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의 뇌와 페로몬은 내가 가진 외모가 어떤 문화권이나 나라에서도 통할 수있도록 변화시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뭐, 그때 일어난 진화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다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렇게 추측을 할 뿐이다.
“네. 저는 ‘이정혁’이라는 사람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주변에는 그녀들을 따라온 호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일부는 검은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녀들의 뒤에 버티고 섰고, 일부는 손님을 가장하여 주위와 나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말해봐.”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험악한 눈들이 많아서야 어디 무서워서 이야기가 제대로 나오겠습니까?”
“...너 까불다가는 무서운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너스레를 떨자 마리야는 살기를 띠면서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다가 오히려 심기만 건드린 꼴이 되었다.
이걸 어쩐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자.
“주위를 물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두 분에게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너를 어떻게 믿고? 사람들을 물리면 네놈이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
“그럼요. 저는 절대 그런 험악한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죠. 저는 [[운명의사람]]이니까요.”
“!!!”
“!!!”
나는 일부러 [[운명의 사람]]이라는 대목에 힘을주어 말했다.
그렇다.
그녀들이 나를 부를 때 썼던 명칭이었다.
이걸 내 입으로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너 그것도 향기 씨에게 들은 거야?”
“그 사람이 그걸 말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녀들과 잠자리를 가질 때 나왔던 말이었다.
그걸 내가 입에 올리자 그녀들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을 물려주시면 바로 말씀드리죠. 부탁드립니다.”
“좋아.”
[딱-!!!!]
마리나는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핑거스냅으로 신호를 보내자 가까이에서 호위를 하던 사람들이 제법 먼 거리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만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을 거야. 편하게 말해봐.”
“흠. 흠. 좋아요. 사실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그녀들의 표정과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들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사실은 내가 조향기야.”
“!!!”
“!!!”
그 말에 그녀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고작 우리를 불러내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미친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주아린은 나의 말투나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던 덕분에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달랐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낯선 얼굴로 나타나서 조향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다.
‘이걸 어쩐다?’
주아린과 만났을 때 일이 너무 쉽게 풀린 탓에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마리나 자매의 반응이 정상적이었다.
이걸 고려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했는데.
내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
“무슨 영혼이 빙의되었다거나 그런 거냐? 지금 이 자리에 향기 씨의 영혼이 찾아왔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아.”
“지금 그만두면 고통 없이 죽여줄게. 하지만 더 나불대면 네놈 가족까지 포함해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그녀들의 불쾌지수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그런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페로몬?’
그것에 영향을 받은 여자들은 모두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페로몬을 이용하면 어떨까?
다시 그 감각을 맛보게 해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조향기’라는 걸 믿어주지 않을까?
분명 그녀들도 나의 페로몬을 느끼며 쾌감에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아마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슬며시 속으로 되뇌었다.
‘페로몬 50%!’
그리고 진지한 시선을 보내며말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사기도 아니고요. 저 향기가 맞아요.”
“!!!”
“!!!”
그녀들은 나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는 나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성형수술이라도 한 거야?”
“네. 사정이 있어서 모습을 바꿨습니다.”
“마리야, 뭘 진지하게 그놈 말을 듣고 있는 거야? 분명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향기는 아니야. 골격부터가다르잖아.”
마리나는 익숙한 분위기와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를 흘겨봤다.
칫! 이래서 눈치가 빠른 여자들은 싫다니까.
페로몬 때문에 단순히 외모가 바뀐 수준을 넘어서 진화가 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녀들은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쉽게 조향기라고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페로몬 70%!!’
하지만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자리에서 그녀들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그녀들 손에 내가 박살이 날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들에게 내가조향기라는 걸 알려야 했다.
“그래도 이 분위기는...”
“그래, 보통 놈은 아니네...”
내가 뿜어내는 페로몬에 그녀들은 어느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좋아. 당신이 조향기라고 치자고. 그래서 어쩌다가 그런 모습이 된 거지?”
“회사의 일을 하다가 ‘블랙 애로우’에게 찍혔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가 되어서 죽음으로 위장하고, 모습도 바꾸게 된 거죠.”
나는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며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은 페로몬을 노리고 습격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이야기한다고 해서믿어줄 리도 없었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니 말이다.
딱 이 정도가 좋은 핑계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놈들 소속의 작전선이 영해에 어슬렁거리지 않았어?”
“그런 보고를 받았었지.”
그녀들은 외부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래도 자라온 환경과 그녀의 아버지가괴물인 탓이리라.
그녀들은 그런 동향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국정원이냐?
“그리고 향기 씨가 우리에게 블랙 애로우에 관해서 물었었지.”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어.”
그녀들의 눈빛은 의심에서 점점 호의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조향기가 맞아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이정혁’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정말 자기 맞아?”
“쉿! 목소리 낮춰주세요.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니까요.”
내가 입술에 손을 올리자 그녀들도 고개를 낮추며 숨을 죽였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숨어 있었던 거야?”
“네. 새로운 신분을 얻고, 제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죠.”
그녀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다고 뭐가 나오겠는가?
그녀들 말대로 골격까지 바뀌었는데.
이전의 내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촉촉한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 우리 사연도 다 알고 있어.”
“네. 볼쇼이 데레바에서 파견 나오신 것도 알고 있고요. 아버지와의 일도 알고 있습니다.”
“!!!”
“!!!”
내 입에서 그녀들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들은 눈이 커졌다.
그리고 더욱더 은근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우리가 그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인간은 아버지도 아니죠.”
이 사실은 우리만 아는 비밀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녀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녀로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그녀들을 어릴 때부터 고급 창부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로비에 그녀들을 이용했다.
그러니 실제로는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너, 조향기!!”
“운명의 사람!!”
그녀들은 얼른 내 손을 붙잡았다.
나도 그녀들의 손을 맞잡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그녀들이 나를 알아준 것이다.
그녀들의 손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건강하게 지냈어요?”
“우리야 별일 없었지. 그보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맞아. 며칠을 울었어.”
“미안해요.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괜찮아. 살아 있으면 되었어.”
“그래, 역시 운명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어. 모든 걸 다 빼앗아 갔어도 너를 돌려줬으니.”
페로몬 때문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그녀들은 열기가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더 이야기를 나누죠.”
여기에서 더 이야기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카페의 손님들도 있었고, 그녀들을 따라온 호위나 경호원도 너무 많았다.
주아린을 만나거나 최영훈을 만날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후훗, 그렇게 하자.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호텔로 가자.”
“그래, 그곳은 보안도 확실한 곳이거든.”
나의 기분 탓이었을까?
그녀들의 얼굴에 귀엽고도 음란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