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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탄생하다, 이정혁 (80/110)



〈 80화 〉탄생하다, 이정혁

[푸-드드득!]

새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최근 며칠 동안 나는 페로몬을 시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페로몬으로어지간한 생물은  조종이 가능한  같았다.

‘이 주변 동물은  조종해 봤어.’

곤충, 절지동물,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조류까지.
거의 모든 생명체를 조종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식물도 조종할 수 있었다.
물론 미모사나 식충식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종류만 말이다.
잘 움직이지 못하는 종을 무리하게 움직이려고 하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잎이나 가지가 떨어지기도 했으니.

‘그래도 미생물은  모르겠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해 봤지만 역시 잘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생명체들은 조종이 어려운 모양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가능하려나?
어쨌든 현재로서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것들은 단세포였다.
자극이나 화학물질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 없거나 제한적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겠지.’

나는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제법 두께가 있는 나무 앞에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은 이걸 시도해 보자.’

며칠 동안 시험한 것은 페로몬만이 아니었다.
신체 능력도 측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달리기는 비호처럼 빨라진 상태였고, 힘은 어지간한 바위를 가뿐하게 들어 올릴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점프력은 가젤이나 캥거루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높아서 2m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아-압!!!!”

[빠-가-악!!!]
[우지직!!! 쿵!!]

나는 나무에 주먹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손을 다치는 것을 염려해 시도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신분증이나 의료보험도 없는 사람이 다치면 어디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여기는 외진 산장이었다.
병원까지 가는 길 자체도 멀고 험난했다.
그런 이유로 무리한 행동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무에 펀치를 날리고 말았다.
묘한 확신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나무는 내가 날린 주먹에 맞고 꺾여서 쓰러졌다.

‘피부와 뼈도 단단해졌어. 게다가 충격에도 강해졌고.’

상당한 힘을 실은 일격에도 몸에 전해지는 충격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피부는 쓸린 상처도 없었다.

‘영화가 생각나네.’

모 영화가 떠올랐다.
군대에서 개발한 혈청을 주입받고 ‘슈퍼 솔져’가 되는 내용이었다.
물론 내가 투약을 받은 것은 강해지는 물약이 아니라 페로몬을 내뿜게 되는 ‘유전자 조작 약품’이었지만 말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벌써 며칠이 흘렀지만 주 회장에게 연락은 없었다.
내가 성질이 급한 것일까?
묘하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면 별장에 갇혀있는 내 신세가 처량해서 더욱더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답답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목숨을 위협받고 이렇게 몸을 피해야 한다니.

‘마음 편하게 먹자. 휴가 왔다고 생각하자.’

억울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별장으로 옮겼다.
그런데 뭔가 생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별장 입구에 본 적이 없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상자?’

외출할 때는 없었던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슬며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서류와 통장 그리고 신분증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눈에 쉽게 띄도록 놓여 있는 한 장의 편지도 있었다.
나는 편지를 펴서 읽어 나갔다.

<새로운 신분을 완성했네.
금융거래나 사업도 할 수 있는 깨끗한 신분이지.
어디서 노숙자나 행불자의 신원을 사들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네.
내가 가진 모든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해서 만든 거니까.
자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군.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도록 하세나.>

 회장의 편지를 보니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만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공무원 조직과 금융조직에도 막강한 인맥이 있어야 할 텐데.
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왜 번거롭게 일일이 인물을 만든 거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냥 행불자나 노숙자의 신원을 가로채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편이  좋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행하기는 지극히 어렵지만 말이다.]]
가능하면 새로 만드는 것이 몇 배는 더 좋다.
가령 당신이 그들의 신분을 도용해서 생활하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들을 아는 지인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꼼짝없이 신원을 도용했다는 사실을 들키게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다.
만약 도용한 신원이 ‘결함이 있는 신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거나, 금융거래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신용도가 망가져 있다면?
애써서 새로운 신분을 손에 넣어도 활동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회장이 취해준 조치는 의미가 있었다.
어떤 사연으로 사라진 것인지 찜찜한 행불자나 어떤 사연으로 신분을 넘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노숙자의 신분을 빌리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은 일이었다.

‘어디 보자...’

나는 상자를 들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고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먼저 손에 잡힌 것은 통장이었다.
역시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인 모양이다.
나도모르게 통장으로 먼저 손이 향했다.
내가 너무 속물인가? 헤헤.

“헉!! 50억?!!!”

나는 통장에 찍힌 금액을 살펴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에붙은 ‘접착식 메모지’을 떼서 읽었다.

<그래도 우리 그룹을 구한 영웅인데 밥은 굶지 않게 해주고 싶었네.
50억 정도면 그래도 그럴듯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주 회장에게는 그다지 큰 금액이 아닌 걸까?
나는 엄청난 금액에 손이 떨려왔다.
분명 내가 일한 월급과 퇴직금 그리고 몇 가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공로로 받을 애정이었던 인센티브가 있었다.
그렇기에 제법 많은 액수의 돈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50억이라니?

‘이거 그냥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거 아냐?’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액수의 돈이었다.
어디 그럴듯한 빌라라도 사서 월세나 전세를 놓으면 그럭저럭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 돈이 한방에 생긴 것이다.

‘음. 그래도 내가 억대 연봉이었고, 꾸준히 10년이나 20년을 일한다고 치면 못 만질 돈도 아닌 건가?’

나는 간신히 가슴을 진정시키며 통장을 내려놨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큰돈도 아니었다.
내가 노력하면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돈은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돈이 아니지.’

나는 얼른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 주민등록증

이(李) 정혁
92XXXX - 1XXXXXX

주소 : 서울특별시 OO구 XXX로, XXX XXX>

27살.
신분증에 찍힌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무려 6살이나 많게 설정되어 있었다.
나는 신분증을 내려놓고 서류를 꺼냈다.
서류는 제법 묵직했다.
두께가 상당했다.
나는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서류에는 이정혁이라는 인물의 인생과 이력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서류에서 눈을 떼니 어느덧 시간이 3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서류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남자.
그러나 머리는 비상했음.
OO고등학교를 졸업하고 OO대학으로 진학.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입대. 무사히 제대함.
대학교 졸업 후에 혜성전자에 입사함.
 2년간 근무하며 성실히 생활함.
월급 일부를 떼어서 투자하던 주식이 대박을 터트려서 50억을 벌게 됨.
사업을 할 요량으로 최근에 혜성전자를 퇴사.>

간단히 요약해서 중요한 내용이  정도였다.
깊게 들어가자면 내용이 끝도 없이 방대했다.
사적으로 친한 친구의 주소와 연락처부터 음식의 기호까지 세세하게 설정이 잡혀 있었다.
정말 대단한 정성이었다.

‘모두 외우자면 고생 좀 하겠어.’

나는 서류를 들고 다시 읽어 나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에 읽을 때는 3시간도 넘게 걸리던 서류를 30분도 되지 않아서 읽을 수 있었다.
익숙해진 것을 떠나서 내용 대부분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었나?

‘이것도 페로몬의 힘인가?’

생물을 조종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 강인해졌다.
초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많은 내용의 서류도 거뜬히 암기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능도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들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블랙 애로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냉정하게 대처한 것도 그렇고, 탈출한 후에도 최대한 눈을 피해서 주 회장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떠올린 것도 그랬다.
아무래도 나는 지능이나 정신적인 측면도 강화가 된 모양이었다.

‘쳇! 기승전 페로몬이냐? 무슨 알파이며 오메가야?’

나는 실소를 터뜨리며 서류를 집어 던졌다.
불과 5시간 만에 나는 새로운 자신을 완벽하게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에 성공했다.

‘새로운 신분도 얻었겠다. 슬슬 움직여 볼까?’

나는 카렌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끊고, 네 번째에 통화한다.’

미리 정해둔 약속이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잽싸게 끊는다.
그리고 연달아 전화한다.
그녀가 다시 받으면 다시 끊는다.
그렇게 몇 번이고 전화를 끊다가 네 번째에 통화하면 그게 나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약속을 기억했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그녀는 도청을 우려하는지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저예요. 이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움직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몸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수일 내로 우리 가족과 경찰이 발견할  있도록 해주세요.”

“네.”

“나중에 또 연락하죠.”

나는 그녀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녀의 통화에서 언급한 몸이 뭐냐고?
나를 죽은 사람으로 위장시켜줄 시체였다.
그 시체가 나로 판명되고, 장례가 치러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본격적으로 내가 움직이는 때는 그 이후가  것이다.

“여보세요?”

“엄마, 아들이에요.”

“아이고, 밥은 잘 먹고 있고?”

“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보다  제 시체가 발견될 거예요.”

“...그래 알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번호로 연락하면 되지?”

“네.”

나는 부모님께 상황을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서류와 신분증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로운 내 이름.
그것은 이정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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