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1)
개운하게 사정을 하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이 맺힌 눈동자와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매혹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정성스럽게 빨아댔다.
그러자 그녀는 부드럽게 혀를 내밀며 내 키스에 답했다.
“이제 곧 깨어날 거예요.”
“또 이별이네요.”
“뭐, 여기에 자주 오면 안 좋다고요.”
쾌감에 젖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녀는 어느새 총기를 회복하고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 행복한 시간이 끝나가는 모양이다.
눈을 뜨면 분명 끔찍한 일이 시작되겠지.
“눈을 뜨면 분명 무서운 일을 겪게 될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라면 잘 해낼 거예요.”
“제가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요? 듣기에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던데.”
“괜찮아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잘 활용해 보세요.”
그녀는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페로몬의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그녀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훌쩍 몸을 일으키고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질펀한 섹스로 온몸이 질척하던 그녀는 순식간에 깔끔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마치 갓 씻은 사람처럼 깔끔한 모습이 되었고, 찢어발겼던 레오타드는 어느새 회복되어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손을 흔들었다.
‘어-엇?!’
그때였다.
익숙한 느낌이 엄습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의 시야가 점점 멀어졌다.
순식간에 릴리아나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더니 어느새 나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느끼던 싱그러운 감각과 다른 느낌이 나에게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과 코로 파고드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이곳이 결코 쾌적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있어야 깨어나는 거지?”
“곧 일어난다. 세게 때린 건 아니야.”
“집은 어때? 뭐라도 나온 게 있나?”
“없어.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결한 말투로 뭔가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내가 깨어난 건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몸을 움찔거리며 감각을 돋웠다.
둔해진 감각이 점점 뚜렷해졌다.
나의 몸은 구속당한 채로 의자에 묶여있는 것 같았다.
양팔과 양다리는 단단히 묶여 있었고, 눈은 가려져 있었으며, 입에 재갈까지 물려져 있었다.
‘기절시킨 후에 나를 끌고 온 건가?’
아마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옷까지 벗겨 놨어?’
팬티 한 장을 빼고는 모든 옷을 벗긴 모양이었다.
피부로 주위의 공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더듬었다.
다행히 ‘페로몬 조절 장치’는 그대로 있었다.
아마 평범한 ‘스마트워치’로 여긴 모양이다.
“음. 일어난 모양이군.”
“어떻게 알지?”
“너무 얌전하잖아? 뒤척이거나 움찔거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움직임이 없어.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고 봐야지. 저놈 정신이 돌아왔어.”
“!!!”
예리한 놈이 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한 것을 깨닫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떠보는 것일 수도 있어. 일단 모른 척하자!’
나는 죽은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르-륵!]
그는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었다.
이어서 입을 막고 있던 재갈도 풀어냈다.
그리고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고는 ‘팬 라이트’로 동공반사와 눈동자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으-윽! 눈부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제해도 한계는 있는 법!
나의 뇌와몸은 정직한 반응을 보였다.
불빛에 동공이 수축하며 의식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눈앞에 다가온 인형에 두려움을 느끼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까지 보여 버렸다.
“제법 노력은 했다만, 의미 없다고. 일어나 친구.”
남자는 나의 뺨을 슬며시 건들면서 나를 흔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낯선 풍경이었다.
“정신이 좀 드나?”
“여기는 어딥니까? 당신들은 누구죠?”
“신지혜를 알고 있지?”
“그 사람은 누굽니까?”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최대한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태블릿PC를 나에게 들이미는 것이었다.
“여기 영상을 보면 신지혜와 네가 접촉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이래도 아니라고 할 건가?”
분명 CCTV가 없는 곳이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영상에는 나와신지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 떡하니 찍혀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후후, 왜 놀랐어? CCTV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나? 그런데 이걸 어쩌지? 어떤 멍청이가 몰카를 깔아놨더라고. 거기에 우연히 너희들이 찍힌 거지. 이래도 부인할 텐가?”
나를 추궁하는 남자를 살펴봤다.
키가 180 정도에 근육질의 남자였다.
양팔에는 문신이 있었고, 머리는 매우 짧았다.
정규군의 군복이 아닌 자유로운 스타일의 군복과 간편한 군장을 갖추고 있었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니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목숨이라도 구걸해야 하나?
하지만 순간 난 어떤 정치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명백한 사실이 있더라도 일단 부정해라! 그리고 도망갈 수 있으면 최대한 도망가라!’
우스갯소리로 ‘일부이도’라는 말이 있다.
일단 부정하고, 가능하면 도망가라는 소리다.
세상에 모든 사법절차에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있고, 인간사에도 시간에 따라 부흥과 쇠락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일단 급할 때를 피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는 속으로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제가 임상시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때 많은 박사님을 만났었지요. 그때 잠깐 스쳐 지나갔던 분인 모양이군요.”
“하?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네. 제가 뭘 받았으면 기억을 하겠죠.”
“카렌, 이 친구가 아무 기억도 안 난다고 하는데?”
“알았어. 척, 비켜봐. 내가 기억나게 해볼게.”
거구의 남자를 물러나게 한 사람은 여자였다.
붉은 장발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띠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의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리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네.”
내가 끝까지 모른 척을 하자 그녀는 손을 움직여 뭔가를 꺼내 들었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컴벳나이프(군용대검)였다.
‘설마 저걸로 뭘 어쩌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나이프의 날을 살짝 혀로 핥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의 손가락으로 칼날을 향했다.
“부탁해.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줘.”
[티-티틱! 즈-걱!]
엄청난 통증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저지른 만행을 확인했다.
그렇다.
그녀는 대검의 날로 내 손톱을 꺾어 날려버린 것이다.
졸지에 멀쩡한 손톱을 뜯긴 나는 극심한 통증과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아파!! 아아아아아아악! 당신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카렌’이라고 불린여자는 대검에 묻은 약간의 혈액을 핥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자 ‘척’이라고 불린 사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냥 내가 물어볼 때 대답하지. 그러면 최소한 편하게 죽여줬을 텐데. 카렌은 고문을 즐기는 ‘사디스트’라고. 넌 아주 엿된 거야. 크크크.”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면서 웃음 짓고 있었다.
미친 것들!
“아직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안 들지?”
“...”
“그래, 말하지 마! 나랑 더 놀자고.”
[티-디디딕! 팅! 즈-악!]
“끄-아아아아악!!!!”
그녀는 내가 간신히 안정을 찾을 무렵에 두 번째 손톱을 날려버렸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나는 다시 다가온 극심한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나는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겁니까!! 정말로 신지혜라는 사람도 모르고,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요!!”
엄청난 고통에도 나는 신지혜를 감쌌다.
남자도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그녀가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쉽게 진실을 토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척’이라는 용병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말해도 나의 끝은 ‘죽음’이었다.
“이 영상을 보라고. 어떤 바보가 봐도 너희들이뭔가를 주고받았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런데 끝까지 잡아떼겠다고?”
[티-디디딕! 팅! 스-걱!]
“끄-으으으으읏! 아파! 아아악!”
이제는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가고 싶었다.
릴리아나가 기다리는 평온하고 따뜻한 그 세계로!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애써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몸을 늘어뜨렸다.
손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물방울을 느끼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말이다.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포기’가 가장 좋은 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카렌은 대검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냅다 나의 따귀를 갈겼다.
[짜-악!!!!]
그렇게 나의 의식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독한 고문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서, 기절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잔인한 년!’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이제 고문을 그만하려는 걸까?
나는 이대로 죽는 걸까?
“어이, 척, 오늘 좋은 구경시켜줄게.”
“뭐야, 혹시 그걸 하려고?”
“그래, 딸칠 준비나 하라고.”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카렌’이라는 여자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녀는 짐짓 요염한 자태를 보이며 천천히 군복을 벗었다.
“흐흐흐, 그래도 마지막에 좋은 경험하는 거야. 저년이 성격은 저래도 그곳은 명기거든.”
“???”
“아직도 감이 안 와? 카렌이 지금부터 너를 강간할 거라고. 카렌은 고문도 좋아하지만, 고문하면서 남자를 따먹는 걸 더 좋아하거든.”
“!!!”
나는 놀라서 얼른 시선을 카렌에게 향했다.
어느새 속옷만 남긴 그녀는 요염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불쌍한 새끼야. 내가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게.”
평소라면 반겼을 여성의 나체였다.
하지만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마치 용사가 여마왕의 나체를 목도한 것처럼, 오랫동안 수행한 고승이 무시무시한 ‘나기’의 나신을 마주한 것처럼 두렵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