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아름다운 침략자 (2)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지.’
본사에 다녀온 후로 나는 ‘볼쇼이 데레바’라는 회사를 조사했다.
특히 해외 진출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한국에 진출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혹시 국내 기업들이 미리 방어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정보를 제한한 것일까?
하지만 러시아 국내의 언론을 살펴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정말 그 사람들은 ‘볼쇼이 데레바’의 사람들이 맞는 걸까?
‘휴~. 엮인 걸 보면 비명이 나올 정도네.’
회장님의 말대로 줄을 대고 있는 곳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곳뿐이었다.
군부, 전 KGB 계열 마피아, 암살자 그룹, 거기에 과격파 정치세력까지.
과연 마피아의 나라로 불리는 러시아에서 살아남은 대기업다웠다.
이건 여담이지만 러시아에는 약 5천여 개의 마피아가 존재하고, 그 업종에 일하는 사람들은 무려 3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는 마피아를 통하지 않고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최근에 ‘회색의 추기경’이라고 불리는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런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양반은 정당하지 못한 일 처리를 싫어해서 러시아 내에서 마피아들의 입지를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나?
하지만 그들의 자금력은 엄청나고 역사적인 뿌리도 깊다.
러시아에서 입지를 잃어도 다른 나라에서 충분히 세력을 떨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물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 힘이 대륙을 건너 대한민국에까지 미친 것이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채비를 서둘렀다.
그렇다.
오늘은 주아린과 함께 ‘볼쇼이 데레바’의 관계자와 만나는 날이었다.
어쨌든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어느 정도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인가?”
주아린과 나는 유명한 호텔의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쌍둥이 소녀가 앉아 있었다.
험상궂은 사내들을 예상했는데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앉아.”
우리가 도착하자 그녀들은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어 가능하세요?”
“그래,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야.”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화색을 띠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혜성그룹의 영애인 ‘주아린’ 양입니다.”
그녀들은 내가 건넨 명함을 훑어보고는 곧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주아린에게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를 할 뿐이었다.
“저기 일단 확실히 ‘볼쇼이 데레바’의 사람이 맞으신 가요?”
가끔 터무니없는 사칭을 하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신분을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어디에도 ‘볼쇼이 데레바’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흥, 그 늙은이도 같은 소리를 하더군.”
그녀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두툼한 서류뭉치였다.
거기에는 각종 신분증명이 가능한 문서와 러시아 언론에 찍힌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이 있었다.
‘조작이 아니다!’
나는 얼른 인터넷을 뒤져봤다.
조작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볼쇼이 데레바’의 관계자가 확실했다.
심지어 그 기업과 매우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그녀들은 주아린처럼 회장의 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우리 회사의 계열사를 원하시나요?”
“그걸 알 필요가 있어? 우리가 넘기라고 하면 넘길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그녀들의 막무가내인 태도에 주아린은 눈썹을 꿈틀댔다.
그녀의 성질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피아와 관련된 거대 기업이었다.
섣불리 기분을 거슬렀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대였다.
나는 주아린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리고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우리 회사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볼쇼이 데레바’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한 회사입니다. 굳이 취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
“혹시 우리나라의 시장을 잠식할 목적입니까?”
“...”
“그것도 아니면 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
“아니면 우리 회사의 미래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신 건가요?”
“...”
“그것도 아니면 우리 회사에 원한이라도? 혹시 저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
그녀들은 나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연신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래서 대답은?”
“전자와 식품은 핵심 분야입니다. 그걸 내어드리는 건 저희로서는 곤란합니다.”
그녀들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당신들은 그저 우리가 말하는 대로 따르면 되는 거야. 그거 알아? 우리는 돈으로든, 힘으로든 얼마든지 당신들을 짓뭉갤 수 있어. 그런데도 당신들에게 정리할 시간을 준 거라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들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자금력도 압도적이어서 충분히 지분경쟁을 통한 경영권 취득도 가능했고, 마피아나 군부의 힘을 빌려서 힘으로 부숴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는 소리지.’
내가 기대했던 것은 두 가지 경우였다.
첫째, 그들이 관계자를 사칭하는 가짜일 경우였다.
하지만 그건 물증을 통해서 가능성이 없어졌다.
둘째, 적절한 이유와 사정을 파악해서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들의 태도를 보건대 거의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회장이 말한 대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하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것일까?
“씨발! 이것들이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젠장!
주아린이 폭발했다.
그녀는 쌍둥이의 말에 격분해서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녀를 말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조금 흥분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끼리 잠시 협의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빛의 속도로 그녀를 끌어냈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가서 그녀를 다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싶어?”
“하지만 저것들 하는 짓이 너무 얄밉잖아.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그래서 어떤 회사인데?”
“조부 때부터 힘들게 키워온 회사라고요. 저런 양아치 회사와는 결이 달라요.”
“흥, 웃기는 소리 하네. 일본강점기에는 친일하고, 한국전쟁 때는 몸 사리고, 전쟁 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자본 불하받아서 편하게 기업을 키웠으면서. 뭐? 개소리하지 마라. 내가 볼 때는 저놈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게 없어.”
사실은 그랬다.
혜성그룹이라고 엄청나게 깨끗하고 존경받을 정도의 회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독설을 들으니 주아린의 표정은 풀이 죽다 못해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내가 너무 심했나?
나는 슬며시 조절 장치를 조작했다.
수치를 10%로 맞추고는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나도 아는데. 그렇게 막. 흑흑.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앙탈을 부리며 흐느꼈다.
나라고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때려도 내 새끼는 내가 때리는 것이 맞다.
아무리 얄미운 국내의 대기업이라도 해외의 기업이 잠식하려 드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는 회사로 돌아가.”
“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볼 테니까 믿고 돌아가 있으라고. 네가 있으면 오히려 일만 어려워져.”
그녀는 잠시 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길을 맞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길을 돌렸다.
‘자꾸 사용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조절 장치의 수치를 ‘15%’까지 올렸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둔한 여성도 나에게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흥, 세상에 어디 미인계만 있던가?
미남계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의 매력으로 그녀들을 설득할 뿐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결정권을 저에게 일임하셨으니 저와 대화를 계속하시죠.”
나는 능청을 떨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눈빛에 떨림이 생겼다는 정도였다.
“...”
“그래서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는 건가요?”
“...”
그녀들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워낙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기 시작했다.
저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너 이름은?”
“조향기라고 합니다.”
“나이는?”
“21세입니다.”
“애인은?”
“하하하, 없습니다.”
갑자기 나에 관한 질문을 퍼붓는 것이었다.
설마?
걸려든 건가?
나는 그녀들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페로몬에 반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인형 같은 외모네.’
나는 그녀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키는 대략 154cm 정도로 작았고, 은발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갈색이었고, 몸매는 가냘픈 것이 무게도 가벼워 보였다.
알비노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눈동자가 갈색이었다.
보통 알비노는 색소가 부족해서 눈동자가 붉은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참 신비로운 외모다.
“찾았다.”
“나크호딧 (находить).”
갑자기 쌍둥이들은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참신한 반응이다.
“너 마음에 들었어. 우리 숙소로 가서 이야기를 더 하자.”
그녀들은 갑자기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녀들은 나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묘하게 피부가 달아오르고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어져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모양새가 전과는 달랐다.
명백히 나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내력을 아는 처지에 숙소로 따라가는 것은 조금 겁이 나는군요.”
나는 능청을 떨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말에 담긴 감정은 진실이었다.
내가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는가?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당할 수도 있었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그녀들과 담판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뭐, 좋아. 그러면 이 호텔에 방을 잡지. 거기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좋습니다. 다만 테러에도 버틸 수 있는 VIP룸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겁이 많아서요.”
쌍둥이는 잠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제 마피아 나부랭이나 경호원들이 들이닥치지는 못할 것이다.
강력한 안전문이 설치된 방으로 들어가면 페로몬을 이용한 나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나 그녀들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면 너도 우리 조건을 좀 들어줘야겠어.”
“네?”
“두 손을 묶어도 될까?”
“에?”
“넌 남자잖아. 우리는 체격도 작다고. 안전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야. 어때?”
조금 망설여졌다.
손이 묶이면 무방비 상태라는 뜻이다.
그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만약 쌍둥이들이 생각보다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면 어쩌지?
꼼짝없이 밀폐된 방에서 당하는 것이다.
나는 섬찟한 상상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음. 그래도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게 끝이라고.’
나는 페로몬과 운을 믿기로 했다.
그녀들의 조건을 수락하고는 얌전히 뒤를 따랐다.
과연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