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백수에서 정규직으로 레벨 업! (2)
“괜찮아? 사고는 없었고?”
“사고는 무슨. 아무 일 없었어.”
나는 최영훈에게 연락했다.
주아린과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처음으로 그에게 하는 연락이었다.
그는 내가 건강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너 나한테 빚진 거다. 거기 있는 인간들 제정신 아니었던 거 기억하지?”
“그렇게 험한 자리인 걸 알았으면 내가 나오라고 했겠냐? 정말 미안하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쏘아붙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보이니 더는 뭐라고 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는 겁을 먹어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것뿐이겠지.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추는 것은 우리 둘 사이의 골만 깊게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최영훈의 행동이 야속했지만, 이번 일은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그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니까.
“하여간 다음에 또 친구 팔아넘기고 그래? 그러면 아주 뒈지는 거야. 오케이?”
“에이, 실수라니까. 앞으로 내가 너한테 잘할게.”
장난 섞인 책임추궁은 적당히 하고 그에게 이후의 일에 대해서 전했다.
물론 페로몬에 관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그녀를 함락시키고 졸지에 취업까지 일궈냈다는 말을 하자 그는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워~. 네가 그렇게 테크닉이 뛰어났어?”
“클럽에서 여자들이 나에게 환장하는 거 못 봤냐?”
나는 짐짓 여유를 부리면 말했다.
그러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너 요즘 몸도 좋아지고, 뭔가 분위기도 되게 멋있어지기는 했지.”
그는 진지한 말투로 나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동의를표시했다.
그게 나를 위험에 빠뜨린 것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냉정하게 현재의 상태를 분석해서 내린 결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 회사로 출근이다. 나중에 또 통화하자.”
“오케이. 나중에 보자.”
“아,그리고 너 학교에서 요즘 무슨 공부하지?”
“고용량 및 고효율 배터리 기술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고 있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고 긴 내용이야. 지금 여기서 다 말해?”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시간도 없었다.
나는 적당히 인사를 끝내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이 건물인가?’
나는 전화를 마무리하고 주아린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번화한 곳에 있는 거대한 빌딩이었다.
‘이 건물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겠다.’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자리 잡은 기업이었다.
혜성그룹의본사였다.
나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안으로 향했다.
“어서 와요. 향기 씨!”
입구에는 주아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나보고 싶어 하세요. 저랑 같이 가요.”
혜성그룹의 회장을 말하는 것이겠지.
약간 긴장이 되기는 한다.
“자네가 우리 아린이가 칭찬하던 그 사람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조향기라고 합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아직 젊은이의 패기를 간직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했습니다.”
“흠. 회사는 다녀본 적이 없고?”
“네. 다리가 불편해서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괜찮나?”
“네. 이제 완벽하게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음. 좋아!”
의외로 학력이나 특기에 관해서 묻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조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는 나에게 있어서 은인이란 말이야. 하하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혹시 그녀가 나와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한 걸까?
몸과 몸으로 나눈 격렬한 언어에 관해서까지 이야기한 건 아니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회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항상 사고나 치고 다니는 딸년이 회사일에 관심을 가지게 해줬으니 말일세. 공채의 정원을 늘려달라고 하질 않나, 비서를 추천하지를 않나. 나는 실로 감탄했다네.”
회장의 인상을 보니 아주 깨끗하고 선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면함과 성실함은 몸에 새기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났다.
단지 ‘부’에 대한 욕심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원과 사업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였다.
그저 있는 돈을 탕진하며 인생을 즐기는 2, 3세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아닙니다. 아린 씨도 훌륭한걸요.”
예의상 건넨 칭찬에도 회장은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내일부터 출근하게. 그리고 아린아.”
“네?”
“이렇게 된 거 너도 이제 회사로 들어와라. 슬슬 일을 배워야지.”
“아빠! 나 아직 대학원 다니잖아!”
“흥. 그까짓 대학원!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매일 애들이랑 어울리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는걸? 이제 놀이는 그쯤 하면 되었다. 너도 이참에 일을 배우도록 해라. 여기 향기 씨를 비서로 붙여줄 테니.”
어두워지던 그녀의 얼굴은 그 한마디에 다시 태양처럼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장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연신 나에게 윙크를 날리는것이었다.
이 양반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어쨌든 나의 취업과 더불어 그녀의 취업도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첫 출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신지혜에게 내가 겪은 일을 보고했다.
조절 장치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말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설마 사용하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녀는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주아린이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절 장치는 페로몬의 효과 때문에 나의 일상생활이 무너지지 않도록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지혜가 가장 싫어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 수치는 얼마나 올리셨어요?”
“90%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골적으로 한시름 놓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뭔가 있는 건가?
“왜요? 90% 이상 사용하면 안 되는 건가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곧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향기 씨, 제가 먹인 약과 그 장치가병기로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는 했었죠.”
“네.”
“그게 이유랍니다.”
“네?”
“그 조절 장치는 단순히 힘을 억제하거나 조절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때에 따라서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죠. 그러니 절대로 100% 이상으로 힘을 끌어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되는데요?”
“저도 실험한 적이 없어서 데이터가 없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죠.”
“그러면...”
“네. 몸이 폭발할 수도 있고, 갑자기 유전자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호르몬 밸런스가 깨져서 뇌와 몸이 폭주할 수도 있고요.”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몸이 얼어붙었다.
아니,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준다는 말인가?
이제 보니 나는 팔뚝에 폭탄을 달고 다닌 셈이었다.
그것도 화력이 미지수인 정체불명의 폭탄을 말이다.
“제가 심심해서 돌려봤으면 어쩌려고 말을 안 했어요?”
“워낙 신중하신 성격이라 절대 손을 대지 않을 거로 생각했죠.”
그건 맞는 말이다.
주아린이 나를 궁지로 몰기 전까지는 이렇게 사용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죠. 100%까지는 괜찮은 거죠?”
“네. 향기 씨가 아무런 장치를 쓰지 않을 때의 상태와 같으니까요. 100%까지는 사용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한계를 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소리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아린과 뒹굴면서 흥분한 마음에 수치를 더 올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앞으로 자주 사용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죠?”
“물론이죠.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겁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를 쫓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되도록 세상의 이목을 끌지 말라는 소리다.
나는 그녀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뚜르르르르-]
신지혜와 전화를 마치고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스마트폰이 몸을 흔들었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뭐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서유진이었다.
무슨 일이지?
“향기 씨?”
“네. 접니다. 무슨 일로?”
“요즘 회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네?”
“지금까지 회사는 신지혜의 행방을 뒤쫓고 있었어요. 그녀와 접촉했던 사람들도 감시하고 있었고요.”
“그런데요?”
“어제부터 인원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어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요.”
난데없이 왜 인원을 빼는 걸까?
혹시 신지혜가 자료를 세상에 공개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걸까?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아까 전화에서 왜 신지혜는 나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아직 안전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상대의 움직임이 변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뭔가 더 들은 건 없나요?”
“본사에서 직접 움직인다는 소리가 있어요. 우리의 일 처리를 믿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수색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본사요?”
“네. 저도 잘 모르지만, 해외의 유명한 민간 군사 기업이라는 소리가 있어요. 저도 말단이라 자세한 정보까지는 얻을 수 없더라고요.”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에이스 원’과 접점이 있을 법한 민간 군사 기업은 ‘블랙 애로우’뿐이었다.
그렇다면상황은 대충 이렇게 추리해볼 수 있다.
민간 군사 기업인 ‘블랙 애로우’는 신병기의 개발을 위해서 실험을 ‘화이어 제약’에게 의뢰했다.
‘신지혜’는 병기를 위한 개발인 것도 모른 채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곧 연구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크게 실망하여 자료와 약을 빼돌려 도주했다.
그것을 계열사인 ‘에이스 원’이 추적했다.
하지만 미적지근한 결과에 본사인 ‘블랙 애로우’가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또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겠군.’
나는 귀찮아진 상황에 혀를 찼다.
만약 서유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에게 다시 감시가 붙을 수도 있었다.
“혹시 내가 걱정돼서 전화한 거예요?”
“네. 저는 향기 씨가 무관하다는 걸 알지만요. 본사 쪽에서는 일을 거칠게 처리하거든요. 고문을 한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해외에서도 말이 많은 회사였다.
정말 돈과 권력을 믿고 막 나가는 집단인 모양이다.
국내에서도 경호업체인 ‘에이스 원’은 종종 구설에 오르는 회사였다.
소위 일을 거칠게 처리하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그런데 그런 회사보다 더한 회사라니?
정말 서유진의 말대로 거리낌 없이 고문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알려줘서 고마워요. 한동안 조심할게요.”
“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주세요. 바로 갈게요.”
전화가 마무리되자 나는 얼른 신지혜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서유진에게 들었던 소식을 전했다.
“그렇군요. 앞으로 더욱더 조심해야겠네요.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신지혜는 나에게도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비록 내가 자초한 일은 아니었지만, 계속 새로운 만남과 사건에 말려들고 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집과 회사를 오가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인생’이 지루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일상이 부러워지는 요즘이었다.